람 행정 장관이 말한 ‘새는 구멍’에 대해 변호사인 마거릿 웡(吳靄儀)은 ‘버그(bug)가 아니라 숨겨진 기능’
[4]이라고 강조한다. 현재의 범죄인 인도에 관한 법률은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기 불과 몇 달 전에 발효된 것이다. 1995년부터 2012년까지 입법 의원을 지낸 웡 변호사는 법안이 애초부터 중국 본토와 홍콩의 사법 체계 사이에 방화벽(firewall)을 세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뢰할 수 없는 중국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의 허브로서의 홍콩이라는 자부심과 홍콩의 법치주의를 지켜 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라는 중국의 공언이 사실이라면, 홍콩의 이런 법률도 중국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할 것이다.
안손 찬(陳方安生)은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정무 사장
[5]이자 중국령 홍콩에서도 초기 4년 동안 정무 사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녀는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986년까지만 해도 홍콩인이 중국 본토에서 저지른 심각한 범죄를 다루기 위한 치외 법권을 홍콩 법원에 부여하는 방안을 고려했었다고 전한다. 중국의 법원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시진핑 체제의 중국에 대해서 “예전보다도 신뢰도가 더 떨어진다”고 말한다.
6월 9일에 거대 군중을 길거리로 이끌어 낸 것은 바로 그 방화벽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주최 측의 추산이 정확하다면 홍콩 인구의 7분의 1이 시위에 참가했다. 많은 이들이 애도를 의미하는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번이 처음 참가하는 정치 집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시위대의 규모에 놀라고 있다. 홍콩 사람들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 지친 것 같다는 세간의 평가는 거짓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전개
6월 11일 시위의 시작은 작았다. 의회에서 법안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려 하자 수만 명의 시위대가 정부 기관들이 모여 있는 중심가로 집결했다. 이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시위대의 다수는 여름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었다. 나머지는 동맹 휴업 중인 수백 개 기업의 직장인들이었다. 대부분이 젊었다. 하지만 이들은 미숙하지 않다. 이 자리에 선 많은 이들은 2014년 몇 주 동안이나 거리를 뒤흔들었던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 민주화 시위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경찰의 페퍼 스프레이를 막기 위해 우산을 꺼내 든 시위대의 모습에서 붙은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시위다. 6월 12일에 거리로 나온 이들은 우산뿐 아니라 마스크, 스카프, 안전모를 썼고, 맨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닐 랩을 둘렀다. 몇 사람은 벽돌을 들고 나와 무력 진압을 시도하는 경찰을 향해 던졌다.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이번 시위는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도 놀랄 만한 규모다. 홍콩대학교의 법학 교수인 주름진 얼굴의 베니 타이(戴耀廷)는 ‘센트럴을 점령하라’ 시위의 지도부 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해 인터뷰에서 그는 이만큼 거대한 규모의 시위를 다시 보게 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걱정합니다. 특히나 경제 중심 구역에서라면 말이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민주주의가 요동치기를 기다리면서 “적절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베니 타이 교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월 ‘센트럴을 점령하라’ 시위를 주도했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현재의 시위대 중 일부가 그들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번 시위의 지도부가 받을 형량은 베니 타이 교수의 16개월 징역형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람 행정 장관은 이번 시위를 가리켜 “조직적으로 선동된 폭동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폭동’이라는 의미를 법률적으로 엄밀히 해석한다면, 이번 시위의 참가자들은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베이징의 관료들 역시 법안에 대한 저항이 이렇게 거세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콩이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 이후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국의 통치자들은 홍콩의 시민들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해 왔다.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사육되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운명 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홍콩 반환 당시 강조했던 자치권 보장을 훼손하는 제안들이 잇따르면서 홍콩은 가장 부유하고 국제적일 뿐인 중국의 도시 중 하나로 전락했다. 중국에게 홍콩은 여전히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의 국내 총생산(GDP) 합계에서 홍콩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7년 반환 당시 15퍼센트 이상에서 2018년 3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한편 홍콩의 저항으로 인한 비용은 증가하고 있다. 2003년의 시위로 홍콩 당국은 베이징이 도입하려 했던 반체제법을 보류해야 했다.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행정 장관 둥젠화(董建華)는 사임했다. 그 이후, 특히 2012년에 시진핑이 당의 지도자가 된 이후로 중앙 정부의 인내심은 점점 더 바닥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범죄인 인도 법안 정국에서 가장 놀라우면서도 신경 쓰이는 지점은 베이징의 정치국 상무 위원들이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례가 없는 이런 간섭은 중국 중앙 정부의 초조함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 내의 언론 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검열되고 있지만, 중국 관영 매체들의 대외용 논평은 “외세”가 홍콩을 “대혼란”에 빠뜨리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 이번 시위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자연 발생적인 운동으로 지역 변호사와 사제, 학자들, 그리고 정치적이지 않은 이익 단체들이다. 안손 찬 전 정무 사장은 6월 9일 시위에 네 시간 반 동안 참석했다. 그녀는 말했다. “시위대는 홍콩 정부가 계획을 수정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저항하기를 원했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고자 했습니다.”
홍콩 시민들은 이미 선거에 출마할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다. 선거 출마자는 중국의 통치를 인정하고 홍콩의 독립을 포기한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활동가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해 왔다. 범죄인 인도 법안이 없는 상황에서도, 공산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코 안전했던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납치를 당했다가 중국 본토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서는 자신의 죄를 억지로 고백하곤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는 일은 홍콩 사람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양심이 깨끗한 홍콩 사람이라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겁니다.” 안손 찬의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중국으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제 편안함은 위기를 맞고 있다.
안손 찬은 람 행정 장관이 생각을 바꾸고 중국으로부터 도망쳐 온 범죄자의 신병 처리에 대해 충분한 숙의를 거친 후에 “실효성 있는 방안”을 제안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낙관적인 바람이다. 홍콩침례대학교의 장-피에르 카베스탕(Jean-Pierre Cabestan) 교수는 미국과의 무역 전쟁으로 중국 지배층 내에서 압력을 받고 있는 시진핑으로서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상실감이 주는 엄청난 힘과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일의 한계를 보여 주는 교훈적 사례들도 많다. 왜곡된 중국식 법치에 노출되는 일은 많은 홍콩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상실감을 주고 있다. 급성장하는 본토와 통합을 하고 그로 인해서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범죄인 인도 법안이 어떻게든 강행 처리된다면, 그것은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공포와 체념이 거둔 승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