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이 책은 비트코인 투자법이나 유망한 코인을 선별하는 법, 블록체인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 정치, 경제, 사회를 다루는 인문학에 가깝다. 다만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주인공이라는 것이 기존의 인문학 책과 다른 점일 것이다. 또 수많은 기술 예찬론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블록체인 기술의 밝은 미래가 아닌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 역시 조금 다르게 보일 것 같다.
먼저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비트코인을 처음 접한 것은 2017년 하반기였다. 당시 홍콩에 거주하고 있던 내게 한국에 있는 지인이 비트코인 투자를 권했던 것이 계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에는 ‘김치 프리미엄(해외 거래소 비트코인 가격보다 한국 거래소 비트코인 가격이 높은 현상)’이 상당했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해외 거래소에서 구매한 비트코인을 한국 거래소에서 비싸게 파는 차익 거래를 손쉽게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비트코인 투자에 회의적이었다. 무섭게 폭등하는 비트코인 가격 차트를 보며 이 랠리가 얼마나 지속될지 의구심이 들었고, 평소에 재테크라고는 관심도 없던 지인들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모습에 버블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2017년 말부터 비트코인의 가격은 급락하기 시작했고 금전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글로벌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이 블록체인 사업에 진출한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Peter Thiel), 애플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넷스케이프 창업자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 트위터 창업자 잭 도시(Jack Dorsey) 같은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의 잠재력을 극찬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단순한 사기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기술 예찬론자뿐 아니라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나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같은 세계적 석학들이 비트코인의 잠재력을 낙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관련 책과 보고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탈중앙화, 분권화 등 블록체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수식어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끈 것은 ‘가치의 인터넷’이라는 표현이었다. 우리가 정보를 주고받는 TCP/IP 기반의 인터넷이 정보의 인터넷이라면 이중 지불 문제를 방지하는 블록체인은 중개 기관 없이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치의 인터넷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가치의 인터넷이 미래 금융 산업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 생각하며 블록체인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 터진 닷컴 버블 이후 인터넷이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았듯, 수많은 비관론자들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태동기답게 법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블록체인 업계는 그야말로 서부 개척 시대를 방불케 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가격이 폭등했을 때 차익을 실현해 인생 역전을 한 젊은 부자들은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다 보니 장기적인 산업의 발전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블록체인 업계에 뛰어든 사냥꾼, 투자자들을 현혹하는 협잡꾼들이 활개를 쳤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블록체인 업계의 정보 비대칭성과 시장 참여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혁신적인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비즈니스를 키워 내는 개척자들이 전 세계에 존재한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불확실성, 논쟁, 기대, 환희, 실망, 회의 등 2000년대 초 인터넷 산업의 복합적인 분위기가 블록체인 산업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2017년 말 이후 디지털 자산[1] 가격 폭락이 장기화되면서 블록체인 업계는 빙하기를 맞았다. 각종 사기 피해와 부작용이 부각되었고, 전 세계에서 규제가 강화됐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2018년 1월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거래소 폐쇄를 법안으로 준비 중이라고 발언했고 정부는 ICO를 금지하며 디지털 자산을 취급하는 업체들의 숨통을 조였다. 국내 정부는 “가상 통화와 블록체인은 별개”라는 입장[2]을 고수하며, 디지털 자산은 죽이고 블록체인은 살리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확실히 정했다.
사실 한국 정부가 디지털 자산을 투기 수단으로 취급하며 배척하는 이유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2000개가 넘는 디지털 자산의 대부분은 쓸모가 없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10년 후 생존할 디지털 자산의 비율은 10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닷컴 버블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는 타당한 추론이다.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0년 사이 898개의 ICT 기업이 미국 증시에 상장됐지만 2010년까지 생존한 것은 14퍼센트인 128개 기업들뿐이었다.[3] IPO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ICO의 허술함을 고려하면, 디지털 자산의 10년 후 생존율은 닷컴 버블 때 상장한 인터넷 기업보다 낮을 가능성이 높다.
미디어는 비트코인을 비롯한 디지털 자산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일조했다. 국내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던 방송 중 하나는 2018년 1월 JTBC가 주최한 유시민 작가와 정재승 교수의 토론회였다. 유시민 작가는 “비트코인은 현실적으로 사기”라고 발언하며 이를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에 비유했고 특유의 언변으로 능수능란하게 토론을 주도했다. 나는 유시민 작가의 발언을 듣고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 “2005년이 되면 인터넷이 경제에 미친 영향이 팩스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1998년에 말한 것이 떠올랐다. 물론 누가 옳았는지는 오직 시간만이 답해 줄 것이다.
JTBC 토론회를 본 상당수의 시청자 및 관료들은 유시민 작가의 열변에 설득된 것 같았다. 비트코인은 혁신의 아이콘에서 도박 수단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투기 수요를 근절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디지털 자산 가격의 폭락이 장기화하면서 블록체인 육성책에서 디지털 자산 제도화를 쏙 빼버린 정부의 정책은 명분을 얻었다. 미디어는 각종 사기 피해를 다루며 역기능을 부각했고 디지털 자산을 취급하는 업체를 사회악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사기가 아니다. 비트코인이 사기라면 디지털 자산을 제도화하고 있는 주요국 정부와 치밀하게 디지털 자산 관련 신규 사업을 진행 중인 글로벌 기업들은 모조리 바보라는 말이 아닌가? 비트코인은 서서히 디지털 금으로 진화하는 중이고 우리는 어쩌면 비트코인 본위제의 출현을 목도할 수도 있다.
유시민 작가는 비트코인 도박판의 승자는 채굴, 거래소, 그리고 투기 자본을 운용하는 주체라고 주장했다. 이는 분명 날카롭지만 절반의 해석에 불과하다. 비트코인 열풍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개인이나 기업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 그중에서도 미국과 중국이다. 일찍이 중국은 비트코인 채굴 및 거래소 생태계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블록체인 산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은 글로벌 기업들을 앞세워 비트코인 도박판의 규칙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하고 있다. 그것도 사악할 정도로 영리하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페이스북의 세계 화폐 리브라(Libra)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왜 애플은 골드만삭스Goldman Sachs와 파트너십을 맺었을까? 왜 JP모건(J.P. Morgan)의 CEO 제이미 다이먼(Jamie Dimon)은 비트코인이 사기라고 한 자신의 발언을 후회한다고 했을까? 왜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는 대선 출마를 고려한다고 했을까? 왜 월가의 금융 기관들은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질까? 왜 마이크로소프트는 비트코인 관련 사업에 적극적일까? 왜 삼성은 갤럭시 S10에 디지털 자산 지갑을 탑재했을까? 왜 IBM은 비트코인의 가격이 100만 달러까지 간다고 했을까? 왜 중국 인민은행은 디지털 화폐를 연구할까? 전직 NSA, CIA 요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이 유출한 기밀문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나는 이 모든 것이 비트코인, 블록체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중립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속한 제국의 성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술을 활용하려는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탈중앙화라는 블록체인의 철학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그리고 각국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상업화의 유혹, 강화되는 규제, 글로벌 기업들의 블록체인 사업 진출로 인해 탈중앙화라는 가치는 더욱 희석될 것이다.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비트코인이 탄생함으로써 새로운 디지털 제국주의의 시대가 개막했다는 사실이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음모론자들은 사토시 나카모토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에 유리한 방식으로 비트코인을 활용하려 들 것이고 우리는 그들이 설계한 질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