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및 다른 지역의 정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간단한 퀴즈.
a) 아래의 내용을 말했던 미국의 대통령 후보는?
b) 그가 택했던 선거 운동 방식은?
“우리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매년 수백만 명의 무허가 외국인들이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와서는 미국 시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만들어 놓은 사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미합중국에서 만들어진 모든 가공품들에 세금이 매겨지는 것처럼, 미합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상품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세금을 부과하자. 중국이 우리에게 관세를 매기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동일한 관세를 부과하자. 우리는 외국에 빼앗긴 일자리를 다시 고국으로 가져올 것이며, 이곳 미국에서의 일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오직 미국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다.”
a 문항의 정답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였으며 텔레비전에서 정치 평론을 했던 팻 뷰캐넌(Pat Buchanan)이다. 그는 1992년과 199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섰고, 2000년에는 개혁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b 문항의 정답은 한때 몸담았던 공화당과 완전히 작별했다는 것이다. 공화당 소속이던 시절에 뷰캐넌은 몇 개 주에서는 경선에서 승리도 했고 연설도 무난했지만, 공화당을 나온 후로는 저렇게 돌변했다. 2000년 대선에서 그의 득표율은 0.4퍼센트였다.
대선 성적이 저조했던 원인은 어느 정도 뷰캐넌 자신에게 있다. “이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개혁당 경선에서 그에게 패했던 어떤 후보의 말이다. 그는 뷰캐넌을 가리켜 “흑인을 좋아하지 않는 히틀러 추종자”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원인은 뷰캐넌의 메시지가 설득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2000년의 미국은 과거 냉전 시기의 라이벌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유일한 강대국으로 우뚝 서 있었다. 1980년대의 경제적 도전자였던 일본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고, 중국의 GDP는 이제 겨우 이탈리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직 9·11 테러가 터지기 전이었다. 뷰캐넌의 부정적인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었다.
2000년에 당시 개혁당에 희망을 걸고 뷰캐넌을 향해 “히틀러 추종자”라고 폄하했던 인물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다. 그런데 트럼프는 2016년에 공화당 경선에 입후보하면서 뷰캐넌과 비슷한 메시지를 훨씬 더 강도 높게 주장했다. 트럼프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전쟁이나 금융 위기, 중국의 급성장 등으로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 그 자체도 변했다.
오랜 역사와 함께 입지를 다진 많은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미국의 우파 역시 내부에 수많은 정파들이 공존하는 열린 조직이었다. 뷰캐넌주의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전통적인 보수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작은 정부와 친기업을 지향하고, 때로 종교적이며 사회적으로는 고리타분하고, 미국적 생활 방식이라는 관습에 애착을 가지고, 미국이라는 깃발과 가족이라는 가치를 가장 우선시하고, 국가 운영 능력에 있어서도 자신감이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바탕으로 저속하며 반동적이고 고립주의적인 국수주의의 성장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2016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많은 선진국들에서 보수주의 정당들이 반동적 민족주의 세력들에게 권력을 뺏기거나 도전을 받고 있다. 이는 비단 정당에 대한 위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 200년 동안 영어권 국가들에서 알고 있던 정치사상으로서의 보수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기도 하다. 우파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보수주의가 존재했던 시절을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믿음이다. 비록 그 이유가 잊혔거나 알아보기 힘들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보수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중앙 집권적인 정부 권력에 대해, 특히 선동 정치가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부 이외에도 왕실이나 군부, 교회와 같은 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지역 단위에서부터 국가 단위까지, 전문가에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서로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G.K. 체스터튼(G.K. Chesterton)은 《정통(Orthodoxy)》(1908)이라는 책에서 그들이 존중하는 전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전통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계층인 우리 선조들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에 의한 민주주의이다. 전통은 살아서 걸어 다니는 소수의 지배 집권층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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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향수를 좋아하고 무질서를 두려워한다. 정치 심리학자들은 음식에서부터 해외여행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보다 새로운 도전에 훨씬 더 개방적인 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작가인 윌리엄 버클리(William F. Buckley)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보수주의자의 역할이란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멈추라고 외치며 역사의 흐름을 막아서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주의의 핵심적인 통찰을 살펴보자면, 모든 역사가 멈춰질 수는 없으며 멈추는 것만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어떤 변화에는 저항해야 하며, 어떤 변화는 지연되어야 하며, 어떤 변화는 통치에 이용되어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다.” 때로는 죽은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해야만 한다.
하이에크의 잔소리
그리하여 보통 선거권 시대 이전의 영국 보수주의자들은 맨 위에 있는 군주에서 맨 아래에 있는 농장 노동자까지 이어지는 사회 질서의 보존을 선호했지만, 이후 자기 계발을 옹호하게 된다. 무역과 산업보다 토지를 선호했던 그들은 이제 비즈니스 친화적이 되었다. 국가 지도자로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라는 여성을 조심스럽게 선택할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무릇 여자들이란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져왔지만, 그녀가 자신의 역량을 성공적으로 입증해 보이자 그녀를 열렬하게 끌어안았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원칙이 있었지만, 원칙을 견지하는 태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쓰기 원칙에 대한 태도와 비슷했다. 그들이 만약 원칙을 고수하기만 했다면 버림받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권력을 잃고 아예 야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보수주의는 권력을 추구하는 하나의 통치 이념이다. 보수주의는 변화를 주도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보수주의가 갈망하는 권력이란 운전대라기보다는 브레이크에 가깝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내가 보수주의자가 아닌 이유(Why I am not a conservative)〉라는 에세이에서, 보수주의는 그 특성상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보수주의는 현재의 흐름에 저항함으로써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따라서 끌려가는 것”이 언제나 보수주의의 운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이에크는 비꼬는 투로 말했지만,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보수주의는 회의주의나 특권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보수주의 작가인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의 멋진 표현을 인용하자면, 보수주의에 관한 논쟁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 내부의 머뭇거림”에서 시작되었다. 몇몇 자유주의자들은 바스티유 습격 사건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프랑스 혁명을 미국 독립 혁명에 이은 자유주의의 두 번째 승리라고 생각했다. 영국 휘그당의 대표였던 찰스 제임스 폭스(Charles James Fox)는 프랑스 혁명을 1688년에 있었던 영국의 명예혁명이 재현된 것이라며 환영했다. 하지만 폭스의 휘그당 동료들은, 특히 버크는 프랑스 혁명이 대재앙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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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보수주의가 가장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버크의 생각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과 사람들의 욕구에 대해서는 현명한 판단과 권위에 의해 점검할 필요가 있으며,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회의를 갖는 것이 그 사상의 기반이다.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새로운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질서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여겼다. 반면 버크식 보수주의자들은 질서를 통제와 체계에 입각한 제도적인 것으로 보았다.
19세기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우파들이 훨씬 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국의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서로의 스파링 파트너였고, 그들이 싸우는 링 주위에는 사유 재산권과 개인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로프가 둘러쳐져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서로에게 피비린내 나는 적이었다. 유럽의 반동적 보수주의자들은 그저 변화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때려눕히려고 했다. 그들은 종종 군주제와 교회 권력, 귀족의 지위 등을 복원하기를 원했다.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과 부르봉 왕조 치하의 사보이 왕가를 예찬했던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의 《프랑스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s on France)》(1797)을 비교해서 살펴보자. 군주제가 타도될 위기에 처하자 메스트르는 현실 저항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왕권신수설의 중세 시대로 되돌리기를 원했다. 메스트르는 사형 집행인을 존중했는데, 그들의 칼날이 모든 질서를 수호한다고 여겼다. 참고 들어 주기 어려운 얘기인데, 그의 주장은 마치 러시 림보(Rush Limbaugh)
[3]의 18세기 버전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