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사상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는 사적 재산 소유권의 부재와 중앙 집권적인 전제 국가로 상징되는 “아시아적 생산 양식(Asiatic mode of production)”을 내세웠다. 여기에 열광한 사람들은 혁명적인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시스템뿐 아니라 중앙 집권 체제를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유럽이 오랫동안 차지해 왔던, 진보의 모범으로서의 자리가 아시아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스탈린은 중앙 집권적인 전제 국가 자체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여전히 아시아의 공산주의 체제를 지지해야 할 세력이라고 여겼다. 그는 마오쩌둥이 티베트와 신장 자치구를 점령하는 것을 돕고 그를 동맹으로 편입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관계는 악화했다. 흐루쇼프(Khrushchev)
[2] 해빙기, 중국은 재건되지 않은 과거였다. 마오쩌둥은 러시아를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국경을 따라 소련과 중국 군대가 수차례 충돌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 완전한 서방 세력을 꿈꾸는 ‘러시안 드림’은 완벽하게 부활했다. “우리의 원칙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민주주의, 인권과 자유, 법치 및 도덕적 규범 지상주의다.” 1992년 유엔에서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 유럽과 공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동양에 대해서는 이런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사상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다르지만, 우리는 이웃이고 협력해야 한다.”
1990년대 들어 상황은 틀어졌다. 러시아가 도입한 자본주의는 경기 하강과 올리가르히(oligarchs)
[3]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반대에도 나토(NATO)군이 세르비아 공습을 단행하면서 슬라브족의 자존심에도 금이 갔다. 하지만 옐친 대통령이 강조해 왔던 공통의 가치를 전혀 믿지 않는 푸틴 대통령이 세를 얻었을 때, 그는 여전히 서방을 러시아 현대화의 표본으로 간주했다. 서방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는 발트 제국이 나토군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도 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제대로 대처했다.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의 알렉산더 루킨(Alexander Lukin) 등 러시아의 서방 비평가들은 푸틴 대통령의 이런 정책이 얻은 것은 없이 도발만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의 영역을 침범당하고, 음모론에 휘말렸고,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루킨은 중·러 관계를 다룬 책에서 이렇게 썼다. “국제법에 입각해 새로운 세계 정치 시스템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망친 것은 서방이다. 일시적인 전능함을 이용해 강대국들이 무자비하게 착취하거나 국경을 파괴하고, ‘정당한 이유’를 들어 어떤 조약이든 위반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든 것도 서방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러시아가 중국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러시아를 포용하는 데에 실패한 결과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국과 가까워지면서 문명화된 세계에 동화되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1994년 러시아의 시장 개혁을 설계한 이고르 가이다르(Yegor Gaidar)는 러시아가 서방과 우호 관계로 돌아설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주장했다. 우선 국가 자원을 동원해서 서방과의 틀어진 과거를 회복할 수 있다. 표트르 1세가 집권기부터 1930년대까지 엄청난 인건비를 지불하고 취했던 방식이다.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거나 장기적 정상을 모색하는 일종의 기관을 만들어 ‘국가 길들이기(taming the state)’를 하는 것으로 진정한 서방 세계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가이다르는 만약 러시아가 두 가지 가운데 무엇도 택하지 않는다면, 대안으로 동방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이다르는 고대 중국 정치인 상앙(商鞅)의 경구를 요약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민이 약할 때, 국가는 강하다.” 푸틴 대통령의 좌우명이 될 만한 말이다. ‘밀레니엄 선언’에서 푸틴 대통령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천명했다.
아시아 정치 모델
푸틴 대통령의 안보 체계를 이끄는 총독들, 이른바 실로빅(siloviki)
[4]들은 민간 기업들을 불법으로 전용한다. 민간 기업들의 자산은 푸틴의 측근들에게 재분배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 투자의 수혜자가 된다. 카네기 센터의 가브예프 중국 연구원은 “중국에서 투자로 들어온 돈 가운데 알짜는 푸틴의 친구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서방에 러시아 석유를 팔아 134억 달러(약 15조 8000억 원)를 축적했지만 미국의 제재로 유럽에서 축출된 겐나디 팀첸코(Gennady Timchenko)는 현재 푸틴 행정부의 러·중 기업인 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러시아의 지대 추구 사업자와 그들의 단기적인 이익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싱크탱크인 러시아 국제 문제 연구소(RIAC)의 안드레이 코르투노프(Andrei Kortunov) 소장은 “가끔은 중국에 대한 러시아 정책이 크렘린궁 거물들이 흥미를 가지는 로비 활동에 따라 설계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반대로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중국의 민간 기업들은 러시아 투자를 꺼린다. 일부는 미국의 제재에 두려움을 느낀다. 일부는 재산 소유권과 명확한 규칙이 부재한 상황을 우려한다. 러시아에서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선 중국 사업가들이 ‘바오후산(保护伞)’이라고 부르는 보호막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실로빅들이 제공한다. 러시아처럼 작은 시장을 위해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할까? 여기에 역설이 있다. 러시아 정권은 동양을 선택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과 투자자들은 러시아가 서양의 일부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다. 투자자들은 연줄이 아니라 법규를 원한다. 관광객들은 투바 자치 공화국이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보고 싶어 한다.
사업가들은 소련의 붕괴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 있지만, 중국 공산당의 관료들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공산주의 초강대국이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 불만에 의해 붕괴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광장 민주화 시위대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소련의 붕괴는 중국이 무슬림 거주 국경 지역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서방의 지배 구역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확장될 가능성까지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주요 임무는 안심한 러시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최대한 중국에 우호적으로, 최소한 중립적으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약한 이웃 국가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너무 힘센 이웃 역시 원치 않는다. 중국은 투자했고, 이익을 취했으며, 석유와 무기를 사들였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미국과의 관계상 추가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러시아와 같은 편에서 투표하는 경향이 많았다. 예를 들어, 중국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와 합병할 때도 이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중국은 이익을 취했다.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은 가까운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러시아와 미국의 연대 가능성을 제거했다. 푸틴 대통령의 결정은 중국에 대한 서방의 관심을 러시아로 돌렸다. 동시에 러시아를 중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몇 주 후 푸틴 대통령과 기업가 수행단, 관료들은 새 동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날아갔다. 합의안에는 극동 지역에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4000억 달러(약 470조 원)에 이르는 30년짜리 가스 공급 계약 ‘시베리아의 위력’ 프로젝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올해 말부터 가동된다. 러시아와 중국은 또 액화 천연가스(LNG) 시장 공략을 위해 북서 항로를 개척하는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중국이 석유 기업에 투자하는 경우 적용되었던 비공식적 규제들은 완화되었다. S-400 방공 미사일 시스템을 포함한 러시아의 비핵 무기 전반을 이제는 베이징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