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노동
“우리는 지금 노동의 본질이 장대한 변화를 겪는 중심에 서 있다. (…중략…) 공유 사회를 토대로 부상하는 사회적 경제는 더 많은 젊은이들에게 보다 큰 가능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자본주의 시장의 전통적 고용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렬한 정신적 보상을 약속한다.”[1]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2014년 발간한 저서 《한계비용 제로 사회(zero marginal cost society)》에서 디지털 기술 혁신으로 인해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공유경제(sharing economy)’가 활성화되고, 이로 인해 재화의 생산 및 유통에 필요한 한계비용이 거의 무료에 수렴하는 한계비용 제로 사회가 등장할 뿐 아니라, 앞으로는 현재의 시장 경제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점차 쇠퇴하고 ‘협력적 공유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에서 생산 수단과 근로자가 분리되어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일반인이라도 누구든지 소비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생산자인 프로슈머(prosumer)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플랫폼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이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술 진보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이 모든 분야에서 뜨거운 화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독일의 인더스트리 4.0(Industrie 4.0)에 착안하여 사용한 것으로, 2016년 세계경제포럼을 계기로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슈밥은 그의 저서에서 4차 산업혁명은 그 규모, 범위, 복합성 면에서 “과거 인류가 경험했던 그 무엇과도 다르다”고 단언했다.[2]
현재의 변화를 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하는 것은 다소 과장되었다는 회의론도 존재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4차 산업혁명은 아직 그 개념이 정립되었다거나 학술적으로 검증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사물 인터넷(IoT), 빅데이터(Big data), 인공지능(AI), 3D 프린터, 로봇 등 구체적인 기술이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또는 디지털 기술 혁신으로 불리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디지털 전환은 노동법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새로이 상용화되는 기술이 시장 및 노동에 빠르게 침투하며 변화를 일으키고 있고, 일하는 방식에서 전에는 예상할 수 없었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플랫폼과 앱에 기반한 공유경제의 출현이 최근 많은 이들의 노동 환경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법적, 제도적 대응을 요구한다.
공유경제는 숙박 공간 등 재화가 공유되는 형태와 운전 등 서비스가 공유되는 형태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노동법의 관심사는 후자에 가깝다. 단순히 재화만을 공유하는 경우에는 노동법상 쟁점이 발생할 여지가 크지 않지만, 서비스가 공유되는 경우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이 직접 수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서비스를 노동법이 상정하는 근로로 볼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이를 수행하는 자는 실정법에서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어느 범위까지 노동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 사용자 책임의 주체는 누구인지 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원래 공유경제는 문자 그대로 있는 것을 나누어 쓴다는 의미로 1970년대부터 언급되어 왔다. 미국에서 그러한 의미로 처음 사용된 용어는 ‘협력적 소비(collaborative consumption)’였다.[3] 쓰지 않는 재화를 버리기보다 서로 공유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향한다는 맥락에서 사용된 용어였다.[4] 법학 분야에서는 2008년 하버드 로스쿨의 로런스 레식(Lawrence Lessig) 교수가 sharing economy 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는데, 위키피디아(wikipedia) 등 웹 콘텐츠가 배타적 지식재산권에서 벗어난 현상을 연구하며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상업적 경제와 대비되는 맥락에서 공유경제라는 용어를 제안했다.[5]
그런데 현재의 공유경제는 순수한 공유가 아닌 수익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상시화된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유휴 자산, 즉 쓰지 않는 물건이나 본인의 시간과 노동력을 활용해 수익 활동을 시작했다. 온라인 플랫폼은 이러한 활동을 촉진하는 기반이 됐다. 재화의 공유, 디지털 기술, 이윤 추구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앱 기반 경제 활동은 이제 보편화되었다.[6] 스마트폰 앱, 온라인 SNS, GPS 위치 추적, 카드 결제 시스템 등을 적극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 노동인 온디맨드(on-demand) 경제, 크라우드워크(crowdwork) 등이 등장하고 있다.
지금의 노동 현실을 들여다보면, 리프킨의 예언처럼 자본주의의 모순이 사라진다는 장밋빛 전망보다는 최첨단 기술에도 불구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여전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고 분석하면서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7]라고 지적했다. 그의 성찰을 바탕으로 부연하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소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여 수익 활동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1인 기업가’라고 할 수 있지만, 성과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앱의 신호에 반응하고 타인의 요청에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과다한 노동에 시달리는 ‘자기 착취 노동자’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 최초로 디지털 노동의 법적 분쟁을 촉발한 계기이자 여전히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차량 공유 앱 우버(Uber)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버는 2018년 매출 113억 달러를 기록했고, 기업 가치는 1200억 달러로 추정되며, 미국의 호출형 교통수단에서 이미 70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버 운전자의 운전 시간 대비 소득을 산정해 보면 평균적으로 시급 8달러 중반에 불과해 미국 대부분의 주 정부 최저임금보다 낮은 액수다. 운전자들의 인적 구성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통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경우 백인보다는 유색 인종이 많고, 고소득층보다는 저소득층이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8]
우버는 운전기사들을 ‘파트너’로 지칭하고, 노동법상의 근로자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러한 주장의 핵심 논거는 운전자들의 근로시간이 자율적이라는 점인데, 실제 운전자들의 근로시간을 살펴보면 절반 이상이 주 1~15시간가량 운전하지만, 30퍼센트가 16~34시간, 9퍼센트가 전일제 근로에 해당하는 35~49시간을 운전하며, 주 50시간 이상 운전하는 경우도 4퍼센트 있었다.[9] 우버 운전자들은 예상보다 장시간 근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통제도 받는다. 앱 사용률이 저조하거나 고객 평점이 낮으면 계정 차단 등 불이익을 받고, 차량 관리와 고객을 대하는 매너 등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구체적인 행동 수칙도 있다. 우버 운전자는 결코 자유롭게만 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버 운전자들은 비슷한 차량 공유 서비스인 리프트(Lyft) 운전자들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원에 근로자성을 인정해 달라는 취지의 집단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쟁에 대한 2015년 캘리포니아주 법원의 판결 내용은 디지털 노동이 노동법적 문제로 부상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판결은 사회적으로 널리 주목받았다. 이후 학계에서도 디지털 노동에 대한 법적 논쟁과 분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원고인 우버 및 리프트 운전자들은 본인들이 노동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운전 업무에 대한 최저임금, 초과근로수당, 차량 유지비, 사회보호 등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버와 리프트는 이들이 앱을 내려받아서 사용하는 일종의 자영업자인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이며, 일반 근로자들처럼 기업의 감독하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자신들은 중개인 또는 플랫폼 개발자일 뿐이라며 법적 책임을 부인했다.
캘리포니아 법원 판결[10]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근로자인지 여부는 사용자가 행사하는 지배권(right to control)의 존재 여부에 따라 가려지는데, 여기에서 지배는 기업이 업무의 세부 사항까지 모두 관여해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앱을 통하여 수행하는 업무의 본질상 일정한 정도의 자유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지배를 받는 근로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 우버가 기술 개발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배척했다. 우버라는 기업의 생존은 앱을 이용하는 운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우버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운전자들의 노동을 활용하고 있으므로 운전자들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진다고 했다. 법원은 우버와 리프트 운전자들이 근로자인지 여부는 사실 관계를 좀더 정확히 심리해야 한다고 판결하고, 적어도 이들을 자영업자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안은 결국 우버와 리프트 측에서 원고들에게 합의금을 제시하여 2016년 당사자들 간 합의로 종결되었다.
미국에서는 우버와 같은 차량공유 서비스 외에도, 다른 영역의 플랫폼 노동에서 법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청소 서비스를 중개하는 앱인 홈조이(Homejoy)와 핸디북(Handybook), 세탁물 배달 서비스인 워시오(Washio), 식료품 장보기 대행 서비스를 표방하는 인스타카트(Instacart) 등에서 최저임금, 근로시간 등 노동법 적용 여부에 대한 분쟁이 벌어졌다.[11] 가정 관리, 청소, 세탁, 식료품 구매 등 가사노동 분야에서 플랫폼 노동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기존 제조업 산업 구조 시대에는 남성 생계 부양자-여성 전업주부의 성 역할 노동 분담이 우세했으나, 지금은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소득 활동 참여가 보편화되면서 ‘돌봄의 시장화’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12]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요청되는 서비스의 상당 부분이 가사노동 관련 분야라는 것은 이러한 변화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가사노동의 상품화(commodification)가 보편적 추세라면 그러한 수요를 반영한 공유경제 기업의 숫자 및 규모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노동법적 지위도 더욱 빈번히 그리고 비중 있게 다뤄질 것으로 전망된다.[13]
우리나라에서는 스마트폰 앱을 통한 음식 배달 서비스에서 법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배달 대행 앱인 ‘스피드배달’을 통해 식당의 음식 배달 업무를 수행하던 고등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부상당한 사안이었다. 피해자는 일하던 중 부상당한 것이므로 산업재해 보상을 청구했고, 근로복지공단은 앱 개발자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고 보아 보험료를 징수했다. 스피드배달은 이에 반발하여 보험료 부과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원심[14]에서는 배달 대행을 하던 피해자가 산업재해 보상 대상인 근로자는 아니라고 판단하며 배달 대행업체의 손을 들어주었다. 앱을 통해 배달 요청을 수락 또는 거부할 수 있다는 점, 앱에 GPS 기능이 없어 위치를 추적할 수 없었다는 점, 출퇴근 시간을 업체에서 지정하지 않았다는 점, 고정적인 급여를 지급받지 않고 배달 실적에 의해서만 수익이 산정된다는 점, 근로계약서 미작성과 4대 보험 미가입, 오토바이를 업체로부터 대여했지만 유류비 등은 배달원이 부담했다는 점 등을 들어 근로자성 판단 기준의 핵심인 사용종속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8년 4월, 유사한 다른 사안과 함께 선고한 판결에서 원심을 깨고 새로운 판단을 했다.[15] 우리나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제125조에서 근로자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하게 노무를 제공하며 산업 재해로부터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 집단의 사람들은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고, 시행령에서 명시하는 직종에 해당할 경우 재해 발생 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들을 특수형태근로종사자(약칭 특고)라 한다. 대법원은 음식 배달 앱의 배달원을 근로자로 보기는 어렵지만 특고에는 해당하므로 산재 보상을 받을 여지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얻고 건당 수수료를 통해 수입을 확보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부분적으로나마 보호할 가능성을 열어 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노무 제공자라 해서 기계적으로 법의 적용 범위에서 배제하지 않고, 이들의 수익 구조와 노무 제공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한 부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배달원이 특고로 인정받기 위해 갖춰야 하는 전속성 요건을 엄격히 해석하지 않은 점은 디지털 노동 종사자들의 보호를 위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16]
대법원 판결보다 조금 앞선 2017년, 고용노동부는 디지털 노동이 증가하는 최근의 이러한 동향을 반영하여 ‘퀵서비스기사의 전속성에 대한 고용노동부 고시’를 마련한 바 있다. 배달원이 비록 어느 한 기업에 고정적으로 채용된 근로자는 아니더라도, 특정 업체에서 소득의 과반을 얻거나 업무 시간의 과반을 쓸 경우 산재 보상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4차 산업혁명이 회자되는 지금 기존의 노동법이 보호하던 근로자 범주가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디지털 기술 혁신으로 인해 플랫폼을 활용한 노동이 점차 확산되면서 앱을 통한 업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소득 확보를 위해 하나가 아닌 다양한 업체로부터 일감을 모색하는 것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수월해졌고, 또 빈번해졌다.
기회의 확대는 새로운 위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토바이에 음식을 싣고 배달을 하는 기사들의 상당수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는 일자리를 구할 때 제약을 받았던 미성년 청소년들이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일터에 나가고, 다치고, 사망한다. 이들의 위험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순식간에 여러 종류의 앱을 내려받아 일거리를 찾는 청소년들을 두고, 특정 기업이나 사용자에게 주로 종속된 사람만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법적 접근 방식이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의 국면은 디지털 노동 시대에 부합하는 노동법을 만들어 가는 과도기로 보인다. 일하는 방식이 달라지더라도, 일하는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노동법의 기본 원칙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다.
기본소득과 노동 ; 일할 권리일까, 일하지 않을 자유일까?
앞서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노동의 등장에 대해 살펴본 바와 같이, 디지털 전환으로 인해 ‘고용 없는 성장’을 넘어선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특히 일자리 감소 문제를 중심으로 많이 논의된다. 인공지능, 로봇 등 예전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디지털 기술 혁신이 인간의 고용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이 다수 발견된다. 칼 베네딕트 프레이(Carl Benedikt Frey)와 마이클 오스본(Michael Osborne)의 2013년 보고서는 20년 내로 미국 일자리의 47퍼센트가 인공지능 등으로 인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전망해 노동의 미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촉발했다.[17]
부정적인 미래를 단정 짓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저숙련 직종을 중심으로 실업률이 높아질 수 있으며, 디지털 전환의 결과로 기존의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는 연구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18] 이러한 전망은 현존하는 노동 체제와 노동법에 대해 중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술로 인한 일자리 감소가 예측되는 시기에 노동시장에서 취업을 통해 소득을 확보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까? 헌법은 모든 국민의 근로 기회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만일 현재의 일자리가 상당 부분 기술로 대체되는 것이 불가피하게 맞이할 변화라면 고용 기회라는 권리가 보장될 수 있을까? 소득 보장과 생존권을 도모할 대안적인 방식을 구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 기본소득(basic income)이 현재의 불평등, 양극화와 같은 경제·사회적 난점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본소득은 국가 등 정치 공동체가 자산심사와 근로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주기적으로 무조건 지급하는 현금으로서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정기성, 현금성을 주요 개념 요소로 한다.[19]
기본소득은 현재 노동의 부정의를 시정할 대안으로서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기본소득과 노동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산업 구조의 새로운 변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노동권이 강화되고 재창조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완전 고용을 목표로 하는 현재의 근로권 관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 헌법은 국민이 일할 기회를 갖는 것을 헌법상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택하고 있는 이상, 국가가 나서서 기업들에게 모든 국민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채용하라고 강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청년 실업은 사회적 문제로 계속 부각되고 있다. 이미 취업한 사람들도 과연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정신적으로 의미 있는 일자리를 누리고 있는지 의문이다. 소득, 고용 형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사실상 우리나라 경제 활동 인구의 75퍼센트 이상이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20] 현실은 헌법에서 선언하듯 모든 사람이 근로의 기회에 접근하고, 또 좋은 일자리를 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헌법의 근로권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실현하기 어렵다. 고용 창출이 사실상 기업에 맡겨져 있다는 점, 완전 고용이라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로 인해 오히려 노동 유연화를 정당화하는 법과 정책을 유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법원은 일할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국가 재정이 필요한 정책적 결정이라며 근로권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적극적 보장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21] 현재의 근로권은 고용에 대해 형식적인 기회를 제공하고 있을 뿐, 양질의 노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에는 본질적 결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2]
이러한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살펴보자. 기본소득의 개념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동시에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핵심 특성은 무조건성(unconditionality)이다. 무조건성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소득의 무조건성이다. 기본소득을 받는 자가 현재 얼마만큼의 소득이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기존의 사회부조 제도처럼 급여를 받기 위해 인격적 굴욕을 감수해 가며 본인이 일정 수준 이하의 빈곤층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산조사(means-test)를 거치치 않고 주어진다. 둘째, 지출의 무조건성이다. 기본소득으로 받게 될 금액을 어떤 용도와 방식으로 소비하고 지출할 것인지에 대한 조건을 달지 않는다. 특정한 방식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현물이나 바우처 형태는 기본소득으로 볼 수 없으며, 현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셋째, 행위의 무조건성이다. 기본소득을 받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23]
기본소득의 무조건성의 세 번째 차원인 근로 없이 소득이 주어진다는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념으로 여겨지는 일할 의무와는 배치된다. 반대론자들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근거로 기본소득을 비판한다. 우선 실제로 기본소득을 실행한다면 사람들이 취업을 회피하게 되고, 노동 공급이 줄어들어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또한 일하지 않으면서 소득을 받는다는 것은 호혜성의 원칙에 어긋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일하는 사람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결과를 조장하여 윤리적 문제도 있다고 우려한다.
기본소득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기본소득을 시행하면 사람들이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는 심리적 반응일 뿐이며, 기본소득과 유사한 실험을 했던 사례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기본소득이 노동 공급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24] 오히려 생계유지를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부담이 줄어들어 다른 영역에서의 자발적인 노동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25] 일하지 않는 자들의 노동 무임승차 문제에 대해서도 반박할 수 있다. 현재의 노동 체제에서는 돌봄노동을 비공식 영역에 두고 있어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돌봄노동에 대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 젠더 불평등을 양산하고 있다. 즉 남성이 여성의 돌봄노동에 무임승차하는 문제가 이미 존재하며, 기본소득이 새로운 무임승차를 조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본소득을 통해 돌봄노동을 정의로운 방식으로 분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기본소득이 노동과 소득의 연계를 끊는다는 면에서 기본소득의 입장을 탈노동화(de-labourization)로 설명하기도 한다. 탈노동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4차 산업혁명과 연관 지어, 미래에는 모든 일을 기계가 하고 사람은 더 이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사회를 상정한다. 대표적으로 팀 던롭(Tim Dunlop)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일 자체가 많은 문제의 근원이다. 극단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탈노동 접근 방식에서는 ‘완전 실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하며, 인류가 번영하려면 사회의 생산적인 일은 거의 다 기술(로봇, 인공지능 등)에 떠넘기고 인간은 자유롭게 다른 활동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략…) 고대 그리스 시민들은 예술과 교육에 많은 시간을 쏟았고, 배우는 데 큰 성취감을 느꼈으며, 사회와 정치 참여에 몰두했고, 모든 노동은 노예들에게 맡겼다. 21세기 시민인 우리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모든 노동은 로봇들에게 맡기고 인간은 평등하게 생산적인 일을 하며 사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걸까?”[26]
이러한 견해에서는 사람이 일하는 것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사실상의 의무로 변질되었음을 지적한다. 기본소득이 노동에 대해 제시하는 중요한 의미는 일할 권리(right to work)로부터 일하지 않을 자유(freedom from work)로의 이동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27] 이러한 논리는 결국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과 구분되기 쉽지 않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근로 요건 없이도 주어진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기본소득을 곧 탈노동화와 동일시하는 견해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근로 여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지지하는 것이라면 현존하는 근로권과의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할까? 기본소득은 일각의 우려처럼 아무도 일하지 않는 사회라는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노동의 교섭력을 전반적으로 강화시켜 ‘나쁜 노동’을 거부하고, ‘좋은 노동’을 요구할 권리로 이어진다는 측면에서 근로권을 재정립하고 보완할 잠재력이 있다.
기본소득의 이론적 정립자인 정치 철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는 기본소득의 핵심 가치로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real freedom for all)’를 말한다. 실질적 자유란 개인이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마지못해 일해서라도 소득을 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다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일을 원하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28] 임금노동의 가장 큰 어려움은 시장에서 본인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그 대가로서 소득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자신을 고용한 타인에게 경제적, 인격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기본소득의 옹호론자들은 인간은 타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면 결코 실질적 자유가 확보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기본소득은 좀 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모든 사람이 온전한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이자 기회다.[29]
이러한 실질적 자유의 의미를 노동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기본소득은 개인이 임금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탈노동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노동의 의미와 개념 범주를 어떻게 획정하느냐 하는 새로운 고민을 해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생존 유지를 위한 노동(labor)뿐 아니라 작업(work), 행위(action)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한 바 있다.[30] 임금노동이 아닌 돌봄노동, 시민적 정치 활동, 창의적인 예술 노동, 자원봉사 등도 모두 보호가 필요한 ‘일’로 인정한다면, 기본소득은 노동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노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지지하고 돕는 기능을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본소득이 기여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형태의 노동이 돌봄노동이다. 돌봄노동은 여성이 주로 전담하여 젠더 불평등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젠더 평등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예측이 공존한다. 부정적인 시각은 기존에 돌봄노동을 주로 수행하던 전업주부와 같은 여성들이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면 취업 동기가 감소되어 가정에 남아 있게 되고, 오히려 젠더 간 노동 분업을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기본소득이 주어진다고 해서 남성들이 돌봄노동에 동참하게 될지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 연구들도 있다.[31]
그러나 기본소득이 배우자의 유무, 혹은 가정 내 권력 관계와 무관하게 모든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에 주목하면, 기본소득은 불리하고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던 여성들에게 지지대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임금노동이나 가사노동 중 어느 것을 택하든지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32] 따라서 무급 가사노동 혹은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유급 돌봄노동을 수행하던 여성들은 기본소득에 힘입어 열악하고 취약한 근로조건을 거부하는 것이 비교적 수월해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자만이 가치 있는 시민으로 대우받고,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2등 시민처럼 취급받던 부정의의 문제 또한 더욱 평등한 방향으로 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에서 중요한 가치는 세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과거 고도 성장기에는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고서라도 높은 임금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비교적 강했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직업에서의 자아 존중과 일과 삶의 양립(work-life balance)이 가능한 직업을 갖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도 기본소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본소득을 실시한다면 근로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장시간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노동자가 시간에 대한 자율성을 확보할 권리는 일터는 물론 삶 전반에서의 인간다운 생활권 향유와 직결되어 있다. 독일 연방노동사회부의 《노동 4.0》 녹서 및 백서는 이를 ‘시간 주권(zeitsouveränität)’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33]
기본소득 논의는 현재 우리의 노동 현실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노동법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지점들을 새롭게 할 풍성한 논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현재의 근로권은 양질의 노동이 아닌 나쁜 노동을 거부할 권리로 그 의미와 범위가 확장될 수 있다.
한국의 노동 4.0을 위하여
‘노동 4.0’이라는 개념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되었지만, 이제는 산업만이 아니라 직업 세계 전체의 노동 형태 및 노동 관계를 조명하는 개념이 되었다. 노동 4.0은 또한 4차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하거나 촉진하는 환경과 조건에 관한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을 지금의 과제에 연결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유의미하다. 첫째로는 당면한 문제를 중장기적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면에서, 둘째로는 해당 기술에 더욱 많은 자본과 자원을 투입해 기술의 발전을 촉진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술 발전이 사회 문제 해결을 돕도록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노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필요한 노동 4.0은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인가? ‘한국형 노동 4.0’은 기술 혁신과 산업 구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양질의 노동과 품격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노동의 미래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구상하는 청사진이라 할 것이다.[34] 다시 말하면, 한국형 노동 4.0은 글로벌 경제에서 현재 모든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마주한 기술 혁신과 산업 구조의 변화라는 보편적 문제에 응답하되, 전후 고도의 경제적 압축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 내며 그 성과와 함께 부작용 또한 겪어 온 한국적 특수 상황을 동시에 담아내는 노동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열린 접근 방식이다. 인간과 노동을 중심에 놓고 지금의 기술 혁신과 미래 사회를 사고하는 실천적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법은 미래에도 여전히 노동자와 그 계약 상대방인 사용자 사이의 법률 관계를 규율하고, 법적 보호가 필요한 자를 포착하여 보호를 제공하는 역할을 중요하게 수행할 것이다. 다가올 미래의 노동 세계에서도 이러한 보호 원칙의 실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디지털 플랫폼에 기반을 둔 공유경제 서비스 제공 업무에 대한 노동법적 규율이 가능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공유경제 종사자들에게 어떤 법적 보호를 제공할 것인지, 이를 제공할 사용자의 책임은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든 노동이 제공될 수 있는 디지털 전환에 발맞추어 노동시간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호출 대기’라는 새로운 노동 형태에 대한 법적 규율 및 근로자의 연결차단권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 역시 노동법의 책무다. 실업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강화하는 일은 직업 훈련 및 소득 보장과 같은 구체적 제도에 대한 재설계를 요구한다. 동시에 일자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현재의 사회보장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 수명은 점차 증가하는데 일자리는 점점 감소하게 된다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충분한 소득을 획득할 기회도 점차 줄어들게 된다. 국가의 역할은 점차 커질 것이다. 기본소득 등의 대안적 사회보장 제도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역할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기업의 혁신과 활력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사회 구성원들의 복지 안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지, 과연 이윤 추구만이 기업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지도 조심스럽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일터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집단적 노사관계법을 다시 생각해 보자. 노동에 대한 다양한 요구가 제기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근로자 집단 및 근로자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될 것인지, 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디지털 노동 환경에서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모습으로 구체화될지는 불투명하지만, 근로자 집단을 통한 거래의 대등성 확보라는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기본 원리는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한국형 노동 4.0은 노동의 인격성을 조명하는 연대의 가치, 기술과 경제의 변화에 따른 창의적 생존 방식인 혁신의 가치를 모두 담아내야 할 것이다. 한국적 노동 문제에 대한 실질적 해법을 모색하는 동시에, 경제 활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국민 대다수가 일터에서의 안정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논의의 장을 열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압축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며 축적한 역동성, 기술 혁신을 발전의 계기로 삼아 더 나은 근로조건과 일과 삶의 양립이 가능한 노동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한국형 노동 4.0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