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있는 노동
7화

대담; 노동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다

이철수 교수님은 최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동시간 제도개선위 위원장을 맡으셨다. 탄력근로제 개선 합의문이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이번 합의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 들려주신다면.

이철수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현장에서 필요한 제도다. 근로시간을 관리하거나 운용하는 단위를 확장하자는 취지다. 근로시간은 원칙적으로 1일, 1주일 단위로만 규제되는데 이 단위 기간을 넓히자는 발상이다. 단위 기간을 넓히면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한편 근로자 입장에서는 일하는 시간이 들쭉날쭉하게 되어 생활이 불규칙해진다는 우려도 있다. 두 가치를 조정하는 것이 탄력근로제 논의의 핵심이다.

탄력근로제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도입된 1997년 당시 대논쟁이 있었다. 불규칙성 완화를 위해 단위 기간을 짧게 하고, 근로자와 사용자 간 협정으로 미리 합의해 놓는 두 가지 방식이 제안되었다. 흔히 사용자들은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 원래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잘못된 이해다. 탄력근로제는 예측 가능한 노동 공급에 관한 것이다. 집단적 서면 합의를 통해 특정일, 특정주에 탄력적으로 일한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하는 제도다.

이런 변화는 왜 필요할까?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철수 단위 기간을 기존의 3개월에서 6개월까지 늘리기로 합의한 것이다. IT 기업의 경우, 3~4개월 정도 집중하지 못하면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산업이나 업종에 따른 일괄적 필요라기보다는 직무 내용에 따라 필요한 변화다. 예컨대 같은 자동차 산업 내에서도 R&D 영역에서 집중 근무가 더 필요하다. 주 52시간 근로시간제가 시행되면서 부칙에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연장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실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시장 수요에 대응하는 방법을 사회적 대화로 제시한 것이다.

단위 기간을 6개월로 늘리면 집중 근로시간이 길어지며 근로자 건강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소득 보장 문제도 있다. 탄력근로제를 활용할 경우 기존의 연장근로와 초과수당을 대체하게 될 수 있다. 근로자의 실질 소득 감소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경영자 측의 애로, 근로자의 건강권과 소득보장 부작용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모처럼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풀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을 전망해 본다면.

이철수 지금까지 탄력근로제 사용 비율은 3.2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노동계에서는 별로 활용되지 않는 제도인데 왜 개선을 서두르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기존의 단위 기간 3개월로는 현실 수요에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며, 6개월로 연장되면 유연한 근무 제도가 조금 더 확대될 것으로 본다. 향후 시장이 답할 문제다.

탄력근로제 합의 과정에서 위원장으로서 논의를 이끈 소회, 사회적 대화라는 보다 큰 화두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이철수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대화라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화보다는 투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대화라는 것은 자기 생각을 양보해야 가능한 것인데, 우리 노사관계에 그런 합리적 태도가 과연 있는가.
노동계, 사측 모두 양보한 뒤 조직에 설명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대화보다는 투쟁을 조직 전략에 더 유리하다고 여긴다. 단기적으로는 도덕성 우위를 점해야 대중성 확보에 성공한다. 대화를 하나의 건수로 생각하고, 원하는 내용의 합의가 나오지 않으면 무능하고 실패했다고 여긴다. 대화를 모색했던 사람들이 조직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런 일을 겪으면 대화를 더 안 하게 된다.

대화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대화를 통한 갈등 흡수 기능이 있다. 둘째, 대안을 모색하며 좀 더 진전되고 생산적인 방안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이 과정의 산물로 합의까지 이루어지면 더욱 좋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노사정은 첫째, 둘째는 건너뛰고 무조건 합의만 요구하는 강박이 있다. 합의는 본시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부부지간에도 합의가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 합의에 실패하는 순간 대화 참여자들이 부당하게 비난받는다. 반대로 합의에서 빠졌던 사람들은 ‘봐라, 우리가 옳다’는 식이다. 침묵한 방관자가 승자가 되어 버린다.

학자들도 잘못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동조했다. 한국에 제대로 된 사회주의 정당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노사정 무용론을 제기한 진보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한국처럼 사회적 대화 경험이 풍부한 나라도 없다. 1998년 2. 6 협약은 IMF라는 국가 위기를 극복한 대타협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마련한 노동법 개정안은 정부의 날치기 입법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민주화 열기, 국제화, 유연화 등 여러 배경을 종합하여 법안을 만들고 사회적 타협을 한 것이다. 2015년 9. 15 사회 협약도 내용 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으나 정부 부처들의 일방적이고 파행적인 태도가 문제였다.

노사정 합의에 대해 네덜란드 등 선진국 사례만 얘기하면서 정작 우리의 좋은 경험을 평가 절하하고 사회적 대화가 성숙되기 어렵다는 주장을 무책임하게 확산한 결과,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일조한 꼴이 되었다. 한국노총은 과거 한때 어용성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한국노총의 대화 참여 노력을 불온시하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묘하게 투쟁적인 노선을 편들거나 편승하려는 흐름이 사회적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사회적 대화에 있어 노사 양쪽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본인은 노동법제 개혁에 많은 관여를 했고, 노태우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노동법개정연구회,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에서의 활동을 평가받아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기에 홍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의 논의 때에는 양쪽 모두 전문성이 있었고, 대화하면서 논의가 진전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투쟁 위주로 가다 보니 합리적 대화보다는 자기 입장만 고집한다. 경영계, 노동계 둘 다 마찬가지다. 대화를 통해 공통의 인식 기반을 넓히며 전문성과 책임 의식을 갖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조직에 돌아가서 면피하는 수준으로 안일하게 접근한다.

이번 탄력근로제 대화에서는 양쪽 모두가 수용할 카드를 제시하고 압박 전술도 썼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최소화하고, 문제를 단순화해서 결과적으로는 잘 합의된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한국 노동법의 변화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철수 연혁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노동법의 변화는 곧 노동 체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 노동법은 초기에는 외국법을 계수, 모방하며 출발했지만, 발전을 거치며 독자적이고 한국적인 모습을 갖추어 갔다.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독특한 사례다. ILO가 한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예의 주시하는 이유다.

시기별로 보면, 우리나라는 1953년도에 일본법을 계수하며 최초의 노동법을 제정했다. 독재 정권 시기에는 노사관계가 사실상 없다시피 했고,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서는 노동3권이 실종되는 위기도 있었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이라는 반전을 맞는다. 그 전까지의 노동법은 성장과 효율만을 중시했다면, 이 무렵부터는 사회적 형평을 강조하고 노동에서의 민주화를 반영하는 쪽으로 점차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런데 1990년도부터 신자유주의가 대세적 사조가 되고 세계화 요구라는 압박이 등장한다. 사용자들은 노동 유연화를 요구했다. 한국도 OECD, ILO에 가입하면서 세계 속 위상에 걸맞게 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흐름이 1997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통한 노동법의 전면 개정으로 이어졌다. 법에 있어서는 가장 큰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정권에 따라 다양한 부침을 겪지만 과거처럼 어느 한쪽의 단선적 요구만 관철되는 상황은 더 이상 없다. 물론 정권 속성에 따라 노동 행정에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법 제도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일방의 편만 들 수는 없게 되었다. 특정 정권 때는 무조건 근로자가 유리하고, 어느 때는 불리하고, 그런 것은 더 이상 없다. 그만큼 한국이 발전한 것이다.

이다혜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서구 사회에서 300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우리는 사실상 30년 안에 고도의 압축 성장을 통해 이뤄 냈다. 그 과정이 우리 노동법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 노동법을 세계적 수준에서 바라볼 때, 외국에 알릴 만한 우리 노동법의 특수성은 어디에 있을까. 외국 학자들과 대화해 보면 한국의 다이내믹한 노동 운동을 높이 평가한다. 예컨대 어느 국가든지 보편적으로 이주노동자 문제를 겪는데, 비교법적으로는 한국처럼 국내 노조가 외국인 노조 조직화를 적극적으로 돕고, 승소 판결이나 관련법 개정을 이끌어 낸 사례가 흔치 않다. 한국은 독재 정권을 스스로 타도한 경험과 힘이 있는 국가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우리 노동법과 노사관계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경험에서 나온 노동 운동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국민이 법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큰 자산이다.

세계적인 기준에서 한국 노동법을 평가해 본다면.

이철수 보호 수준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분법적인 논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노동법이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세계경제포럼(WEF)은 한국 노동법이 경직적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일종의 경영인 설문 조사다.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한국 노동법에 대한 학술적 분석에 따르면 결코 경직적이지 않다.

노동법을 평가할 때 보호 수준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규범의 합리성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진영 논리, 유연한가 경직적인가 하는 이분법적 접근은 안 된다. 외국에서 한국 노동법이 경직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해고가 엄격한 점, 투쟁적 노조가 있기 때문에 사업하기 힘들다는 점 등이다. 경영인들의 피상적인 관점이다. 구체적인 한국 노동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 법제를 보호 수준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 평면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도 없다.

우리 노동법은 괜찮은 법제라고 총평할 수 있다. 한국적인 실험을 하며 국제 노동기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앞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에너지를 얘기했는데, 한국인은 매우 평등 지향적이다. 노동법의 존재 이유와 본래 모습이 무차별적인 보호이기도 하다. 근로의 종류를 따지지 않고, 블루칼라인지 화이트칼라인지 묻지 않고 근로자를 보호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협약자치보다는 국가의 법과 규범을 통해 규율하기 때문에 국가 개입이 많고 보호 수준이 낮지 않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민주화 과정에서 노동의 목소리가 컸던 우리의 배경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제도의 측면에서는 괜찮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경제, 노사관계 모두 이중구조 문제가 심각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편차가 크다. 하나의 규범으로 두 가지 현상을 다 포섭하기 매우 힘들다. 어느 쪽에 맞추느냐에 따라 법의 정당성과 타당성이 달라지고 논쟁의 여지가 생긴다. 대기업 근로자 문제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영세 사업자,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 불리는 취약 노동자들의 문제가 심하다. 모든 영역이 이중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다 보니 노동법이 두 개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최근 노동법의 변화 중 일터에서 직접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주 52시간제 시행과 최저임금 인상이다. 두 가지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이철수 우선 주 52시간제 시행은 노동부가 최대 68시간까지 가능한 것처럼 잘못 해석했던 것을 이번에 입법적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맞는 방향이다. 다만 사용자들의 숨통을 조금 틔워 주기 위해 탄력근로제를 논의한 것이다. 과거에도 수차례 근로시간 법 개정이 있었지만, 법정근로시간을 단축했던 것이므로 근로자는 초과근로와 연장근로수당을 통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이번 주 52시간 도입은 최초로 실근로시간을 단축한 것이다. 근로자는 실질 수입이 감소하고, 사용자는 더 많은 업무를 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런 변화에 대해 직종별, 업무별로 입장이 각기 다르고 찬반이 복잡하게 나뉜다.

큰 방향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 근로시간은 지나치게 길다. 연간 2000시간이 넘고,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독일의 일부 금속노조의 경우 주 28시간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한 사례가 발견된다. 앞으로는 장시간 일할 상황조차 안 된다. 저성장 시대에 그만큼 일할 거리도 없다. 근로시간 단축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야 한다. 요즘 ‘시간 주권’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근로시간에서 자기 결정권을 강화하는 것은 하나의 시대적 추세고, 시민 생활, 일·가정 양립 등 개인 행복을 위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최저임금의 경우, 인상했을 때 현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속도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제도적으로는 최저임금 산입범위와 결정 방식에 관한 논의가 중요하다. 산입범위와 관련해 기존에 정기상여금을 제외하던 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복리후생비, 정기상여금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은 옳은 방향이다. 다만 결정 방식으로 단체교섭만을 고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최저임금은 양 당사자 입장 절충보다는 과학적, 객관적인 공식으로 접근하는 편이 낫다.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노사 입장을 반영하도록 하는 구간설정위원회 방식은 현재로서 맞는 방향이라고 본다. 빠른 법제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객관성과 주체적 의지를 절충하는 방식에 찬성한다.

최저임금 결정 방식은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다. 뉴질랜드나 호주는 위원회 또는 법원이 정하고, 미국은 법률로 정한다. 한편 산별노조 체제가 잘 되어 있는 유럽 국가들은 최저임금을 법으로 정하지 않는다. 단체협약이 자연스레 최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독일에서 최저임금을 법으로 정하는 변화가 있었다. 양극화,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자는 취지가 있다. 노동법 발전에서 세계적으로는 2008년도 미국발 금융 위기가 또 한 번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진보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주류 경제학을 반성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분배 정책의 필요성을 말한다. 최저임금도 분배 정책의 하나로 활용될 수 있다.

흔히 노동 보호와 기업 경쟁력 강화는 양립할 수 없는 목표로 여겨진다. 과연 실제로 그런 것일까?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이철수 공리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소모적인 논쟁이 생긴다. 자본주의 모순을 시정하려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노동법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물건이나 집을 사고파는 시민법적 거래와 인간의 노동을 거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사회적, 경제적 열위에 있기 때문에 보호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노동법이 출발했다. 자본과 노동이 형식적으로 평등할 수 있다는 환상은 깨진 지 오래다. 노동을 보호하고 집단적 목소리를 키워 주어야 실질적 정의가 구현된다는 점에 모든 국가가 동의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검증된 논쟁이 필요 없는 보편적인 공리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점에는 설명이 필요 없지 않나.

보편적 공리에 대해서는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 직업관, 노동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노동에 대한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기초 없이 공리를 건드리며 불필요한 논쟁을 한다. 특히 주류 경제학자, 시장주의자들이 인간을 추상적으로 상품화하고, 노동을 교환 대상으로만 여기며 무책임한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노동법은 구체적, 사회적 인간을 전제한다.

이다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자명한 원리인데 이것이 공격받는 시대가 되었다. 노동법의 역사와 출발점은 인권적 동기에 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이 빈민 노동자가 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나온 것이 노동법이다.

18~19세기에 사람이 일하고 생존하는 것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치열한 고민이 전개됐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붕괴를 예견하고 계급 혁명을 주창한다. 공산주의 혁명은 현실 정치에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이를 계기로 개인 간의 거래와 계약만 보호하는 민법을 넘어 일하는 사람의 인격을 보호하는 사회법으로서의 노동법이 탄생한다. 법학자 안톤 멩거(Anton Menger)는 최초로 근로권, 생존권 이론을 정립하며 국가가 노동자를 보호할 때 자본주의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음을 밝혔다.

기업은 노동법 준수를 비용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노동법 다 지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기업은 근로자 보호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영 역량의 문제는 아닌지 살펴야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장시간 노동이 큰 문제다. 그에 반해 북유럽 국가들은 노동시간이 짧다. 서울대 안상훈 교수는 북유럽은 좋은 법과 제도가 있기도 하지만, 기업 경영 방식도 매우 체계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직무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니 굳이 장시간 노동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동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곧 경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철수 19세기 마르크스, 안톤 멩거 등을 돌이켜보면 그 시대 담론은 모두 기본적으로 노동가치설에 터 잡고 있었다. 지대나 이자 소득을 불로소득(unearned income)으로 반가치적으로 본 것이다. 이런 정의관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볼셰비키 혁명 등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로 가되 생존권을 제도화하는 방향이다. 지금의 노동3권은 이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보장될 수 있었다.

19세기에 형성된 방법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은 노동자 분해 현상이 일어나서 더 이상 하나의 획일적 규범으로 다루기 어렵고, 보호의 사각지대가 생긴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세심한 배려와 다각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는데 그런 이해 없이 법과 원칙을 지키자고만 하면서, 정작 법의 원래 정신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산업 구조가 변하며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이철수 한때 시장주의자들이 “밖이 추운 것이 아니라 안이 덥다”는 식의 주장을 했다. 우리 노동 문제의 원인을 소위 정규직 과보호에 돌리고 진정한 해법 찾기를 게을리한 것이다. 논리적 근거도, 반박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현실에서 비정규직이 심각한 문제인데, 원인을 파악하고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비정규직에 대해 법과 제도는 꾸준히 정비하고 있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법의 잘못일까, 현실의 잘못일까.

비정규직을 비롯한 새로운 노동 문제에 대해 가장 좋지 못한 접근 방식은 노사가 책임을 정부에만 전가하는 법률 만능주의다. 사용자의 무책임한 자세는 물론이며, 노조도 마찬가지다. 같은 노동자로서 누군가는 비정규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함께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출발점은 대동단결이다. 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은 법과 제도 잘못이라는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것은 아닌지. 서로 책임을 회피한다. 노사관계 당사자의 책임 있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전환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등장하고 사회 문제로도 부상하는 중이다. 노동법은 새로운 디지털 노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다혜 디지털 노동에 대해 논쟁을 촉발시킨 대표적인 계기가 우버의 등장이다. 영국에 머물 때 우버를 종종 이용하며 운전자들과 대화를 나눠 보았다. 재미있는 현상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우버를 부업 수준이 아닌 풀타임 일자리이자 주된 소득원으로 삼고 있었다. 둘째, 그러나 이들은 온종일 우버 기사로 운전하면서도 스스로 근로자로 여기지 않았다. 고정된 시간, 장소에 출퇴근하지 않고 상사 지시를 받지 않으니 자기는 일반 근로자와는 다른 자유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적 태도가 디지털 노동의 두 가지 차원을 보여 준다. 보호가 필요한 측면과 그렇지 않은 측면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미국에서는 우버 운전자들이 비록 앱을 이용해 운전하더라도 일정한 통제를 받는 것이므로 자영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판결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근로자인지 아닌지 그 여부가 법적으로 정리된 것은 아니며, 아직 어떤 국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지 못했다. 디지털 노동에 대한 규율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우리나라는 배달 대행 앱을 중심으로 법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10대 청소년들이 아르바이트로 앱을 이용해 음식점 배달을 하다가 다치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최근 대법원 판결은 이런 사안에서 근로자성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한 범주로 보아 산재 보상이 가능하도록 했다. 플랫폼 노동의 분야가 점차 다양해질 것이므로 앞으로 법적 분쟁의 종류와 범위가 점차 증가할 것으로 본다. 지금 가사 서비스 대행 앱도 시장 규모가 급성장 중인데, 고객의 집에 와서 가사노동을 대신해 주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전통적 노동법은 사용자에게 종속되어 일하는 사람을 근로자로 보는데, 종래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디지털 노무제공자에게 그 기준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 플랫폼 노동의 사용자 책임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기업이 이용자들의 서비스를 통해 수익 창출을 하는 구조라면, 문제 발생 시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분담할지 구체적 고민이 필요하다.

이철수 생각해 보면 플랫폼 노동이 꼭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골프장 캐디의 경우, 골프장이 일종의 플랫폼이다. 지금의 우버, 배달 앱 등은 그 플랫폼이 디지털화된 것이 특징이다. 노무 제공자, 서비스 이용자, 플랫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기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디지털 앱에서의 새로운 문제는 사용자가 없기도 하고 때로는 다수의 사용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노무 제공자가 이 앱도 들어가고 저 앱도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기존 플랫폼과 다른 새로운 문제는 누구에게 사용자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계약 형태도 전과 다르다. 기존의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파견 근로자 등의 범주가 있는데 디지털 노동은 또 다른 형태의 전형적이지 않은 노동이다. 사고나 문제가 생기면 누가 법적 책임을 지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근로자 판단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별로 서로 접근이 다르다. 독일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법적으로 우버 금지 국가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려면 유형적 접근보다는 기능적, 실무적 접근이 필요하다. 꼭 노동법을 적용해서 근로자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사고가 발생했다면 산재 보상을 적용하면 되고, 불공정 거래 문제가 있다면 경제법을 적용할 수 있다. 노동법은 이 문제에 대해 사회보장법은 물론이며, 경제법과도 교류를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디지털 노무 제공자들이 집단적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더라도, 디지털 노동에서는 과거처럼 파업하는 방식이 과연 유용한 전술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디지털 노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구체적인 고충을 해결하는 좋은 시스템을 원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지 지켜보아야 한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일자리가 대폭 감소한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면 기본소득과 같은 대안적인 보호 제도가 필요할까?

이다혜 최근 4차 산업혁명을 고용 감소와 연관 지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등으로 대량 실업 사태가 촉발되고, 노동을 통한 임금소득 확보가 어려워지니 불가피하게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다. 그런데 사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있을 뿐더러 디지털 전환이 대량 실업을 초래한다는 전망은 학술적으로 검증된 시나리오는 아니다. 여전히 찬반론이 공존한다.

기본소득 도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더 중요한 논거는 이런 것이다. 산업 구조와 가치 창출 방식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노동가치설이 유효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정보와 지식을 통해 더 많은 가치가 생산되는 현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산업 자본주의에서 ‘인지 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꼭 많은 근로자를 채용해 노동 집약적으로 제품 생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불특정 다수의 이용자가 생성하는 빅데이터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인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가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수익이 기업 자산으로만 축적되고 일반 대중에게는 분배가 안 되어 소득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다.

기본소득은 여기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정보 가치를 생산하는 데 일반인 모두가 기여하고 있으니, 임금노동과 무관하게 기본소득을 실시한다면 사회 전체의 재화를 정의롭게 분배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철수 먼 훗날에는 기본소득이 자리 잡을 것이라고 본다. 언젠가는 전체 인구의 5퍼센트도 안 되는 취업자가 가치를 창출하고, 나머지는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분배 정책 또는 사회보장시스템으로는 안 된다. 다만 기본소득이 ‘왜 지금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나 저항이 있을 것이다. 근대적 노동관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소득을 준다는 발상은 현재 우리 법감정이나 상식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on)은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Give Man a Fish’라고 갈파한다. 근대적 노동관은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주라고 하지만, 기본소득은 고기를 직접 주라는 것이다. 고기를 직접 주는 방식의 분배가 꼭 생소한 것은 아니다. 미국 알래스카나 스위스 같은 곳에서 기본소득과 유사한 방식을 실험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성남시 청년 수당 등 부분적 시도가 진행 중이다. 현재 제도로는 미래 문제에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지금부터 대안적 사회보장제도로 검토해 볼 만하다. 앞으로 성장이 멈추거나 ‘수축 사회’가 된다는 논의도 있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모델을 찾으려면 어떤 방식이든 개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생소하거나 전통적 감정에 반한다고 배척할 만큼 한가한 시대가 아니다.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양극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분배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그런 차원에서 실천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일하는 삶을 살면서도 노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고, 노동법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금을 사는 우리 모두가 노동법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철수 시몬 베유(Simone Weil)는 “노동은 이성의 학교”라고 했다. 우리가 살면서 직업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중요하고 고귀한 것이다. 그러니 노동을 규율하는 법과 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데, 우리 교육은 이 점에 무관심하다. 직업이 굉장히 중요한데 여기에 대한 의미 전달이 잘 안 되고 있다. 직업관은 인생관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일에 만족하는 동시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투쟁적 노사관계는 생존 방식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부재한 데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성이 부재한 영역에는 비이성이 파고들기 마련이다. 기업도, 노동자도, 노동이 갖는 본래적, 제도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비생산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사용자는 단기 경영실적에 집착하여 노동을 귀중한 자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건비 정도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노동이야말로 일종의 사회적 자산이고 기업의 신용이다. 이런 점에 대한 교육이 전혀 없다. 제도화된 노동에 대해 올바른 시각과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은 유례없는 초고속 경제 성장을 거치면서 기성세대와 청년 간 경험과 인식의 차이가 크고, 일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도 많이 다르다. 미래 세대를 위한 노동법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다혜 책 제목이 《영혼 있는 노동》이다. 알베르 까뮈가 “노동 없는 삶은 부패하나,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고 말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영혼 없이’ 일하고, 더 심하게는 요즘 유행어처럼 ‘영혼을 갈아 넣은’ 노동까지 한다. 지나치게 힘들고 소모적으로 일한다는 점에 다들 동감한다.

결국 미래는 청년들이 이끌어 가게 될 텐데, 청년 세대는 노동법에 무엇을 기대할까. 과거 경제 고성장기에는 노동법의 목표가 높은 임금 수준과 노동조합 조직률을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 청년들이 일에서 원하는 가치는 전혀 다르다. 무조건 많은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다. 지금 만나는 학생들과 이야기해 보면, 로스쿨에 다니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도 연극을 배우고 뮤지컬을 한다. 임금노동이 아닌 삶의 다른 영역에서 반드시 자신의 개성이 발현되는 지점을 찾는다. 기성세대와의 결정적인 차이다. 일터 외에 삶의 다른 영역도 존중하는 노동법이 필요하다. 노동에서의 가치가 크게 변화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법에서 ‘자유’의 가치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노동법은 자유, 평등이라는 양대 가치 중에서 주로 평등에 집중해 왔다. 그동안 자유라는 단어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오염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구에서는 1970년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정권을 비롯한 보수 정권에서,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기업 경쟁력만 옹호하고 법과 규제를 무조건 완화하는 것을 자유와 동일시하는 편협한 이해가 팽배했기 때문에 자유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면 위험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그런 맥락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노동에서의 자유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유와 평등 모두가 필요하다. 무한 경쟁과 동일시되는 잘못된 의미의 자유 말고, 인간을 보호하고 평등을 구현하면서도 해방시켜 주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의 통찰처럼 생계유지에만 얽매인 임금노동이 아니라, 자아실현, 의미 있는 창조적 활동, 정치적 참여가 가능한 노동이 필요하고, 그것이 다시금 부각되는 시대가 왔다. 이것이 ‘영혼 있는 노동’ 아닐까.

이철수 영혼 있는 노동, 노동에서의 자유. 무척 중요한 가치다.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 우리 아버지 세대는 압축 성장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노동했고, 우리 세대는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동했다. 그렇다면 미래 세대는 과연 왜 일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알던 노동운동의 존재 이유는 “더 많이”였다. 미국 노동총연맹(AFL)의 초대 위원장이었던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는 노동운동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the more”라고 답했다. 더 많이 버는 것이 목표라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그렇지 않다. 현재의 노동 문제들은 더 많이 벌기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각하고 고용 안정조차 어려운 시대다. 직장을 언제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더 많이’를 추구하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현재 젊은이들에게 자유의 가치가 중요하다면, 구체적으로 개인의 선택권, 시간 주권, 소득 보장 등이 구현되어야 한다. ‘영혼을 갈아 넣은 노동’을 해야 하는 균열 일터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에 맞는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서 대개 국가와 제도를 바라본다. 그런데 국가에 모든 것을 의존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행위자들의 주체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기업은 이윤 추구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장기적 상생의 조건을 어떻게 확대할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노동조합은 산업화 시대의 전투적, 대립적 모델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협력적 자세로 열린 대화의 장에 나서야 한다. 사회 전체의 연대를 강화하고 혁신과 성장이 가능한 토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여야 한다. 노사 모두 스스로가 사회적 책임의 주체라는 인식을 갖고, 기존 노사관계의 자세, 전략, 방법론에 대한 변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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