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국가인가, 어떤 국가인가
완결

누구의 국가인가, 어떤 국가인가

국가 정체성과 갈등


위안부 문제, 강제 동원 문제 등으로 대표되는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한국과 ‘이미 끝났다’는 일본, ‘사과하라’는 한국과 ‘이미 했다’는 일본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양측의 인식이 좁혀지지 않고 갈등이 지속되는 이유는 양국의 문제 인식과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 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목표로 합의했지만, 오히려 국내외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문제 판결 이후, 양국은 또 다른 갈등에 직면했다. 갈등을 극복하려는 양측의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양국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이루지 못한 채 협력과 갈등의 부침을 거듭하며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진정한 사죄와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일본 스스로 사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혹은 무엇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 대 개인이 아닌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는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국가로서 지켜야 하는 자국의 정체성, 변화하는 국제 및 국내 정치적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타국과의 관계, 이런 요소들의 국내외적 영향 등을 고려할 때,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반성, 그리고 한일 간의 역사 화해는 생각보다 더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양국 인식의 기반이 되는 정체성(identity)은 한일 갈등의 원인을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한국과 일본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상대국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아보면 동일한 사안에 대한 두 나라의 인식 차이와 이해의 간극을 파악할 수 있다.

정체성은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은 아니지만,[1] 일반적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본질이자, 특정 상황에서의 역할 및 행동, 타자와의 관계 형성에 나타나는 특성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이 국가적 수준에서 논의될 때 국가 정체성(national identity)은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역사적 영토, 공통의 신화, 역사적 기억, 대중문화, 법적 권리 및 의무를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는 집합적 정체성이다.[2] 국가에 대한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 소속감, 국민과 국가에 대한 정서적 애착감인 애국심, 국민의 기준과 범위를 규정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3] 이는 자국민과 타국민을 구별하는 감정으로 강한 사회적·심리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국가의 구성원은 국가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타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정체성을 공고히 함으로써 결속력을 다지게 된다.[4]

국가의 특성과 본질을 규정짓는 국가 정체성은 국가 간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5] 개별 국가가 인식하는 세계 질서, 자국의 위상과 역할, 대외 정책 구상과 국가 간 관계 형성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는 미국인들의 정체성 및 미국 외교 정책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독특한 기원과 역사 발전 과정, 정치 제도 등을 가지고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탄생한 국가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으로 연결되었고, 미국의 대외 정책에 적극 활용되었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미국은 당시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보였던 유럽과 달리, 희망의 상징이자 선(善)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에게 ‘미국은 다르다’는 의식은 확고했다. 미국인들의 예외주의 인식은 미국적 체제의 승리를 위해 19세기에는 영토 팽창을 정당화했고, 20세기에는 세계의 미국화를 정당화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미국이야말로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으며, 국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미국은 다르다는 인식에 기반한 국가 정체성이 미국이 국제 사회의 주체가 되어 국제 정치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국가 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미국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접근도 여기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국가 정체성은 국가 혹은 민족의 집단적 결속력을 강화하지만, 자신과 타자의 구분이 지나치게 배타적일 경우 국수적·배타적 민족주의, 상대국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국의 안보나 국익을 저해할 수 있는 상대방을 적(敵)으로 인식하고 규정함으로써 내부 지지와 결속력을 도모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 체제가 국가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한 국가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진 것은 대표적인 예다.[6]

 

일본의 국가 정체성; 세계가 보는 나


일본만큼 스스로를 탐구하고, 정체성을 연구해 온 국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일본, 일본인, 일본 문화에 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논의들은 ‘일본론’, ‘일본인론’, ‘일본 문화론’ 등으로 불리며 일본인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하나의 연구 분야로 자리 잡았다. 저명한 심리학자 미나미 히로시(南博)[7]는 일본의 정체성을 역사적 시기로 나누어 일본인의 국민성과 관련된 방대한 논의들을 소개했다. 나카네 지에(中根千枝)[8]는 일본 사회의 구조를 분석해 일본인의 인간관계를 설명했고, 도이 다케오(土居健郎)[9]는 ‘어리광, 응석’ 등을 뜻하는 아마에(甘え)라는 용어를 통해 일본인의 심리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다.

정치외교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주로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고 타국과 관계를 맺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본은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며, 타국과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국가 재건 과정에서 미국은 빼놓을 수 없는 국가다. 1945년 패전 후 이어진 미국 연합군 사령부 통치하에서 일본의 외교는 미국과의 관계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되었다. 일본의 전쟁 책임자들은 미국 주도하에 열린 극동 군사 재판에서 처리되었고,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주권국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지역 방공(防共) 지대의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전범국이자 가해국인 일본의 전후 처리 및 사죄와 배상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안보 문제는 미국에 의존하는 한편, 경제 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한다는 요시다 독트린(Yoshida Doctrine)을 중심으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냉전기 미소 양극 체제에서 일본은 미국의 우방이자, 동아시아의 반공 보루로 자리 잡는다. 전후 일본에게 미국은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의 외교는 ‘대미 종속’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라 미국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전문가들 간 이견이 나타났다. 미일 동맹이 일본 외교의 근간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전후 미국으로부터 강요된 질서를 넘어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독자적인 위치를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부터 견고한 미일 동맹을 지지하며 일본이 다시 대국(great power)이 되고, ‘정상화(become normal)’의 수순을 밟아 미국과 동등한 국제적 지위에 올라야 한다는 입장까지 다양한 견해가 나타났다.

전후 일본 외교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요소는 1946년 미군 주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초안을 작성하여 만들어진 개정 헌법과 그 안에 포함된 무력 사용에 관한 조항이었다. 전후 미국의 대일본 점령 정책의 우선적 목표는 일본의 ‘비군사화’였고,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반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점차 일본의 경제력과 국력이 상승함에 따라 일본의 국가 활동에 군사적 활동이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견이 발생하게 되었다. 일본의 국력 상승에 걸맞게 전 영역에서 무력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무력은 자주 국가로 가는 필수 조건이므로 자력에 의한 방어와 대국으로서의 강한 면모를 드러내야 한다는 입장과, 일본은 무력 사용에 의한 교전 상태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며, 평화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립했다. 아베 신조(安部晋三)총리는 미국과의 견고한 동맹 지지와 무력 사용 및 자위력 강화를 통한 ‘대국으로서의 일본’, ‘강한 일본’을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보통국가주의자로 분류된다.

이처럼 일본은 패전과 미군의 점령하에 형성된 전후 질서, 그리고 경제 발전 이후의 장기 불황 경험 등을 겪으며 국제 사회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주로 고민하며 국가 전략을 모색했다. 전후 일본은 미국의 점령 및 동아시아 정책의 영향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했다. 냉전 초기 미국은 전략적 이해에 따라 전범국으로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천황을 비롯한 전쟁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1952년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면서 전범들이 공직으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패전 후 일본이 국제 사회로 다시 복귀하는 데 있어 아시아 식민 국가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전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전후 미국에 의해 수립된 질서에 순응했고, 냉전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성찰 없이도 미국의 보호와 지원 아래 경제 성장을 이루며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전후 역사적·구조적 상황 속에서 일본이 자국의 입지와 위상을 세우는 데에 한국을 비롯한 식민 피해국 및 국민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은 필수적인 요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직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형성이 전후 일본 외교의 최우선 과제였다. 미·영·프·소 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어 이들과의 고른 관계 형성이 중요했던 독일과 달랐던 점이다. 더욱이 당시 일본에 만연해 있던 일본 군국주의와 ‘대동아 공영권’[10], ‘식민지 시혜론’[11] 등의 사례를 볼 때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후 일본 내에 양심적인 시민 사회가 등장하고 보수 진영이 분열되며, 1990년대 후반 경제 불황 등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과의 협력 필요성이 높아지자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한국의 국가 정체성; 내가 보는 우리


일본에서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과 위상, 국가 전략 수립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 것과 달리, 한국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분단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주로 통일, 북한 문제 등 ‘우리’의 틀을 규정하는 민족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은 오랜 기간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분단으로 인해 ‘한 민족 한 국가’라는 민족주의의 기본 원리를 구현하지 못한 채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이 구분되고 말았다. 민족 정체성은 남북한을 포함하는 혈연적 의미가 강하며, 국가 정체성은 정치 체제의 차이를 포함하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분단이 지속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회 구성원 등이 변화하면서 남한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만들어졌고,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에 차이가 생겼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경계를 만들었다. 사회 통합을 함께 이룰 대상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했던 이유다.[12] 그리고 이러한 국가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국의 국가론 논쟁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라는 동일한 가치를 가진 한미 동맹을 축으로 국가 안보를 강화하며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과, 같은 민족인 북한을 포용하며 민족의 장기적 통합을 중시하는 집단이 대립하는 형태로 나타났다.[13] ‘우리’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문제 해결 방식이 달라진 셈이다.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문제를 심화시켰다. 서로 다른 진영에 있지만 같은 민족인 북한을 우리에 포함시킬 것인지, 같은 진영에 있지만 36년간 참혹한 식민 통치를 한 일본을 우리로 볼 것인지 논의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국가를 누구와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범위는 한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식민 지배와 민주화를 겪으면서 우리의 범위에 누구를 포함시킬 것인지를 두고 갈등해 왔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 협력했던 세력과 저항했던 세력, 권위주의 군사 정부를 추종했던 세력과 그렇지 않았던 세력이 나뉘면서 대립이 커졌다. 이는 국가 형성과 국가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분쟁의 전장(戰場)이었던 한반도에서 한국은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에서 북한을 같은 민족인 ‘우리’로 볼 것인지, 다른 가치와 정치 체제를 가진 타자로 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냉전 시기, 한국에게 북한은 타자였다. 따라서 과거 36년간 한국에 참혹한 침략과 수탈을 저지른 일본과는 안보상의 이유로 불편한 동거를 감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우리였다. 한편, 탈냉전기 한반도에 화해와 유화 분위기가 형성되며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되던 시기에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우리였다. 한국과 북한이 공통으로 겪은 과거사 문제로 대립하는 일본은 타자로 인식됐다. 한국에서 ‘친일’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일본과 친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민족을 배반함으로써 기득권을 쥐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동시대에 서로 다른 고민을 하며 살아왔다.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국가 정체성을 형성했다.[14] 일본이 미일 동맹, 경제 협력 등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국제 사회에서의 역할과 대외 관계, 국가 전략을 논의했다면, 한국은 남북 관계 등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우리 안의 관계를 두고 논쟁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양국이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를 만들었다.

한국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감정보다 복잡하다. 불법적이고 잔혹했던 36년간의 식민 지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오랜 시간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안보·경제의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일본과 함께해 왔다. 1990년대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시민 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며, 위안부 문제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이어지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사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국가 권력에 의한 권리 침탈과 비인권적 행위에 많은 이들이 비통해했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더욱 분노했다. 한국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 차원의 배상, 책임, 사죄, 반성은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 차원의 문제다.

반면 전후 일본에게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식민 지배 및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이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것은 미일 관계 안정화와 경제 발전이었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위상과 역할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 틀에서 전쟁 책임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 반성은 축소되었다. 전후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일본 스스로 충분한 반성을 할 기회와 시간을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러한 측면이 간과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변국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통해 국제 사회로 다시 복귀해야 했던 독일과 달리, 미국과의 관계 형성이 주가 되었던 일본에게 주변국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전략적 필요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자부심과 애착 사이


일본과 한국의 국가 정체성 논의는 주로 소수의 정치 엘리트와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국가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양국 국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상대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일 양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통해 국가 정체성의 실체에 다가가 보고자 한다. 조사는 2018년 5월 23일부터 8월 2일까지 한중일 각국에서 온라인·오프라인에서 동시 진행되었으며, 온라인에서는 각국 만 20세 이상 각 300명, 오프라인에서는 한일 총 215명을 대상으로 하였다.[15]

국가 정체성의 범위는 특정 영토 내에서 공통의 시민 문화와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법적·정치적 공동체와 혈연 공동체로 나눌 수 있다. 국가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 요소로는 출생, 국적, 거주 기간, 종교, 언어, 시민 덕성, 문화 등이 제시된다.[16] 이외에도 인종, 혈통, 종교, 언어, 역사, 문화 등의 본원적 요소와 사회적 상호 작용, 경험, 인식, 정치적 목적하에 만들어지는 구성주의적 요소 등도 국가 정체성을 만든다.[17] 결국 국가 정체성은 우리가 누구인가(who we are)에 해당하는 본원적 요소와 타자와의 구분, 무엇을 하는가(what we do)에 해당하는 가치와 역할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 정체성을 자국에 대한 인식과 태도, 상대국에 대한 인식과 태도, 상대국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역할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자국에 대한 인식과 태도

자국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국가에 대한 문화적 인식, 국가에 대한 애착심, ‘배타적 애국주의’ 세 가지 항목으로 측정했다.[18] 국가에 대한 문화적 인식은 앞서 언급한 정체성의 본원적 요소에 해당한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혈통, 언어, 역사·문화, 가치관과 관습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모든 영역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더 엄격한 입장을 보였다. 특히 한국인/일본인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부모님 중 한 분이 한국인/일본인이어야 한다’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항목에 대해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높은 비율로 동조했다. 즉 한국은 혈통, 언어, 역사, 문화 등에 대해 일본보다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 이는 곧 한국이 자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종의 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벗어날 경우 상대를 배척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에 대한 애착심은 집단 존중감, 집단 동일시, 집단 범주화 항목을 통해 알아보았다. 집단 존중감은 한 개인이 사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만족감과 자부심[19]이고, 집단 동일시는 개인의 정체성을 집단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당 항목은 모든 영역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한국이 갖는 국가에 대한 애착과 동질감이 일본보다 더 크다는 의미다. 특히 ‘한국인/일본인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처럼 느낀다(한국 76.22퍼센트, 일본 42.21퍼센트)’, ‘누군가 한국인/일본인을 비판하면 나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처럼 느껴진다(한국 81.3퍼센트, 일본: 46.54퍼센트)’ 등의 항목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반면 집단 범주화 정도는 일본이 한국에 비해 높았다. 특히 신뢰감 등에 대해 질문했을 때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자국민에 대해 더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장차 어떤 일을 하게 된다면 자국민과 하고 싶다(한국 73.38퍼센트, 일본 77.67퍼센트)’, ‘나는 자국민을 외국 사람보다 쉽게 믿는다(한국 59.88퍼센트, 일본 66.04퍼센트)’ 등의 항목에서 일본인이 한국인에 비해 높은 수치를 보였다. 그러나 집단 범주화에 관한 설문 중 ‘나는 외국인보다 자국민에 대한 애착이 더 크다(한국 83.34퍼센트, 일본 77.99퍼센트)’라고 답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많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종합하면 한국인의 경우 감정적·정서적 측면에서의 자국민에 대한 애착심과 동질성은 크게 나타나지만, 업무·활동 등 직무상 실질적인 이익 등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감정적 애착심에 상응하는 수준의 응답이 나오지 않았다. 즉 한국은 일본에 비해 더 엄격한 기준으로 ‘우리’의 틀을 규정하고, 구성원이 자신에게 주는 실질적 이익과 관계없이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강한 동질감을 갖는다. 따라서 집단이 겪는 부당함이나 고통에 동조할 가능성이 일본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배타적 애국주의에서는 한일 간 편차가 컸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는 다른 나라보다 우수하다(한국 76.22퍼센트, 일본 42.14퍼센트)’,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뛰어나다(한국 75.35퍼센트, 일본 34.59퍼센트)’,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한국 64.97퍼센트, 일본 23.58퍼센트)’ 등의 항목에서 확연한 차이가 보인다. 이를 국가에 대한 애착심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한국이 일본에 비해 국가적 사안에 대한 감정과 행동이 더 실천적이고, 표면적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처럼 된다면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다(한국 38.22퍼센트, 일본 50퍼센트)’라는 항목에 대해 많은 응답자가 부정적인 답변을 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자국민의 우수성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만큼 신뢰하거나 타의 모범으로 여기지는 않고 있었다. 이는 ‘상대국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자국의 역할’ 항목에서도 자국의 역할을 낮게 측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은 갖지만, 이것이 곧 국가 관계를 주도한다거나, 자국의 모델을 타국에 권유하는 것과는 다른 사안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상대국에 대한 인식과 태도

한국과 일본은 모두 서로를 비우호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친근감을 묻는 질문에 대해 양국 응답자 중 약 30퍼센트가 긍정적인 답변을 했고, 60퍼센트 이상이 비우호적이라고 답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한국은 믿을 수 있는 친구다(한국 9.55퍼센트, 일본 24.21퍼센트)’, ‘일본/한국은 결국 우리의 적이다(한국 51.42퍼센트, 일본 40.88퍼센트) 등의 항목에서도 한일 모두 상대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상대국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자국의 역할

상대국과의 관계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좋게 인식하고 있었다. 한일 양국 모두 정치·외교 관계는 부정적으로, 양국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협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경제, 문화(한국 64.29퍼센트, 일본 44.66퍼센트), 학술 교류(한국 46.53퍼센트, 일본 36.48퍼센트) 등에 대해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정치·외교, 군사·안보 분야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각각 80퍼센트 이상, 70퍼센트 이상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독도, 역사 왜곡, 동해 표기 문제,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서는 양국 모두 90퍼센트 이상의 응답자가 양국의 협력을 저해한다고 응답했다.[20] 과거사 문제는 양국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치적 영역과 비정치적 영역의 교류 및 협력 관계가 불균형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21]

자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일본이 한국에 비해 더 긍정적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의 리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세계를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학문은 세계를 이끌고 있다’ 등의 문항에서 일본이 한국보다 더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1990년대 이후 장기 불황으로 과거에 비해 자신감을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 경제 대국이고,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선진국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인식하에 스스로가 지역 내 리더 역할을 할 역량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본의 정치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일본의 역할과 위상을 중심으로 한 국가 정체성 논의로도 이어진다.

한편, 2016년도에 이루어진 중일 공동 여론조사[22]에서 일본인은 ‘세계를 리드할 국가’를 묻는 문항에서 65.9퍼센트가 미국, 34.5퍼센트가 일본이라고 답했다. 중국 응답자의 63.6퍼센트가 중국 스스로를 지목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인들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미국이 없는 세계에서 그다음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가 일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vs. 누구와 함께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비해 자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강하다. 그만큼 자신과 동일한 집단으로 생각하는 기준은 더 까다롭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고민해 온 국가 정체성 논의와 이어져 있다. 우리라는 틀은 자신이 속한 국가, 사회, 집단에 대한 애착과 동일시로 이어진다. 국가에 대한 희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국민의 아픔에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모두 서로에 대한 비우호적 감정이 크다. 특히 친근감에 비해 신뢰감이 낮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친근감 상승이 신뢰감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양국 간 인적 교류를 통한 친근감이 증가한다고 해서 신뢰에 기반한 실리적 협력이 증진되거나 양국 갈등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국이 일본에 비해 자국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 자국민에 대한 애착심, 국가를 위한 희생 의지가 더 큰 만큼, 민족 감정과 관계된 갈등 사안에 대해서는 더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독도 영유권, 역사 왜곡, 과거사 문제 등을 양국 모두 심각한 협력 저해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 대응과 반응은 한국이 일본에 비해 더 표면적, 실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게는 패전 이후의 전후 질서와 미국의 존재, 한국에게는 남북 분단과 일본에 의한 식민 지배가 이러한 국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일본은 전범국이자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반성과 사죄를 충분히 하지 않은 채 미국을 중심으로 수립된 전후 질서와 냉전 체제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며 국제 사회의 일원이자 영향력 있는 국가로 편입되었다. 주변국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법적·제도적·구조적 측면에서 고려해야만 하는 전략적 이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사죄와 반성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도의적·도덕적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식민 지배에 대해 잘못을 느끼지 않는 풍조에서 이런 사죄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이후 정치권과 시민 사회에서 인식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일본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한국은 국가 정체성에 대해 우리를 어떻게 규정할지를 주로 논의했다. 이는 식민 지배와 군사 독재 정권으로부터의 민주화 등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식민지 시대의 일본에 협력한 친일 세력과 이에 저항했던 세력, 권위주의 정권을 추종했던 세력과 그렇지 않았던 세력에 대한 구분으로 이어졌다.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했던 일본과 달리, 누구와 함께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고민한 것이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일본과 다른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는 한일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게 한국 및 아시아와의 관계는 정치권에서 국가 전략의 일환으로서 고려되어 왔지만, 한국은 일본이 함께해야 할 우리인지, 함께할 수 없는 그들인지를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같은 진영의 우리로서 함께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덕적·법적 차원의 당위 사항으로 여겨졌다.

 

위안부 문제; 우리의 고통, 우리의 문제


일본인에 비해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 사회, 집단에 대한 애착심, 집단과의 동일시 정도가 높은 한국인은 식민 지배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큰 동질감을 느낀다. 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 집회(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는 1992년 1월 시작되어 2019년 8월 14일 1400회를 맞았다. 매주 열리는 집회에는 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남녀노소가 참여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한다.

위안부 문제는 1930년 초반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이 점령지의 민간인 여성을 강제 동원하여 성 노예로 조직한 사건을 말한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 회견을 통해 위안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면서부터 생존자들의 피해 사실이 잇달아 밝혀지고, 국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실태 조사에 착수하였고, 김학순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세 명을 포함한 3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 지방 법원에 제소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관방 장관이었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는 “정부가 관여했다는 자료는 없고 지금 대처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발언해 한국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한국 외무부(현재 외교부)는 주한 일본 공사에 진상 규명을 요청하였고, 이후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사할 것임을 표명하였다.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가 외교 문제화된 것이다.

초반에는 미온적이었던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관여를 나타내는 문서가 발견됨에 따라 사죄와 반성의 견해를 발표했고, 이러한 노력은 고노 담화(1993), 무라야마 담화(1995)등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양국 관계는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일본 보수 세력의 반발과 망언, 담화를 수정하고 무효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담화에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법적 책임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한국 시민 사회가 반발하면서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양국 관계는 다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불안정하게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양국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이루게 된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시(戰時) 어린 소녀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의 인권 문제이자 개인에 대한 국가적 침탈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에게 위안부 문제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느끼는 우리의 문제다. 더욱이 사회적 약자로서 당했던 수모와 고통의 시간에 대해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피해자들에 대한 집단 동질감은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과 실천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들에게 분명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혹은 하더라도 번복하는 일본에 대해 함께 분개하고, 원하는 사과를 받을 수 있도록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 국민적 사안이 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의 과정 없이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2015 위안부 합의’는 일본보다 한국 내에서 더욱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로 대표되는 과거사 문제는 불편한 일이다. 전후 질서 수립 과정에서 수반되지 않은 전쟁의 책임을 논의하고 식민 지배 시기 자행했던 잘못에 대해 가해자로서 인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고찰하고 사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는 국제 사회로부터의 비난을 잠재우고, 주변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동안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에서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고, 2015년 위안부 합의를 타결한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사죄의 표현은 전쟁 책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피해자들에 대한 배려를 통한 진정한 해결이라기보다는 그저 문제를 서둘러 끝내려는 모습으로 비쳤다.

역사 문제에서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 일본 사회의 국내적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93년 자민당 내각의 붕괴로 1955년에 성립되고 지속되어 온 ‘55년 체제’가 끝나고, 비자민·비공산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연립 내각(1993년 8월~1994년 4월)이 탄생했다. 그러나 정권 운영상의 대립 등으로 인해 8개월 만에 단명하고, 이후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가 중심이 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내각이 탄생한다. 무라야마 내각은 사회당 수반의 연립 정권이 탄생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여기고, 사회당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자 했다. 전후 50년을 두고도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인 전후 처리 문제를 비롯해 자민당 단독 정권에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국내외 여러 문제들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담화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법적 책임 등을 담고 있지 않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정리하고 각의 결정을 거친 내각의 총의를 국내외적으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23] 이는 일본이 주변국인 아시아 국가들과 마주하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를 존중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자민당 중심의 55년 체제에서 벗어난 평화주의 정당으로서 사회당이 지향했던 국가의 방향이자, 목표이기도 했다. 국제 사회에서 어떤 일본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국가 정체성 고민이 55년 체제가 끝나면서 나타난 것이다.

역사 수정주의적 성향의 아베 총리가 2015 위안부 합의 타결에 동의한 데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는 동아시아 지역의 중국의 부상에 대항하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축인 한미일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속되는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은 이러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주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더욱이 아베 총리의 거듭되는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은 미국에서도 ‘민족주의자 아베 신조’라는 이미지를 증폭시켜 적지 않은 반발과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24] 이러한 미국의 불안과 우려는 미일 동맹을 기축으로 삼는 일본에게도 불편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국의 적극적인 관여 아래 한국과 일본은 위안부 합의를 타결했고, 위안부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아베 총리도 ‘최종적·불가역적’을 조건으로 이를 수용했다. 이러한 결정은 아베 내각이 지향하는 미일 동맹 강화와 군사력 사용을 통해 보통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보수 세력 결집, 그리고 그 외 세력까지 통합할 수 있는 방책으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해결되지 못했던 한일 간의 난제가 더 이상 외교적 문제로 부상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아베 총리의 외교적 성과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15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고, 일본으로부터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10억 엔(111억 원)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고, 과거사 문제에 있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이 금전적 배상을 받음으로써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10억 엔 문제만 크게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잘못된 합의는 고쳐야 한다’는 한국의 여론과 ‘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합의(약속)로 끝났다’는 일본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TF’를 출범시키고, 검토 결과에 따라 일본 정부에 재협상을 요구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로써 위안부 합의 이후 설립된 화해·치유 재단이 해산되는 등 합의가 사실상 가치를 잃게 되면서 양국 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강제 동원 문제; 매듭짓지 못한 갈등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의 강제 동원 판결은 한일 관계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구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피고가 원고에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삼권 분립 원칙에 따라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 당시 모두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밝혀 양측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민간 차원에서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 큰 반발이나 비판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오랜 시간 개인의 권리를 위해 싸워 온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동조와 응원, 지지의 목소리와 해당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많이 제시되었지만, 일반 시민 차원에서 강제 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큰 시위나 집회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이 변화된 것은 지난 7월 초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 강화와 8월 백색 국가(화이트 리스트) 제외 발표 이후이다. 구체적으로 일본은 한국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3대 핵심 소재 품목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이로 인한 뚜렷한 수출 제재나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반발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일본 관광을 거부하며,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대한 거부와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대규모 시위와 집회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의 이와 같은 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일본은 부인하고 있지만, 한국이 반발하는 것은 일본이 역사 문제에서 시작된 갈등을 경제 분야까지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일본이 한국의 미래 성장을 가로막을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썼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의도와 목적, 실질적인 피해의 정도와는 관계없이 일본이 취한 방법은 한국 국민에게 뿌리 깊게 내재해 있는 항일 민족주의와 극일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에 따라 한국 사회의 집단적 분노가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한국의 ‘국가를 위한 희생 의지’라는 국가 정체성을 자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해 경제 발전과 미래 성장이 가로막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한국 국민들에게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느껴졌고, 이에 대해 개인적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일본이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고 언급한 순간, 한국에게 일본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고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타자에게 힘을 합쳐 대응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하지만 시기와 정황, 아베 총리의 발언 등을 볼 때 일본의 경제 조치가 강제 동원 문제에서 촉발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실 강제 동원 문제는 해결책을 찾기가 더 어려운 사안이다. 한일 간의 다양한 갈등 사안 중 난이도가 가장 높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및 청구권 협정과 관계되어 있고, 조약 해석 문제는 곧 전후 체제의 문제, 그리고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약 14년간 한일 양측의 교섭 과정에서 끝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했던 ‘식민 지배의 불법성 여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죄와 반성에서 끝나지 않고, 법적 책임과 경제적 손해 배상과 연계되어 있다. 기존의 과거사 문제가 역사와 정치·외교의 범위에서 논의되었다면, 강제 동원 문제는 법·경제 분야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한국은 강제 동원 문제를 기존의 다른 과거사 문제와 유사하게 생각했던 반면, 일본에서는 전후 질서를 수립한 1965년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사안으로 보았다. 판결로 인해 원고에 대한 손해 배상으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자국 기업이 자산 압류 등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면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게 되므로,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된다. 더욱이 강제 동원으로 인한 피해자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사한 소송이 연이어 제기되고 문제가 확산될 경우, 일본 기업의 경제적 피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강제 동원 문제와 관련한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1965년 체제다. 국교가 정상화된 1965년 이후의 한일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과 일본은 약 14년간 난항을 거듭하며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때 끝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부분이 ‘식민 지배의 불법성 여부’다. 36년간의 식민 지배를 불법으로 보는 한국과 합법으로 보는 일본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양국은 해당 부분을 각자의 해석에 맡기는 채로 합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현재 하나둘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기존의 잘못된 합의 혹은 당시에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던 부분을 바로잡고 새로운 한일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과 전후 질서의 근간이 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비롯된 한일 협정과 1965년 체제를 부정할 수 없고, 유지해야 한다는 일본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일본에게 있어 1965년 체제를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것은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이며, 이 경우 수반될 많은 문제들을 감당하고 처리하는 것이 버거워진다. 이처럼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일본과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국의 입장이 대립되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친근감과 적대감 사이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일본을 찾은 우리 국민은 약 753만 명, 한국을 찾은 일본 국민은 약 294만 명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케이팝(K-POP)과 드라마의 인기가 높고, 한국에서는 일본 문화와 음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사한 문화와 사회 환경을 가진 한국과 일본은 정서적으로 가깝고 친근하다. 하지만 역사 문제를 중심으로 한 두 나라의 갈등과 인식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친근하지만 신뢰할 수 없고, 좋아하지만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인식 차이를 넘어 갈등 사안을 해결해 나가야 할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양국 모두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협력을 위한 각국의 역할 설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기간에 한일 양국이 갈등 사안을 해결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은 안보상의 전략과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다. 다양한 갈등 사안으로 부딪히고 대립하더라도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한일 사이에서 민감한 갈등 사안에 대해서는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에 앞서 각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서로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두 국가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해 나의 관점에서 상대를 평가하고, 나의 기대만큼 상대가 반응하지 않으면 실망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각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한일 관계를 위한 첫걸음은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1]
정체성의 개념에 대해 제임스 피어론(James Fearon)은 사회적 규범 내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태도나 기대되는 행동, 사회적으로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보았다. 필립 하맥(Phillip Hammack)은 사회 범주화(social categorization)와 집단 소속(group affiliation)에 따라 변하거나 변하지 않는 개인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도구, 피터 버크(Peter Burke) 등은 자신을 특정한 사람으로서 규정하는 특질과 자신이 속한 집단, 집단(사회)에서 기대되는 역할 등의 집합, 김태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사회적 세계에서의 자신의 위치,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James Fearon, 〈What is Identity (As we now use the word)?〉, 1999.
Phillip Hammack, 〈Theoretical Foundation of Identity〉, McLean Kate and Moin Syed ed., 《The Oxford Handbook of Identity Development》,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Peter Burke and Jan Strets, 《Identity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김태환, 《가치 외교의 부상과 가치의 ‘진영화’ 강대국 및 중견국 사례와 함의》, 《IFANS 주요 국제 문제 분석》 35,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18.
[2]
Anthony Smith, 《National Identity》, University of Nevada Press, 1991.
[3]
 Jack Citrin and David Sears, 《American Identity and the Politics of Multicultura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4]
하영선·김영호·김명섭, 《한국 외교사와 국제 정치학》,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5]
Alexander Wendt, 〈Collective Identity Formation and the International State〉,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88(2), 1994, pp. 384-396.
[6]
김태환, 《정체성 정치와 중견국 공공 외교의 유형 비교: 한국에 대한 함의》,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18.
[7]
미나미 히로시(이관기 譯), 《일본인론(上)》, 《일본인론(下)》 , 도서출판 소화, 2003.
[8]
나카네 지에(양현혜 譯),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도서출판 소화, 2013.
[9]
도이 다케오(이윤정 譯), 《아마에의 구조》. 한일문화교류센터, 2001.
[10]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열강의 식민 지배를 몰아내고 번영과 평화를 누리자는 내용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적·팽창주의적 성격을 보여 준다. 일본의 극우 세력은 태평양 전쟁을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과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기 위해 벌어졌다는 관점에서 대동아 전쟁이라 부르며 전쟁을 정당화한다.
[11]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약 13년 8개월간(1951년 10월 예비회담~1965년 6월 제7차 회담) 이루어진 한일 협정 과정 중, 제2차 및 제3차 일본 대표로 나온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郎)외무성 참사관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한국에 유익했다는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한일 회담은 약 4년 6개월간 중단되었다.
[12]
사회적 거리감을 측정하기 위한 비교 대상으로 북한 이탈 주민, 조선족, 재외 동포, 이주 노동자, 외국인(미국인, 일본인 외) 등을 제시하였고, 향후 남북통일 혹은 사회 통합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균열의 가능성을 전망해 보고자 하였다.
[13]
박철희, 〈냉전 후 국가 전략 정체성 재규정과 한일 관계〉, 《한일 신시대와 공생 복합 네트워크》, 한울, 2012.
[14]
남기정은 그의 연구에서 일본이 한국 전쟁 기간 동안 후방 지원 기지로 전쟁 체제에 편입되어 미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며 기지 국가(基地國家)로서의 성격을 획득하였고, 여기에 평화주의 이념이 덧씌워진 형태의 국가 정체성을 형성한 반면, 한국은 냉전기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전장 국가(戰場國家)라는 현실 인식에 반공주의 이념이 덧씌워진 국가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남기정, 2008. 〈냉전 이데올로기의 구조화와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형성의 상관관계: 한일 비교〉, 《한국 문화》 41, 236-239쪽.
[15]
2017년도 한국 연구 재단 일반 공동 연구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한중일 관계 관련 설문조사〉 중 한일 관계 부분만 발췌해 사용했다.
[16]
Anthony Smith, 《National Identity》, University of Nevada Press, 1991.
Frank Jones and Philip Smith, 〈Diversity and Commonality in National Identities: An Exploratory Analysis of Cross-National Patterns〉, 《Journal of Sociology》 37(1), 2001, pp. 45-63.
Robert Kunovich, 〈The Sources and Consequences of National Identification〉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74(4), 2009, pp. 573-593.
[17]
 김태환, 《정체성 정치와 중견국 공공 외교의 유형 비교: 한국에 대한 함의》,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18.
[18]
리처드 헤르만(Richard Herrmann) 등의 연구에서 국가 정체성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 항목을 활용했다. 이 연구는 국제 관계에서 국가의 정체성이 국가 간 협력과 갈등, 그리고 이란의 핵 확산에 따른 유엔과의 협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조사하였다.
Richard Herrmann, Pierangelo Iserina and Paolo Segatti, 〈Attachment to the Nation and International Relations: Dimensions of Identity and Their Relationship to War and Peace〉, 《Political Psychology》 30(5), 2009, pp. 721-754.
[19]
유두련, 〈개인 자아 존중감과 집단 자아 존중감에 따른 친환경 태도와 처분 행동에 관한 연구〉, 《소비자문제연구》 45(3), 2014, pp. 183-206.
[20]
과거사 문제 관련 모든 항목(독도, 역사 왜곡, 동해·일본해 표기, 위안부, 강제 징용)에 대해 한국은 90퍼센트 이상의 응답자가, 일본은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를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90퍼센트 이상의 응답자가 양국의 협력을 저해한다고 응답했다.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는 일본 응답자의 약 76.58퍼센트가 양국 협력을 저해한다고 응답했다.
[21]
최은미, 〈협력과 갈등의 한일 관계, 20년의 변화와 성찰(1998-2017)〉, 《평화연구》 26(2), 2018, 85-127쪽.
[22]
言論NPO, 《第12回日中共同世論調査》, 2016.
[23]
오쿠조노 히데키, 〈두 개의 ‘담화’와 역사 인식 문제의 난관〉, 아시아연구기금, 《韓日關係 50년의 省察》, 75-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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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조노 히데키, 〈두 개의 ‘담화’와 역사 인식 문제의 난관〉, 아시아연구기금, 《韓日關係 50년의 省察》, 75-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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