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선수 출신 방송인 서장훈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는 얘기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고. 농구를 정말 좋아했던 그는 농구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나서부터는 농구를 즐겨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목뼈가 나가고 코뼈가 부러지면서까지 이를 악물고 농구를 했다. 온 힘을 다 짜내서 전쟁을 치르듯,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결코 농구를 즐길 수 없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록과 결과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마냥 즐기면서 경기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장훈은 분명 농구를 좋아했다. 그는 결코 농구를 즐기지 않았다고 했지만, 자신의 모든 삶을 뒷전에 두고 농구에 전념할 정도로 농구를 사랑했다.
박정태는 ‘즐긴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즐기라는 말이 결코 즐기면서 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지도자가 말하는 ‘즐기라’는 의미는 놀면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 잘하고 싶어서 달려드는 선수들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 박정태의 얘기다. 그리고 선수들이 말하는 ‘즐긴다’는 것은 야구를 진짜 좋아하는 것, 그래서 야구에 100퍼센트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훈련을 하든, 경기를 하든, 일단 몸을 움직이는 순간 완전히 ‘야구 모드’로 전환이 된다고 했다. 굉장히 예민해지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온 신경이 야구에만 집중된다고 했다.
전쟁이에요 전쟁… 저는 유니폼을 갈아입으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성격이 확 바뀝니다. 스타킹 신을 때부터, 이 심장이… 내가, 도는 거를 느낍니다. 자기 전에는 글러브 끼고 잤어요. 일상이 야구인 거죠. 자는 그 순간에도. 왜냐하면 내일은 쥑일려고 달려들 (거니까) 그 준비를 하는 거예요. 내일은 쥑이뿌야 되겠다. 계속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거죠. 그 마인드가 중요해요. 즐긴다는 것도, 결국 이기고 싶은 수단인 거니까. 선수들이 그걸 착각하면 안 돼요. 즐긴다는 거. 그건 완전히 야구에 빠진다는 거예요.
그에게 야구는 일상이었다. 야구를 할 때도 하지 않을 때도 박정태는 늘 야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몰입(commitment)[1]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중요성, 가치에 대한 믿음을 우선으로 하고,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 에너지를 쏟는 것을 의미한다.[2] 스포츠 상황에 적용해 보면, 운동에 참여하면서 얻는 희망, 신념, 믿음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스포츠 참여 욕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야구 선수가 운동에 몰입한다는 것은 결국 야구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야구를 위해 야구 이외의 것은 삶에서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야구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참고 인내하고 시간과 공을 들여서 얻었을 때 결과의 소중함은 더 크다. 또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통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도 야구를 할 수 있게, 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을 습관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일상이 야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몰입해야 한다. 야구에 대한 몰입은 철저한 자기 조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트레이너, 코치, 감독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결국은 혼자 해내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구르고 피나고 깎여 가면서 헤쳐 나가야 한다.
박정태는 자신의 인생에서는 늘 야구가 최우선이었다고 했다. 슬럼프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는 무조건 슬럼프를 극복해 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는 시간도 아까웠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좀 독단적이었죠. 내 같은 경우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은 외골수입니다. 하나만 파고드는 거예요. 야구만. 왜냐? 이겨 내야 되니까. 연습도 많이 해야 되고. 사실은 친구도 만나고 싶고 여유 있는 생활도 하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무조건 해내야 된다는 생각이 먼저이기 때문에. 친구들하고도 만나는 시간도 어찌 보면 너무 아까운 거죠. 만나고는 싶지만… 만나는 것보다는 슬럼프를 이겨 내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니까. 그런 게 중요해요. 극복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강하냐 아니냐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고 봅니다. 야구만을 생각하는 그런 절박함이 있다면, 하고 싶은 거 만나고 싶은 거 모든 걸 다 누를 수 있는, 그렇게 몰입이 된다면 누구나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겨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김종모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야구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힘들어도 야구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했다. 이는 내적 동기 수준이 높은 사람이 보여 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내적 동기는 행위 자체로부터 오는 만족감 때문에 그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내적동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부정적 변화나 상황이 유발하는 결과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상황이 주는 고통의 크기보다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김종모는 내적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내용들을 많이 언급했다. ‘마음속에서 야구를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 야구에 빠져 버렸다’, ‘야구에 몸이 담가졌다’, ‘저녁 내 스윙하고도 다음 날 하나도 피곤하지 않을 정도로 야구가 즐겁다’는 표현들은 야구에 대한 내적 동기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 이러한 마음은 곧바로 야구에 대한 몰입으로 이어지며 어떠한 종류의 슬럼프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누구나 다 태어날 때부터, 이게 아니라는 거야. 노력하지 않으면, 강인한 정신력과 노력이 뒷받침 안 되면 야구는 절대 잘할 수가 없어. 강한 정신력이 없으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운동을 해봤고 선수들을 시켜 봐서도 아는데, 인간이라는 거는 정말이야… 이건 정말 무한대야. 그 강인한 정신력이라는 건, 키우면 키울수록 나오는 거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채찍을 하든지 말로 하든지 정말 엄청난 그런 거가 나온다는 거야. 이제 그걸 어떻게 빼내느냐, 그런 게 중요한 거지. 바로, 야구에 완전히 빠졌기 때문에 그게 다 가능했던 거야. 야구만 생각하고 완전히 그렇게 연습하면서. 내가 저녁 내 스윙하고도 그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피곤하지가 않아. 그래서 야구가 너무 즐거운 거거든… 야구가.
송진우는 눈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 잠자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야구를 생각했다고 했다. 야구를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야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믿으며 야구를 위해 살았다. 송진우는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생활 습관처럼 몰입을 실천했다.
(사우나를 할 때도 공 던지는 손은 뜨거운 물속에 넣지 않았던 에피소드에 대해) 왼손이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거죠. 손끝의 굳은살이 뜨거운 물에 불어서 떨어져 나갈 수 있으니까요. 뭐 순간의 행동이고. 그것 때문에 손이 보존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니까요.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준비를 잘한다, 내 마음속에 마술을 거는 거죠.
(손톱을 깎을 때 손톱깎이를 쓰지 않고 손톱 관리용 사포로 갈았던 에피소드에 대해) 그건 김성근 감독님 영향이 컸어요. 손톱깎이로 손톱을 자르다가 자칫 너무 깊게 자르면 손이 무지하게, 공 던질 때 끝이 시리거든요. 그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서죠. 다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조심하는 거죠. 그런데 손톱 가는 걸로 다듬으면 항상 일정하게 갈 수 있고, 깊이 갈아지거나 그런 건 없으니까. 안전장치를 하는 거죠.
(잠을 잘 때 왼쪽으로는 팔베개도 하지 않는다는 에피소드에 대해) 팔베개는 김영덕 감독님의 영향을 받은 거죠. 한번은 왼쪽으로 팔베개를 하고 잔 적이 있는데 겁나게 혼났습니다. (웃음) 왼손으로 야구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가지고 무슨 야구를 한다는 거냐. 팔에 영향이 가면 어떡할 거냐. 야구 선수는 잘 때도 항상 야구 생각을 해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그래서 잘 때도 늘 신경을 쓰죠.
송진우에게 몰입이란 어디까지나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었다. 마치 불꽃이 튀는 듯한 강렬한 눈빛, 넘치는 에너지의 그를 보고 상대 팀의 타자들은 위압감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는 이러한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주변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야구를 사랑하고 원하는지는 자기만 알면 된다는 것이다.
김용수는 가장 조용했다. 목소리도 크지 않았고 어떤 얘기를 하든 담담했고 감정 표현이 크지 않았다. 그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놀랍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가을 야구를 하면서 다들 설레어 할 때도 그는 ‘게임의 연장이다’라고 생각했을 뿐 더 흥분되고 긴장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1994년 LG 트윈스가 우승했을 때, 다들 얼싸안고 눈물 흘리던 순간에도 그는 ‘아, 우리가 정말 우승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짧게 미소 지었다. 그뿐이었다. 우승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처음 프로 구단에 와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승할 수 있을까? 첫발을 디디면서… (팀의 성적이) 가다가 떨어지고 가다가 떨어지고 그러니까. 왜냐하면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했는데 떨어지니까는 그때부터 감각이 무뎌지는 거죠. 90년대 MBC에서 LG로 넘어오고 딱 우승하고 나니까. ‘아, 이런 게 우승이구나. 아, 이거구나!’ 그런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많은 게임을 하면서, 또 시리즈 하면서도, 시리즈라는 거 3만 관중 앞에서 던진다는 거, 신인들은 떨린다 그러는데. 저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물론 긴장은 되죠. 인간이니까. 그런데 마운드에서 공 하나만 딱 던지면… 모든 게 다 해소가 돼요.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제 마음대로 편하게 던져요. 어느 때보다.
사람들은 마운드에서 늘 무표정인 그를 보며 ‘포커페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거예요. 표정은 짓지 않죠. 하지만 (표정을) 짓지 않는 대신에 여기(심장)에서는 엄청나게… 요동치고 있어요.
그에게 야구는 곧 삶이었고, 자신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마운드에서 그는 언제나 행복했다. 김용수는 야구를 할 때 가장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거웠고 야구를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그를 괴롭히던 온갖 잡생각들이 마운드에만 서면 싹 사라졌다. 공을 잡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김용수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내적 동기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구를 통해 김용수가 30여 년 동안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야구를 대해 왔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야구를 향한 그의 애정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운드 위의 노송’으로 불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LA 다저스 전 감독이고 부사장이던 토미 라소다 그분이, 자기는 “마지막 게임이라는 걸 정말 하기 싫다”라고 했어요. 자기는 운동장에 있을 때는 1년 내내 계속 게임하고 싶다는 거죠. “오늘이 마지막 게임이라는 게 정말 슬프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구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요. 이틀이고 사흘이고 쉬고, 1년 동안 로테이션하면서 게임을 한다는 거. 야구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저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요. 시즌이 끝나고 휴식에 들어가고, 연습을 하고. 저는 그런 게 더 힘들어요.
야구를 향한 열정은 스피드 건에 찍히지 않는다.
톰 글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