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산업이 태동하는 시기에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기 마련이다. 유리한 고지란 새로운 표준(standard)을 의미한다. 모호함을 불편해하는 대중의 표준에 대한 욕구를 가장 먼저 충족시키는 기업이 가장 큰 과실을 가져간다. 컴퓨터 하드웨어 분야에서는 IBM이,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리고 전자 상거래 분야에서는 아마존이 표준을 제시하고 시장을 선점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산업의 표준은 대체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 개척자들의 전리품이었다.
하지만 기업사를 뜯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애덤 그랜트(Adam Grant)는 자신의 저서 《오리지널스(Originals)》에서 후발 주자가 오히려 선발 주자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후발 주자들은 개척자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최소화해 이들이 맞닥뜨린 난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웃라이어(Outlier)》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코멘트를 빌려 다음과 같이 썼다.
“차라리 두 번째나 세 번째로 시장에 진입해서 선발 주자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이디어가 정말 복잡해지고 세상도 복잡해지는데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면 어리석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파악해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두 번째나 세 번째’라는 부분이다. 선두 주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선두를 추월할 위치에는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디지털 자산이란 경주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은 일찌감치 울렸다. 글로벌 금융 기관들은 앞다퉈 디지털 자산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다행히 어느 누구도 아직 표준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도 없다. 기껏해야 출발선상에서 한두 걸음 앞선 것이 고작이다.
20세기 산업 역사를 되짚어 보면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혁신을 주도했던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들과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뛰어난 두뇌와 각고의 노력으로 뒤늦게 출발해 세계 1위 자리를 움켜쥔 분야도 있다. 반도체와 조선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기회비용은 막대하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혁신을 원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대한민국은 전 세계 국가들과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는 기회를 맞이했다. 출발의 총성이 울리고, 아직 한 걸음도 내딛지 않았지만 늦지 않았다. 디지털 자산 시장은 아직 싹도 틔우지 못했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한 걸음만 내디디면 충분하다.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이 촉발할 산업 혁명을 마주하면서 대한민국이 뒤처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8명의 금융·법조계의 전문가들과 함께 이 책을 쓴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