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는 늘 일어날 수 있지만, 국가나 은행이 망할 정도의 강한 충격을 주는 위기는 흔치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기존에 살아왔던 방식에 대해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겼다. ‘성장을 위해 모두 조금씩 희생하고 노력하면 다 같이 잘 살 수 있다’는 과거의 주장은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굳건한 성장만 목적으로 하는 무한 개인 경쟁의 가치가 이제는 성장 자체에 대한 의심, 가치의 표류, 개인 소외로 나타나면서 공허한 수사로 사라지고 있다. 애국심을 강조하며 성장 신화를 향한 하나의 목표 속에 개인을 몰아넣고, 사회 전체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각자의 필요나 다양성을 양보하고 희생해야만 한다는 논리, 잘 살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벌고,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남보다 앞서가야 하는 경쟁 중독 논리는 이미 과거가 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가치와 공간에 대한 의식도 달라졌다. 전대미문의 판데믹(pandemic) 충격에 직면하면서 ‘나’와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조금 더 나은 대안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기보다는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이 ‘남보다 더 잘 살자’라는 구호를 대체하는 시대다.
공간 측면에서는 국제적인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으로 팽창하던 시선이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에 대한 관심의 시선으로 바뀌는 중이다. 낯선 존재 혹은 먼 대상이었던 로컬이 ‘나와 우리’의 범주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불안과 전망의 혼돈 속에 형성될 것이고 개인의 불안과 고민도 깊어질 것이다.
각자의 생각이 무르익으면 비슷한 생각끼리 모여 하나의 새로운 사회 가치가 만들어진다. 위기를 겪으면 개인도 살길을 모색한다. 그러면서 주변을 보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하면 좋으며,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하고 둘러보게 된다.
이 위기 속에서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로컬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도시는 위험하고 희망이 없으니 로컬로 가자’라는 식의 실천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변화는 급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일 당장 사회 전체가 한꺼번에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서서히 변화한다. 다만, 현재 진행되는 변화가 2000년대 중반의 거대한 위기와 그에 따른 불안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컬과 함께 언급되는 키워드가 소셜 벤처(social venture)다. 소셜 벤처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기업 형태를 의미한다. 지역성 또한 사회적 가치에 포함된다. 따라서 로컬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동이다. 로컬과 소셜 벤처를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윤 추구만 하는 기업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으며 사회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기업도 중요하다’, ‘위기는 모두가 고민하면서 사회적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진단이 사회적 기업 활성화에 힘을 보탰다.
2007년 사회적 기업 육성법이 만들어지면서 2020년 6월 말 기준 국내에 2500여 개 사회적 기업과 1만 7000여 개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다.[1] 사회적 기업에 이어서 소셜 벤처 창업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성수동 소셜 벤처 클러스터(cluster)가 언론에 나오면서 사회적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사회적’이라는 말은 여전히 포괄적이고 애매하다. 근원을 따라가 보면 기업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논의는 1950년대 양차 세계 대전 후 호황에 따른 기업의 수익을 사회적으로 환원하는 문제부터 시작됐다. 그러니까 이미 70년 넘게 진행된 오래된 논의인 셈이다. 기업은 원래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기여가 없는 생산, 유통, 소비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이 바라보는 기업은 여전히 이윤 추구만 목적으로 하는 배타적 존재다.
경제 위기를 기점으로 다시 사회적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게 된 것이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에 ‘사회적’이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에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호하다. 이윤에만 매몰되지 않는 기업을 강조하는 시도는 신선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완전히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판다”는 1986년 미국 사회적 기업 루비콘(rubicon)의 창업자 릭 오브리(Rick Aubry) 교수의 말에 따르면 ‘사회적’이라는 말을 ‘고용 문제 해결’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실업 문제가 커지는 사회라 해도 고용 해결만으로 사회적이라는 말을 파격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 여전히 사회적 기업과 소셜 벤처들이 늘고 있지만 —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효력에 대한 의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첫째, 로컬을 낭만이 가득하고 신선한 ‘기회의 땅’이자 ‘피난처’로 보는 로컬 낭만론이다. 도시의 매연과 스트레스, 끊임없는 치열한 경쟁에 치이고 지치면서, ‘누구를 위해 난 매일 이렇게 고생하는가’, ‘왜 월급은 항상 통장을 스쳐만 가는가’라는 회의감이 드는 마당에 로컬에 가면 대도시가 주지 못하는 다른 느낌의 새로운 희망이 보일 거라고 기대한다.
여기에 잡지 《킨포크Kinfolk》(2011년), TV 프로그램 〈삼시세끼〉(2014년), 2015년 일본에서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한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2018년) 등 여러 매체가 로컬을 매력적으로 묘사한 것도 한몫했다. 물론 이런 매체들이 로컬에 대한 낭만만 키우는 것은 아니다. 〈삼시세끼>의 배경은 도시를 벗어난 농어촌이기 때문에 분위기부터 신선하다. 한편으로는 도시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보여 준다. 도시 생활의 피로와 염증 때문에 귀향한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은 도착부터 크고 작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킨포크》는 언뜻 보면 실제 생활과 동떨어진 느낌의 예쁜 디자인만 전부인 잡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생태 환경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 메시지를 강조하는 잡지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5년 전부터 국내에 이런 종류의 로컬 소개서들이 정말 많이 나오고 있다. 깊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포틀랜드류, 북유럽류, 일본류, 국내 사례 소개서들도 많다. 아직은 로컬 인문서가 아니라 에세이로만 분류되는 이 책들은 대부분 ‘이렇게 새롭게 살고 있다’는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구성된다. 주로 로컬에서의 삶, 대안적인 삶, 새로운 공동체 가치, 삶의 행복과 만족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만, 마치 손님이 올 때만 깨끗하게 청소하는 집 상태처럼 지나치게 미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로컬은 아름다운 피안의 세계인가 하는 거리감이 들 때도 있다(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사실적이고 밀도 있는 로컬 인문서가 많이 나오고 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굳건한 성장 논리 사회에 로컬이라는 대안 가치를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들이니까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매체만으로 로컬을 잘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책으로만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읽는 것만으로 결론 내리고 남의 스타일을 무턱대고 따라 하거나 그냥 어정쩡하게 표류하는 방식으로는 로컬에 깊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로컬에 제대로 정착하고 싶다면 적어도 사계절을 겪어 봐야 한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2]
둘째, 로컬은 촌스럽다는 말로 대표되는 ‘로컬 폄훼론’이다. 로컬 낭만론과 정반대의 생각으로 근거 없이 낙관적인 것이 아니라 근거 없이 부정적이다. 무조건 대도시를 기준으로 비교하기 때문에 로컬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뒤떨어진 곳이라고만 평가한다. 로컬을 대도시 근처의 변방이나, 냄새나고 낙후한 지방 혹은 시골로만 생각한다. 모두 사람 사는 곳이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논리는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이나 할 법한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쉽게 치부한다. 이 관점으로 보면 지금 로컬에서 창업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로컬로 도피한 실패자, 이른바 ‘루저(loser)’들이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실제로 로컬에 사는 사람도 이런 폄훼론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경우가 많다. 로컬에 사는 사람들 모두 실패자라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독선과 단정 속에 불평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 불평의 대상에서 자신은 언제나 여집합이라고 생각하면서,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컬 폄훼론자들에게는 수도권이나 대도시만 세련되고 편리하고 뛰어나다. 내 것만 옳다는 배타적 인식을 내세우려고 하고, 세상 변화는 등한시한 채, 어디에서 살든 돈이 최고고, 뭐든 폼 나야 좋다는 양적인 평가 기준만 들이대며 깎아내린다.
이쯤 되면 이들에게 좋은 삶, 행복과 안식, 유쾌한 변화, 새로운 시도 등의 이야기는 꺼내기조차 불가능하다. “왜요? 그러면 뭐가 좋아요?”라며 명확한 계획과 분명한 성과를 급하게 재촉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나 사회가 그렇게 신속하고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아닌 남에게는 유독 혹독하게 이른 시간에 분명한 성과를 달성하고, 체계적인 미래 계획을 세우라고 재촉한다. 이내 대화 불가능의 상태가 된다.
셋째, 로컬은 그저 퍼주고 베풀어 주는 대상일 뿐이라는 ‘로컬 시혜론’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부의 퍼주기식 사업들이다. 돈이든 사람이든 일방적으로 투입하면 알아서 뭐라도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평가한다. 고기 잡겠다고 물에 그물을 마구 던지듯이 단기간에 돈을 뿌리면 그중에 스타 한 명 정도는 나올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이런 관점은 선택, 갈등, 실패, 고민 등 과정에 대한 고려가 매우 부족한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이다. 진짜 필요한 것이 뭔지 정작 당사자와는 신중하게 의논해 보지도 않고 “일단 뭐라도 줄 테니 1년 내에 성과를 가져와라, 그러면 또 줄게”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로컬은 대도시나 중앙 정부보다 낮은 위치를 대물림하며 외부 지원에만 의존하게 된다. 영원히 해피 엔딩을 기대하기 힘들다.
어떤 정책이든 생태계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생태계라는 것이 실제로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유지되며 그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3] 특히 사람을 키운다는 생각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람으로 구성되고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성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알아야만 한다.[4]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 꾸준히 축적된 행정 편의주의와 성과주의의 가장 비관적인 결과가 로컬 시혜론이다.
넷째, ‘로컬은 서울이 아닌 어딘가의 지역’. 이렇게 행정 단위로만 로컬을 바라보는 ‘로컬 행정론’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로컬은 ‘지역’이자 ‘생활권’을 의미한다. 반드시 행정 단위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공간 모두 지역이다. 광역 지방 자치 단체, 기초 지방 자치 단체 모두 그렇다. 서울과 수도권이 특별할 것도 없고, 비수도권이라고 위축될 것도 없이 모두 그냥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면 로컬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불가능하다. 서울 안에서 특정 동네가 지닌 지역성도 로컬을 상징할 수 있다.
물론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대도시, 20~99만 명 정도의 중소 도시, 그리고 도시의 인프라가 매우 빈약한 농어촌 등 여러 기준으로 지역을 구분할 수 있다. 이 같은 계량적인 구분이 주는 편의는 많다. 지방 자치 제도가 그 오랜 편의성 속에서 작동해 왔다. 그러나 25년의 지방 자치 제도 실시 결과, 지역이 스스로 일어섰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로컬 각자가 지닌 역사, 체질, 문화, 사회, 경제, 정치 등의 특성을 모두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므로 계량화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섯째, ‘외국을 베끼면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라는 ‘로컬 모방론’이다. 물론 정확한 연구에서 의미 있는 시사점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이 관점을 굳이 편견이라고 구분 지을 이유는 없다. 좋은 사례는 충분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급함이 문제다. 마치 정해 놓은 것처럼 몇 개 국가의 일부 사례를 나열하고, 수요 파악이나 문제점에 대한 세밀한 고려 없이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 사대주의’가 일으키는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사례에 현혹돼 외국도 이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다시 ‘로컬은 그 수준밖에 안 된다’라는 로컬 폄훼론으로 이어져 편견 강화의 무한 반복만 이루어진다.
로컬 모방론은 (아직 제시된 적 없지만 언젠가 일어날 것 같은) ‘K-로컬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편견을 만드는 것이다. 외국의 것을 진지한 고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우리의 것을 외국에 그대로 적용하자는 입장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는 다양한 삶이라는 가치가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나아가 산업 사회의 수출 강국이 돼야 한다는 강박증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상품뿐 아니라 삶의 방식도 수출할 수 있고, 이것이 국가가 지닌 경제력을 높인다는 식의 마케팅 관점만 앙상하게 남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로컬을 푸근한 고향, 불편한 촌 동네, 그냥 적당히 베풀면 조용히 있는 변방, 인구수 중심의 행정 구획 그리고 모방·수출의 ‘대상’으로만 생각해 왔다. 편견을 가진 개인도 문제지만 정부, 기업, 미디어가 오랫동안 편견을 단단히 다져 왔다. 로컬이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장소,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사회가 아닌 막연한 대상에 머무는 한, 어떤 새로운 이야기도 진행할 수 없다. 주체적으로 로컬의 대안과 희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기회마저도 박탈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잠깐 머물렀다 가는 청년들의 치기 어린 유행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로컬에서 5년 이상 새로운 시도를 한 이들은 무엇보다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민을 하며 더 나은 로컬에서의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게 중앙 정부에만 의존하고, 남 탓만 하거나, 비교하며 사라져 가는 소멸 대상으로서 로컬은 그냥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는 별도로 로컬의 가치가 새롭게 창출되는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다. 새로운 미래 가치가 폐허 위에서 움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관광지나 휴양지에만 머무는 로컬이 아니라 더 나은 거주지, 더 나은 일터, 더 나은 삶의 공간으로서의 로컬을 만드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2019년 초반부터 중반까지 로컬 이주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문화/공간(협동조합 판, 여행자의 노래, 레비로드, 봄눈, 홍제원), 교육(춘천 별빛 산골 유학 센터), 콘텐츠(제튼, 무브노드), 푸드(버드나무 브루어리, 허브이야기, 단미푸드, 나린뜰, 화이통 협동조합, 태백산 생태 마을 협동조합), 환경(오션 카인드) 분야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국 사회적 기업 진흥원, 2020. 6. 30 기준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