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패턴
완결

코로나가 인간다움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봉쇄령이 끝나고 나면 심리적 어려움이 뒤따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 우리의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롭게 만들 기회가 있다.

©Chris Clarke/Guardian Design
봉쇄령이 시작되었을 때 텔레비전 속의 몸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저들은 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지 않지? 서로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 거리 두기 명령은 낯설고 불규칙한 것이었고, 홀로 자가 격리를 하고 있는 내게는 정부 지침을 따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평소처럼 제작된 드라마와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

7주 차에 들어서자 괴리감은 사라졌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나는 여러 가지 신체적인 현실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혼자 있는 몸들, 멀리 있는 몸들, 공원에서 피해야 하는 몸들,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반항하는 젊은이의 몸들, 상점 밖에 줄 지어 서 있는 몸들, 스크린 속의 납작해진 몸과 목소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의료인과 간병인의 몸들. 흑인의 몸, 동양인의 몸. 노동 계급의 몸. 보통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인정받고 있는 몸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몸의 예절을 배우고 있다. 서로를 이리저리 돌아가고, 거의 비어 있는 거리로 뛰어들고, 공원 입구에서 서로 간의 거리를 계산하고, 몸의 접촉은 물론이고 심지어 눈맞춤도 피하고, 휴대폰에 열중한 나머지 주의를 잃고 2미터 거리 두기 규칙을 어길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주시한다. 분명 이상하고 당혹스러우며,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은 아니다.

판데믹이 오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문자 메시지, 이메일, 왓츠앱(Whatsapp)이 빨라진 우리 삶에 더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음성 통화를 다시 사용하고, 조급하고 방해받는 느낌 대신 귀에서 들리는 소리와 대화의 리듬을 즐기게 되었다. 정신 분석가로서 나의 몇 가지 치료 세션은 현재 전화로 진행되는데, 대부분 스크린을 통해 상대의 몸 전체보다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내 얼굴이 보이는 화면을 끄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어색함에 당혹감을 느꼈다.
미국 뉴욕주 남서부 시러큐스의 사회적 거리 두기 ©Maranie Staab/Reuters
심리 치료에서 대화는 사회적 대화의 관계를 거스른다. 그곳에는 침묵, 반복, 재구성, 시간에 따른 연결 고리, 파편들의 회상, 감정의 소용돌이, 꿈의 조각들, 말해지고 부정되는 것들이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움직임이나 온전한 정적도 있다. 이는 심리 치료를 받는 사람과 치료사 사이에 특이하고 사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나는 심리 치료사로서 내가 보고 있는 개인이나 커플을 괴롭히는 딜레마가 우리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인다.

애초에 심리 치료를 찾게 만든 문제들이 치료 세션에서 재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친밀감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치료사나 치료사와의 관계를 지나치게 가까운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애정 결핍을 걱정하는 사람은 다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쉽게 이야기할 수 있어도, 치료사에게 자신의 고민을 직접 드러내기는 주저할 수 있다. 치료 관계와 치료 세션들은 우리의 페트리 디시(세균 배양 등에 쓰이는 둥글넓적한 작은 접시)다. 연구 주제는 사람(그리고 그녀, 그, 혹은 그들이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심리 치료사는 개인의 심리 문법을 이해하는 일을 한다. 개인이 큰 상처를 입지 않고도 기존 방식을 잊고 새로 다시 배우도록 돕는다.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몸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치료 세션으로 가져온다. 예를 들어 너무 가까이 앉거나, 자세가 구부정하거나, 매 세션마다 다른 인격을 드러내듯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다. 치료 과정에서 이런 신체 경험들이 해결된다. 그 사람은 배운 것을 잊고 다시 배워 나가며 자신의 몸 안에 더 편하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몸의 비물질화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나와 내 환자들, 그리고 당신,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내 일부 환자들에게 스크린과 집은 감옥이다. 그들의 경험은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심리 치료는 그들을 간신히 제정신의 경계에 붙들어 두지만, 그 제정신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고립감은 우리가 친밀하거나 일상적인 상호 작용을 그리워할 때 우리를 습격한다. 고립감은 우리의 가치, 공동체에서 우리의 자리, 우리의 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인시켜 준다.

 

몸은 항상 사회적 규율에 의해 구속되고 특징지어져 왔다. 비슷한 신체적 행동이나 몸짓이 사회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물질적, 신체적 자아를 어떻게 습득할까. 나의 임상적 관심사 중 하나다. 정신분석학은 몸과 정신에 대한 이론이지만, 주된 강조점은 정신의 발달과 구조로 이동해 왔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방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흡수해 온 관계의 패턴이다. 정신의 작동 과정이나 장애가 피부 습진이나 생물학적 원인이 없는 마비 같은 신체 증상을 초래할 때조차도, 몸은 정신이 주연인 드라마의 단역이었다. 심리 치료사들은 전통적으로 신체에 그러한 증상이 나타났던 시점에서의 정신 상태를 되짚어 본다. 그러한 신체 증상을 정신적 갈등의 결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종종 그렇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몸에 일어나는 문제들과 어려움을 몸의 문제 자체로 이해하고, 몸의 발달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싶었다.

몸은 항상 사회적 규율에 의해 구속되고 특징지어져 왔다. 비슷한 신체적 행동이나 몸짓이 사회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다. 목에 두르는 고리 장식에서부터 근래에 급증한 질 축소술과 음경 확대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다양한 종류의 신체 장식과 변형 시술은 몸이 단순히 DNA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더없이 분명히 해왔다. 우리의 몸은 다른 몸과의 관계 속에서 발달한다. 명확한 예를 들면, 우리는 성별에 기초한 행동거지를 보통 어머니의 영향 아래서 처음 파악한다. 내가 자랄 때 여자아이처럼 앉아야 하고 나무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은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대해지는 것들 중 일부였다. 많은 문화권에 걸쳐 수행된 연구에 따르면 여아는 남아에 비해 더 일찍 젖을 떼고, 더 일찍 배변 훈련을 받으며, 매 끼니마다 적게 먹고, 적게 안긴다. 아마도 여기에 생물학적 이유는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가 몸을 통한 특정한 체화를 어떻게 개인적으로 경험하는지를 알려 주는 사회적, 무의식적 기초가 있을 것이다.

인류 문화권 밖에서 성장한 인간에 대해 확인된 보고는 매우 드물지만, 1800년 프랑스 남부 숲의 야생에서 발견된 야생 소년 빅터(Victor of Aveyron)는 인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몸놀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몸과 몸 관계의 기반은 그가 함께 자란 늑대들의 몸이었다. 그는 늑대의 걸음걸이와 움직임, 자세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우리는 이런 행동을 조금 더 친숙하고 덜 극적인 형태로 알고 있다. 영화배우나 가수의 행동을 따라 하며 집단 정체성을 형성하는 젊은이들을 통해서다.
지난 4월 영국 카디프의 럭비 경기장에 임시 병원이 들어섰다. 참가자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가운데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Matthew Horwood/Getty Images
스크린, 광고판, 포토샵된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신체 표현을 줄여 나간다. 언어를 잃어 가고 있는 것처럼 몸의 다양성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화되고 서구화된 신체 이미지가 우위를 차지하고, 이는 중국의 (지금은 금지된) 철근을 사용한 다리 확장 수술, (세계에서 1인당 코 수술 비율이 가장 높은) 이란의 코 성형술, 한국의 쌍꺼풀 수술과 턱뼈 수술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간 전 세계적으로 성형 산업을 낳았다. 서양에서는 외과 의사들이 광대뼈, 가슴과 종아리를 재조각하고 당일 얼굴 주름 제거 시술을 제공한다. 헝가리, 한국, 싱가포르에 중심지를 둔 성형 수술 관광은 봉쇄령 전까지 번창했다.

한 중국 스마트폰 앱은 셀프 카메라를 찍을 때 자신의 얼굴을 왕홍[wang hon lian, 인터넷 스타라는 뜻의 왕뤄홍런(网络红人)을 줄인 신조어]의 매우 구체적인 미의 기준에 맞는 얼굴로 조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앱은 매우 인기가 높아 매달 수십억 장의 왕홍 이미지가 업로드된다.

가장 부유한 유럽인들은 테크 산업계가 아니라 몸을 가꾸는 뷰티 산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 로레알(L’Oreal), 자라(Zara)와 같은 패션, 럭셔리, 화장품 브랜드의 소유주들이 그렇다. 자동화의 증가는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몸을 사용하던 것에서, 운동과 다이어트, 옷, 화장품을 통해 우리 몸이 노동의 현장이자 결과물이 되도록 했다. 몸의 겉모습은 전시되기 위함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땀나고, 냄새나고, 붙잡고, 쓰다듬는 타인의 몸은 사회적인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동떨어진 것이 되었다. 반면 10대 소년들과 한 집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이다. 봉쇄령 동안 가족과 동거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보이게 되는 반면,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숨겨지게 되었다.

페이스타임(FaceTime)이나 줌(Zoom)을 통한 신체적 경험은 우리 몸의 맥박, 호흡, 울음, 한숨, 피곤함, 아프거나 혹은 생기 있고 열정적인 몸과 대조된다. 우리는 실제적 사회적 교감, 악수나 포옹, 낯선 사람 가까이에 앉아 친구나 연인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보호를 위해 감염을 두려워하고, 우리의 사회적 공간을 붕괴시켜 나간다.

 

우리는 타인의 신체와의 사회적 상호 작용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변화를 원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정신과 의사 르네 스피츠(René Spitz)는 병원에 있는 고아들을 연구했다. 그는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아이들은 잘 자란 반면, 병동의 끝에 있었던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그 차이는 신체 접촉에 있었다. 간호사들은 가까이에 있는 아이들을 무심코 만지고 그들과 상호 작용을 했고, 이는 유아들의 신체적, 심리적 발달에 필수적인 양식을 제공했다. 그들은 삶의 의지를 흡수했다. 10년 후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는 ― 새끼 원숭이를 어미 원숭이로부터 떼어 낸 방법으로 인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연구에서 ― 천으로 만든 가짜 인형 어미와 함께 있었던 새끼 원숭이들은 모성과의 접촉 시뮬레이션만으로도 결정적인 안정감과 편안함을 얻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형태로든 모성과의 접촉이 없었던 새끼 원숭이들은 매우 불안해했고, 많은 수가 죽었다.

촉각, 느낌, 근접함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조산아가 부모의 피부와 닿았을 때 자신의 체온과, 놀랍게도, 부모의 체온마저 조절할 수 있는 천재적 능력을 생각해 보라. 시선(타인을 인식하고, 영향을 미치고, 보이기 위한 탐색) 또한 인간의 주관성에 매우 중요하다. 발달 심리학자 에드워드 트로닉(Edward Tronick)이 만든 흥미로운 영상에서, 그는 아기와 놀이를 하는 엄마에게 1~2분 동안 굳은 얼굴을 하고 아기와의 상호 작용을 자제하라고 지시한다. 우리는 어린 여아가 엄마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실패했을 때, 아기는 엄마와의 접촉이 회복될 때까지 심리적, 신체적으로 무너진다. 충격적인 것은 그 무너짐의 빠른 속도다.
발달 심리학자 에드워드 트로닉의 실험
나는 친구들과 채팅을 하거나 화상 회의에 참가할 때, 줌 스크린을 통한 우리의 준-비물질화된 삶이 얼마나 어렵고 도전적인지 생각해 보았다. 미묘한 몸짓이 없어지고 눈으로 나누는 대화가 중단되면서 갈등과 조화가 만화처럼 변한다.

서로를 충분히 잘 읽는 것은 화상 심리 치료실에서 환자와 치료사 모두에게 새로운 기술이다. 이제 우리는 스크린과 전화, 간간히 일어나는 기술적 오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서재, 침실, 창고, 혹은 부엌의 인테리어를 보고 있으며, 때때로 아이의 등장에 놀란다. 우리는 우리의 대화를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측면들을 보여 준다. 이것이 더 나은 것일까? 아니면 더 나쁜 것일까? 어느 정도는 더 나쁘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치료실에 들어서는지  ― 이전 세션과의 미묘한 차이점, 그들이 얼굴과 몸을 가누는 방법 ― 를 알아채지 못한다. 무엇보다 방에서 움직이는 몸을 놓친다. 나는 그 귀중한 육체성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더 활기차게 구는 것 같다.

인질로 잡혀 감금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테리 와이트(Terry Waite), 존 매카시(John McCarthy), 브라이언 키넌(Brian Keenan)은 독방에서의 생활, 그리고 가족과 사회로 돌아가는 ― 혹은 앞으로 나아가는 ― 길을 찾기 위한 그들의 싸움에 대해 생생하게 쓰고 말한 바 있다. 이는 힘든 일이었다. 우리들 중 다수가 홀로 자가 격리 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봉쇄령 동안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없거나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충분한 사람들이 없는 한, 이후 상당한 심리적 어려움이 뒤따를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신체와의 사회적 상호 작용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변화를 원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벨기에 법원의 좌석 ©REX/Shutterstock
많은 사람들이 홈스쿨링, 재택근무, 3대 가족을 보살피는 일 등으로 매우 바쁘다. 시간은 복잡한 방식으로 구부러지고 줄어들었다. 어떤 이들은 더 바빠진 반면, 느림이 낯선 어떤 이들에게는 나태함이 강요되었다. 비어 있는 시간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사교 모임에 서둘러 갈 필요 없고, 옷을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 모든 일을 끝낼 필요도 없다. 원해지고, 필요로 해지고, 요구되는 것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심리적 지지대였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서, 특히 우리가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의지하는 촉각과 시선의 부재 속에서, 필요를 충족시킬 새로운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지금은 겁에 질려 경계하는 사회적 몸이 있다. 회피가 좌우명이 된 긴장 상태의 몸이다. 후드 티나 베일로 가려진 얼굴은 예전에는 반항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안도감을 준다. 실제로 유로스타(Eurostar) 열차에서부터 뉴욕, 프라하, 두바이, 하바나의 거리에 이르는 많은 공공장소들이 이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이제 많은 사회가 그동안 터무니없이 간과되었던 몸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하는 여성의 몸, 환자들의 집을 드나드는 간병인들의 몸. 특히 공공 의료 서비스에서 마침내 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불균형하게 인명 손실을 입은 흑인, 아시아인, 소수 민족의 몸들.

코로나 이전에 영국 집권당은 기꺼이 사회 보건 기금을 삭감하고, 전문 간병인, 의사, 간호사가 아닌 국민보건서비스(NHS)의 경영에 자금을 투입했다. 이제 사회는 병원 현장에서 일어나는 치료와 의료 전문성의 가치, 즉 의사와 간호사의 가치에 눈을 뜨고 있다. 운수 노동자, 소상공인, 음식 생산과 배달 종사자들처럼 사회 곳곳을 유지시키는 사람들은 종종 이민 1세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미묘한 사회 지형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사회적 몸은 과거와는 분명 다를 것이고, 지난 세월 우리의 부끄러운 무관심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가 렌즈를 청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현재 상황을 진전시키는 것은 많은 부분이 시민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개인의 몸에서 사회적 몸에 이르기까지 이 몸들은 판데믹으로 어떻게 도전받고 있고, 공동의 몸 ― 국가의 몸 ― 은 어떻게 작동해 왔을까.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의 세계보건연구소(Institution for Global Health) 소장을 역임한 안토니 코스텔로(Anthony Costello) 교수는 4월 17일 보건·사회복지위원회에서 영국이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낼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고, 이는 이제 사실로 확인되었다. 코스텔로가 추정한 사망자 수는 4만 명이었다. 5월 5일 영국의 공식 집계 사망자 수는 3만 2000명을 조금 넘어섰지만, 같은 날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실제 사망자 수가 코스텔로의 추정치를 이미 넘어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런던과 잉글랜드 북서부는 다른 지역보다 사망률이 높고, 영국통계청(ONS)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가장 빈곤한 지역 사람들은 가장 부유한 지역보다 두 배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다.

코스텔로가 코로나로 4만 명이 숨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코로나 사태 초기에 영국의 예방 조치가 느렸기 때문이다. 코스텔로는 제러미 헌트 하원 보건·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에게 말했지만, 헌트는 이 시기를 검사 수, 인공호흡기, 개인 보호 장비의 부족을 강조하는 데 써버렸다. 헌트는 영국 최장수 보건 장관을 지낸 인물로, 사회 복지와 의사, 간호사, 사회 복지사의 급여에 업무 책임을 지고 있었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그가 2016년에 실시된 영국 정부의 전염병 대비 훈련인 시그너스 훈련(Exercise Cygnus)의 담당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시그너스 훈련에 대한 전체 보고서는 공식 발표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보건 시스템과 지역 당국이 만일의 사태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유출된 자료로 확인됐다. 그 훈련에서 병원과 영안실은 빠르게 포화됐고, 중환자실, 인공호흡기, 의료진의 개인 보호 장비가 부족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시그너스와 같은 훈련들은 정부가 준비되어 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헌트가 그랬던 것처럼 병상 수를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1] 시그너스의 대실패가 드러난 지난 3월 28일, 영국 정부는 공급망 확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병상, 인공호흡기, 개인 보호 장비가 부족하다고 발표했다(판데믹 상황에서 신뢰할 만한 공급망은 매우 빠르게 포화된다). 시그너스와 전염병에 관한 2018년 적십자회의 보고서에는 “질병 발발에 대한 재정적, 인적 비용은 엄청날 수 있고, 초기 대응이 그 비용을 줄일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영국 정부는 행동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의료진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Andrew Milligan/PA
매년 취약 국가 지수(Fragile States Index)를 발표하는 워싱턴 소재의 비정부 기구인 평화 기금(Fund for Peace)은 취약 국가의 기준을 열거하고 있다. 나는 영국이 그중 두 가지 기준 ― 빈곤 계층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 없음, 국제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국가들과 교류할 능력 없음 ― 에 부합하는 데 위험할 정도로 근접해졌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 달 동안 웃음거리가 될 만한 전개 ― 비상사태 과학 자문 그룹(SAGE·Scientific Advisory Group for Emergencies)의 독립성에 대한 의문, 개인 보호 장비에 대한 유럽 연합(EU)과의 커뮤니케이션 누락 의혹, EU와 협력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결정, 회신 봉투 없이 배송된 자가 검사 키트, 유효 기간이 만료된 개인 보호 장비 ― 는 정부가 ‘폴티 타워즈(Fawlty Towers, 무능한 호텔 경영인을 풍자하는 영국 시트콤)’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 준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상세히 보도했던, 새로운 인공호흡기를 제작하려던 영국 기업들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영국 정부는 허가를 받은 기존 계획으로 제작하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어째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브렉시트(Brexit) 자만심일까?

나는 영국과 EU의 대응을 비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EU는 판데믹 동안 영광으로 스스로를 감싸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협력의 윤리와 투명성과 정직의 윤리는 지난 몇 달 동안 강력하게 시험되어 왔다. 아마도 이제 우리는 글로벌 헬스케어 시스템(global healthcare systems)을 강화하기 위한 유럽 투자 은행(European Investment Banks)과 세계보건기구(WHO)의 공동 프로젝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영국 정부가 기여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현재 상황을 진전시키는 것은 많은 부분이 시민들의 행동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독립 전문가 패널, 즉 SAGE의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는 전 영국 정부 수석 과학 고문 데이비드 킹(David King)이 이끄는 것으로, 유튜브에서 그 논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정부의 실패를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는 부분적으로 공익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모집했던 NHS 자원 봉사에 75만 명이 신청했지만, 그중 10만 명 미만이 배치되었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용을 허비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지만,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계속 나서고 있다. NHS를 돕기 위해 퇴역 대위 톰 무어는 모금 활동을 벌였고, 바느질과 3D 프린터로 마스크와 의료 용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레스토랑 체인 레온(Leon)과 요리사들이 환자, 의사, 간호사, 환자 이동 요원, 구급차 요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인 피드 NHS(Feed NHS)는 활동 준비를 갖췄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이런 탁월한 활동은, 자원 봉사 희망자들을 제대로 운용조차 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과 대조된다.

빌게이츠 재단(The Gates Foundation)의 7개 백신 프로그램 지원과 트위터의 CEO 잭 도시(Jack Dorsey)의 10억 달러(1조 1700억 원) 기부는 인상적이다. 지난 3월 24억 파운드(3조 6000억 원)를 챙긴 투자 회사 러퍼(Ruffer)나 코로나를 ‘한 세대에 한두 번 있을’ 투자 기회로 보는 제이콥 리스-모그(Jacob Rees Mogg, 영국 보수당 소속 정치인)가 운영하던 서머셋 캐피털(Somerset Capital)과 같은 영국 헤지 펀드들도 기여하는 바가 있을까?

영국계 헤지펀드 수십 개가 10억 파운드(1조 50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헤지펀드 투자자와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수익의 일부를 코로나 대응에 기부하거나, 취업 허가에 요구되는 소득인 3만 파운드(4500만 원)를 벌지 못하는, 영국에서 청소부, 간병인, 운전사로 일하고 있는 유럽 밖 출신 이민자들을 후원하도록 설득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대규모 실업에 대한 심각한 경고와 더불어, 원격 근무의 영향, 가정과 일 사이의 균형 유지에 대한 필요성은 일을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사회 계약을 다시 작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코로나는 슬픈 이야기다. 또한 회복 탄력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가의 몸은 우리를 실패하게 했다. 우리는 성장하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코로나는 용납할 수 없는 시스템의 실패를 드러냈다.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공무원과 의료인의 지위가 격하되는 현상을 지켜봐 왔다. 교사, 의사, 학자는 경영과 경제에 가려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현 상황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병원에서는 마이크로매니지먼트가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 같다.

우리의 몸 ― 살아 있고, 촉각과 시선이 결여됐으며, 오랜 고립에 직면해 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몸 ― 으로 돌아가서,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우리는 이 위기의 끝으로부터 아직 멀리에 있다. 심리 치료는 몸과 정신을 다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쓰이고 있어서 좋아하진 않지만, 우리 사회는 현재 트라우마에 빠져 있다. 사회적 트라우마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묻어 두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는 한, 우리가 혼자 고통을 받기보다는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코로나로 생겨난 사회 공포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편함, 우리가 타인의 몸에 투영하는 것, 우리 자신의 취약한 부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애착과 존중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 자신의 몸과 서로의 몸들에 대한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가능한 한 모든 도움을 얻어야 한다.

‘개인의 몸’ 비물질화로 시작된 것이 이제 ‘국가의 몸’ 비물질화가 되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과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 총리의 작은 정부를 겪으며 우리가 역량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어떻게 더 공평한 경제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학자들 사이에 활발한 논쟁이 있다. 《머니위크(Moneyweek)》의 편집장 메린 서머셋 웹(Merryn Somerset Webb)은 구제 금융을 받은 기업의 지분을 정부가 소유해 국부 펀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 경제학자 윌 허튼(Will Hutton)의 영국 기업은행(British Business Bank)과 미래펀드(Future Fund) 확대 구상안도 흥미롭다. UCL의 경제학과 교수 마리아나 마주카토(Mariana Mazzucato)는 국가가 혁신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다른 종류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노력을 다시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영국의 소수자 집단과 노동자들의 기여와 손실을 인식해야 한다. 영국 정부는, 특히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집권 시기(2010년 5월~2016년 7월) 긴축 정책을 시행하면서 부끄럽게도 사회 분열을 초래했다. 지금 우리는 브렉시트가 불러온 분열의 여파를 바로잡을 뜻밖의 기회를 얻게 됐다.

대규모 실업에 대한 심각한 경고와 더불어, 원격 근무의 영향, 가정과 일 사이의 균형 유지에 대한 필요성은 일을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사회 계약을 다시 작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적게 받는 사람, 많이 받는 사람 모두 과로하고 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보다 균형 잡힌 관계가 필요하다.

코로나 위기가 시작된 이후 각계각층의 예술가, 음악가, 프로그래머, 문화, 과학 종사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재능, 의지, 열망이 세상을 다시 만든다. 시급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로벌리즘은 단순히 ‘적시 공급’의 장이 아니다. 전쟁 지역에서 봉쇄령을 겪은 이들까지 포함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상호 관계, 지역과 세계의 상호 관계로 재편되어야 한다.

기관들은 진심을 가지고 투명하게, 관리자와 소유자가 아니라 그들이 고용해 온 사람들로부터 배우며 재건되어야 한다. 의사, 간호사, 간병인, 환자 이동 요원들은 그들의 기관이 어떻게 더 잘 운영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다. 우리 세상을 이루는 정치 공동체(body politic)와 몸들의 정치(politics of the bodies)는 반드시 재구성되어야 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프로이트(Freud)로 끝을 맺는다. "정신분석의 목적은 히스테리를 인간의 평범한 불행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를 위한 성취다. 우리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 불행은 창의력, 용기, 야망, 애착, 사랑과 같이 인간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이 슬픔의 시대에 인간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더 현명하고 더 겸손하고 더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1]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 장관은 2012~2018년 보건 장관을 지냈다. 당시 보수당 정부는 NHS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헌트는 NHS의 운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민영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