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방송과 영화 산업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린다. 20년 전 비디오 대여점으로 출발한 넷플릭스(Netflix)가 혁신 기술과 오리지널 콘텐츠를 앞세워 세계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흔들고 있다. 넷플릭스가 약진하면서 미국 최대의 비디오 대여점 ‘블록버스터’는 파산했고, 미국 최대의 케이블TV ‘컴캐스트’도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급기야 2017년 미국 내 넷플릭스 가입자 수가 케이블TV 가입자 수를 넘어섰다. 방송 지형을 바꾼 넷플릭스는 이제 콘텐츠의 성지, 할리우드로 진격하고 있다.
영화계도 반격에 나섰다. 최근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 〈옥자〉가 초청되자, 프랑스극장협회(FNCF)는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극장 개봉을 전제로 하지 않은 작품을 영화제에 초청하면 영화계 질서가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심사위원장도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옥자〉를 둘러싼 논란은 국내에서도 재연됐다. 멀티플렉스 3곳(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은 한국 영화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옥자〉를 상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016년 1월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했을 때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콘텐츠 공룡이 침공한다는 소식에 미디어 사업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내 굴지의 미디어 기업은 넷플릭스를 연구하는 태스크포스 팀을 꾸렸고, 또 다른 기업의 CEO는 넷플릭스의 정체를 파악해 보고하라는 특명까지 내렸다.
국내 미디어 업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것 같았던 넷플릭스는 파괴적 명성에 비해 조용히 서비스를 시작했다. 서비스 센터도, 직원도 없었다. 케이블TV와 위성 방송 서비스 론칭에 직접 참여해 본 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시장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유료 방송을 하겠다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래서 직접 넷플릭스 애플리케이션을 스마트폰에 설치하고, 여러 명이 계정 하나를 공유하는 다수 계정 기능을 이용해 아들과 동시에 서비스를 체험했다. 듣던 대로 UI가 쉽고 편리했다. 콘텐츠 목록을 보여 주는 포스터 배열도 사용자 친화적이었다. 보던 영화는 언제라도 다음 장면부터 이어 볼 수 있도록 화면 상단에 포스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 진출 1년이 지난 지금, 국내 미디어 사업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해볼 만하다’는 평가가 대세다. ‘볼만한 콘텐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넷플릭스를 써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용하기는 참 편한데 볼만한 콘텐츠가 없다”고 평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안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넷플릭스의 핵심 성장 동력은 콘텐츠가 아니었다. 2007년 온라인 스트리밍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신작보다는 오래된 콘텐츠를 중심으로 사업을 꾸려 나갔다. 콘텐츠 제공자의 견제로 판권이 확보된 콘텐츠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정교한 추천 시스템을 통해 비인기 콘텐츠도 활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콘텐츠 수에 관계없이 시장의 파괴자로 진화했다.
영상 미디어의 진화사를 보더라도 콘텐츠가 새로운 미디어를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혁신 기술’이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었고, 그 기술로 제작된 콘텐츠가 미디어를 키워 나갔다. 현재의 콘텐츠 부족은 새로운 플랫폼이 시작할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관련 업계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넷플릭스의 국내 진출에 대응하는 국내 미디어 기업의 태도는 아쉬움을 넘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 구글의 국내 진출을 한껏 우려하다가, 파장이 크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 국내 미디어 기업의 현주소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네트워크 인프라와 ICT 기술, 아시아 최고 수준의 콘텐츠 제작 역량을 지닌 나라다. 2016년 콘텐츠 매출이 105조 원을 상회하는 세계 7위의 미디어·콘텐츠 강국이 보일 태도는 아니다.
미디어 변혁기에 우리 현실은 어떨까. 거대 기업은 전통적인 수익을 지키기에 급급해 혁신 기업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친다. 거기에 더해 정부는 각종 규제를 도입해 실험 대신 기존 기업의 안전을 보장한다. 넷플릭스, 유튜브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미디어 기업이 태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한국의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혁신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 넷플릭스는 빅데이터, 추천 시스템, 큐레이션, 검색 기술을 활용해 소비자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내놓는다. 여기에다 어댑티브 스트리밍, 오픈 커넥트 서버, HDR, 4K 같은 기술을 결합해 네트워크 환경에 관계없이 최상의 화질을 제공한다. 혁신 기술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혁신의 토양이 된다.
한국도 규제 정책을 개선해 미디어 시장에서 끊임없이 실험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는 기술 융합이 빠르게 이뤄질 것이다. 이미 콘텐츠와 기술이 결합한 VR(virtual reality·가상현실), AR(augmented reality·증강현실), MR(mixed reality·혼합현실)이 나왔다. 유선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 회선을 이용하는 ‘버추얼 케이블TV’도 등장했다. 콘텐츠와 IT가 만나 새로운 산업이 창조되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Wilmot Reed Hastings, Jr)는 말한다.
“넷플릭스는 두 가지 사업을 하고 있다. 첫째는 이용자에게 넷플릭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인터넷 기반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자 취향을 분석하는 IT 사업이다. 둘째는 흥행할 콘텐츠를 찾아 투자하는 제작 사업이다.”
이제 콘텐츠 경쟁력은 스토리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에서 나온다.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를 ‘기술 위에 쌓아 올린 엔터테인먼트 회사’라고 말한다. 《뉴욕 타임스》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은 온라인 언론사 ‘버즈피드(BuzzFeed)’의 회장 그레그 콜먼(Greg Coleman) 역시 버즈피드를 기술 회사로 정의한다. 이유는 뭘까.
“우리는 최고의 기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콘텐츠를 내놓는다. 요즘 시대엔 콘텐츠 소비와 이용자의 반응, 공유, 피드백에 대한 정확한 측정이 없으면 위대한 회사가 될 수 없다. 최상의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가장 큰 무기이고, 이를 통해 적합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둘째 무기다.”[1]
미디어 업계에서 데이터는 원유처럼 귀한 자원이다. 데이터로 심지어 스토리와 콘텐츠까지 만든다. 넷플릭스와 버즈피드는 소비자의 콘텐츠 소비 패턴을 분석할 수 있는 다수의 데이터 과학자를 확보하고 있다. 구글의 알고리즘은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인물의 표정까지 분석해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즐거워하는지 파악한다.
그동안 한국은 주로 예감과 직감에 의존해 콘텐츠를 제작해 왔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우리도 데이터의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자신들이 창출한 데이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 책에서는 넷플릭스의 파괴적 혁신을 ‘빅뱅 파괴(Bigbang Disruption)’ 이론[2]을 통해 살펴보고, 국내 미디어 산업의 혁신 방안을 제안한다. 빅뱅 파괴는 ‘빠르게 나타나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고, 기존 시장을 완전히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품 확산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빅뱅 파괴자는 무어의 법칙(마이크로칩의 밀도가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에 기초한 ‘기하급수적 기술’을 활용해[3] 저렴하지만 더 뛰어난 개인 맞춤형 제품 또는 서비스를 가지고 시장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 성숙한 시장을 단번에 초토화한다. 대표적인 기하급수적 기술로는 광대역 인터넷, 스마트폰,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이 있다.
DVD 대여 업체에 불과했던 넷플릭스는 설립 10년 만에 미국에서 코드커팅(cord-cutting·유료 방송 가입 해지)[4]을 유발했다. 설립 20년이 지나서는 전 세계 미디어 산업을 바꾸는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눈부신 성공의 기저에는 ‘이용자 중심’이라는 최우선 가치가 있었다. 철저히 이용자 입장에서 생각해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거기에 기술을 더해 ‘콘텐츠에 자유를 허락하라’는 디지털 시대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지금부터 빅뱅 파괴자 넷플릭스의 혁신 비결을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