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호기심은 성취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학생들의 호기심에 불을 붙일 수 있다면 학생들은 아무런 도움 없이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배우는 것보다 시험을 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험이 순수한 배움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교육학자 켄 로빈슨(Ken Robinson)이 TED 강연에서 한 말이다.[1] 로빈슨은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이미 망가진 모델”이라며 “개선이 아니라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인간의 잠재력과 가치를 획일적인 잣대로 정량화하고, 단일한 기준으로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는 교육을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대학을 간 학생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성공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는 자녀를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 자녀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기를 바라며 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배움의 욕구를 갖고 있다지만, 그러한 욕구는 알고 싶은 것을 배울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다. 지금처럼 개인의 적성이나 관심과는 상관없이 모든 학생이 똑같은 것을 배우고,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배움은 힘들고, 어렵고, 지루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대량생산형’ 교육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현재와 같은 교육 시스템은 산업 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했다. 소규모 인력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었던 농업과 달리, 공업은 대규모 인력을 필요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게 되면서, 이들을 관리하는 행정 인력이 생겼다. 글을 배운 사람은 행정 업무를, 글을 모르는 사람은 단순 노동을 하는 형태의 인력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로선 글을 아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고, 임금을 많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은 돈을 받고 몸을 써서 일을 하는 노동자 계급인 블루칼라와 많은 돈을 받고 사무를 보는 관리자 계급인 화이트칼라가 탄생했다. 교육 수준은 직업의 종류와 임금을 가르는 기준이 됐다. 산업화 사회에서 지식 노동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교육이었다.
교육 시스템은 이처럼 산업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인간 부속품을 찍어 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교육은 산업과 사회를 더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자연히 개인의 개성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국·영·수에 목을 매고 사회의 잣대에 맞는 사람이 되라고 종용하는 교육은 산업화를 위한 거대한 프로세스에 불과한 셈이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노동력을 생산해 내는 교육은 오랫동안 비판받아 왔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이반 일리히(Ivan Illich)는 “지금의 교육은 사람을 출신 학교와 학력으로 계층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의 교사’라고 불리는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는 “시험에 합격하고, 직업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우리는 점점 기계를 닮아 간다”고 비판하면서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기성 교육이 인간의 개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산업 혁명 시대의 교육 방식이 21세기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우리는 더 이상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을 찍어 내는 제조업의 시대에 살지 않는다. 원하는 물건을 맞춤형으로 순식간에 만들어 내고 유통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전 세계에서 활용되고 있다. 많은 인력을 관리하는 행정 업무에 능한 노동자가 아니라, 다양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시대다.
세상이 변했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의 교육 시스템으로는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가능성(full-potential)을 발현하기 어렵다. 교육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을 때 가장 멋진 것처럼,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배워야 빛날 수 있다.
결국 이상적인 교육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과 가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기계로 물건을 찍어 내는 듯한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다.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에 투자한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시설과 기계에 투자하는 산업 혁명 시대의 논리가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로빈슨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로빈슨은 교육을 서로 다른 가능성의 열매를 맺게 하는 농사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의 말처럼, 앞으로의 교육은 농사를 짓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농부가 흙은 부드러운지, 거름은 부족하지 않은지, 비뚤어지게 자라는 것은 아닌지 살펴서 흙을 갈아 주고, 거름도 주고, 나무 기둥도 세우는 것처럼 학생 한 명 한 명을 키워야 한다. 학생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독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 기관의 역할이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만들어진 교육 기관이 과연 존재할까? 생각만 하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곳이 있을까? 나는 이런 교육 철학을 실현하고 있는 기관을 찾기 위해 전 세계의 수많은 대학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올린 공대를 발견했다. 단언컨대, 이들은 현존하는 교육 기관 중에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교육을 실현해 가고 있었다.
올린 공대의 정식 명칭은 ‘Franklin W. Olin College of Engineering’이다. 1999년에 설립 멤버가 모였고, 2002년 가을 학기에 정식으로 개교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인근의 소도시 니덤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이 많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졸업한 학교로 잘 알려진 웰즐리(Wellesley)여대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영학 석사MBA 과정으로 정평이 난 밥슨(Babson)칼리지가 인근에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와 하버드대학교가 있다.
올린은 학부 중심의 4년제 대학으로 엔지니어링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세부 전공으로는 전기전자, 컴퓨터, 기계 공학 분야를 다룬다. 전체 교육 과정은 인문사회학, 엔지니어링, 비즈니스·창업 과정 이렇게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 수는 아주 적다. 매년 80~90명 정도의 신입생이 입학하고 전교생이 350명 정도다. 입학생 수준은 MIT, 스탠퍼드 같은 명문대와 동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MIT, 스탠퍼드에 합격한 학생이 올린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합격생의 평균 등록률이 92퍼센트로 MIT와 비슷하다. 약 40명의 전임 교수가 있으며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9명 수준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학교이지만, 올린은 개교 10여 년 만에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의 반열에 올라섰다. 올린은 《US News》가 실시한 ‘2018 미국 대학 평가’에서 학부 중심 엔지니어링 대학 부문 3위를 차지했다.[2]
올린은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그리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대학이다. 하지만 내가 올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높은 순위와 같은 성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올린의 혁신적이고 이상적인 설립 사명과 교육 철학 때문이었다. 아래는 올린의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이다.
‘올린 공대는 세계의 이익을 위해 필요를 인식하고, 솔루션을 디자인하며, 창의적인 기업에 참여하는 모범적인 엔지니어링 혁신가가 되는 학생을 키웁니다(Olin College prepares students to become exemplary engineering innovators who recognize needs, design solutions and engage in creative enterprises for the good of the world).’
올린의 사명은 온전히 사람을 길러 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올린은 지난 15년간 위와 같은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시도했고, 성공적으로 실현해 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은 경험을 전 세계의 교육 발전을 위해 공유하고 있다. 올린은 2009년부터 전 세계의 교육자들을 초청해 공식적으로 올린의 교육 철학과 방식을 전파하는 I2E2 프로그램(Initiative for Innovation in Engineering Education)을 운영하고 있다.[3]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교육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실제 교육을 하고 있는 교수들이 올린을 배우기 위해 니덤으로 몰려든다. 새로운 교육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올린을 주목해야 한다.
나 역시 기업인을 키워 내는 교육을 담당하면서 올린의 I2E2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올린 공대의 교육을 배우기 위해 직접 학교에서 생활하고 배우면서 올린의 수많은 학생과 교수, 직원을 인터뷰했다. 기업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올린에서 열리는 교수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그곳에서 학생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학생이 주도하는 경험 중심의 교육을 만났다. 진짜 교육의 실체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내가 배운 올린의 선구적인 교육 철학을 한국에서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