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 대지진 10년의 교훈
2화

후쿠시마 사고는 전환점이 되지 못했다

원전 사고는 개혁의 원동력이 되는 대신 환멸을 낳았다

후쿠시마현의 언덕이 많은 마을 이이타테에는 버려진 건물에서 나온 자재들로 지어진 주민 센터가 있다. 한 건물에서 가져온 창문, 다른 건물에서 가져온 문, 등교할 어린이가 없는 학교에서 가져온 칠판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작년 가을 어느 흐린 날, 이 주민 센터의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녹색 기모노를 입은 노년 여성이 민요를 부르는 목소리가 음악에 맞춰 박자를 타기 시작하고, 현지인들과 주민 센터의 디자인에 참여한 도쿄 사람들이 함께 밤을 가득 채운 주먹밥을 즐겼다.

이이타테는 고급 소고기와 말린 무로 알려진 농촌이다. 2010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최근 모습은 전원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푸른 아부쿠마 산맥을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있다. 1971년 문을 연 이 시설은 전후 경제 성장을 위해 일본 전역에 세워진 수십 개의 발전소 중 하나였다. 정부는 원전 유치 보조금을 지방 자치 단체에 지급하고 안전을 약속했다. 2011년, 일본에는 자국 전력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54개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지진이 일본 동북부 해안을 강타했다. 지진은 쓰나미를 유발했고, 해안선 500킬로미터를 따라 40미터 높이의 파도가 몰아쳤다. 집과 도로가 유실됐다. 원전은 파도를 견뎌 냈지만 비상 발전기가 침수되면서 6개 원자로에 필수적인 냉각수의 유입이 중단됐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중 3개 원자로가 녹았고 지역에는 방사선이, 전 세계에는 공포가 퍼졌다.

수천 명이 집을 떠나 대피했다. 일부는 우선 이이타테로 이동했지만, 바람이 방사능 입자들을 이이타테로 보내고 있었다. 결국 당국은 이이타테에도 대피 명령을 내렸다. 6년 후, 귀환이 허가됐지만 1500명만이 돌아갈 수 있었다. 재난 이전 마을에 살았던 6200명 중 극히 일부다. “방사능의 영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깊이 느껴집니다.” 주민 센터 건립을 도모한 NGO 후쿠시마 재생회의 타오 요이치는 말했다.

지진은 문자 그대로 일본을 변형시켰다.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은 동쪽으로 2.4미터 이동했다. 동시에 일본 사회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예견됐다. 정치인들은 후쿠시마를 경제 침체와 인구 감소 이후 부흥의 상징으로 부활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논평가들은 3.11로 불리게 된 그 재난을 두고 한 세대를 형성할 만큼 공유된 경험이자 경직된 기관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닫힌 마음을 열리게 할 충격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전후’ 시대는 ‘재난 후’ 시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3.11을 조사했던 구로카와 기요시 의회 위원장은 이 재난을 1868년의 막부 폐지와 2차 세계 대전 패전과 유사한 ‘제3의 시작’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거론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제3의 시작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저는 일본이 마침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것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 것 같습니다.” 독립 조사 기관의 책임자인 후나바시 요이치가 말했다. “첫째는 회복이지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구로카와 기요시는 이에 동의한다. “위기는 일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3.11은 다루기 힘든 구조적 차원의 내부 실패를 드러냈지만, 회복 탄력성도 내재되어 있었다. 일본을 강타한 재난의 결과는 2차 세계 대전처럼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다. 재난은 공교롭게도 일본 전후 역사상 자민당이 집권하지 않은 두 번째의 짧은 기간 중 일어났다. 민주당의 2009~2012년 집권 시기에 일어난 재난은 개혁과 정치 교체의 필요성을 약화시켰다. 전 민주당 의원 나카바야시 미에코는 “원자력 정책은 수년간 자민당이 시행했지만 재해에 대한 책임은 민주당이 져야 했다”고 말했다. “재난 이후 국민들은 일본의 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 안정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11: 일본의 재난과 변화(3.11: Disaster and Change in Japan)》의 저자인 리처드 사무엘스는 “변화가 있긴 했지만, 기대에 부응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새로운 규제 기관이 원자력 산업에 더 엄격한 감독을 적용했고 대중적인 의견도 회의적이었음에도 자민당은 여전히 원자력을 고집했다. 재난 대비책은 개선됐으나 3.11 대응을 저해했던 문제들, 즉 무력한 중앙 권한, 부처 간 조정 부재, 열악한 커뮤니케이션, 관료주의의 경직성은 계속되고 있다. 자민당이 재집권하고 민주당이 와해됨에 따라 정치적 추진력은 사라졌고, 무관심이 시작되었다.

지진과 쓰나미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두 지역인 미야기현과 이와테현은 대체로 회복됐다. 후쿠시마현은 고전해 왔다.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없다. 코와타 마스미의 남편의 가족들은 원전 옆 두 마을 중 하나인 오쿠마에서 200년 이상 감을 재배하고, 비단을 짜고, 사케를 빚으며 살아왔다. 이 지역은 현재 ‘귀환 곤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지도 참조). 일반적으로 안전하다고 간주되는 수치보다 50배 많은 방사선이 방출되는 곳이다. 재난 이전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잠깐 방문할 수는 있지만, 하룻밤을 묵을 수는 없다. 오쿠마의 시의원인 코와타 마스미는 그렇게 집에 들렀다가 거실에서 “이 집의 왕처럼 가족들의 옷을 입고 있는” 원숭이를 발견했다.
후쿠시마 대피 구역, 2021년 기준/ 회색- 대피 명령 해제, 붉은 색 - 귀환 곤란 구역/ 출처: 후쿠시마현청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염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아니다. 현 내 토지 면적의 2.4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만이 거주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인구의 2.1퍼센트인 3만 6811명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인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한 명이다. 해당 지역의 암 발병률은 급등하지 않았다. 대부분 현의 주변 방사선은 일본 및 전 세계의 다른 도시와 비슷한 수준이다. 건강상의 위험은 재난의 여파로 우려되었던 것보다 훨씬 덜 심각하다.

돌이켜 보면, 공중 보건에 가장 큰 해를 끼친 것은 혼란스러운 대피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후쿠시마현에서는 2317명이 의료 시스템 붕괴나 자살로 사망했다. 지진, 쓰나미, 원전 사고로 사망한 1606명보다 많다. 일부 연구자들은 정부가 대규모 대피 명령을 아예 내리지 말거나, 몇 년이 아닌 몇 주로 제한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사능의 보이지 않는 위협에 직면해 공포에 차 있는 사람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거나 빨리 돌아오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원전 사고는 전문가들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재해 이후 수개월 간 공무원들의 투명성 부족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만들었다.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우리는 자체적으로 데이터를 얻기로 결정했습니다.” 원전 북쪽에 위치한 도시 미나미소마의 여관 운영자이자 방사선 감시자인 고바야시 도모코가 말했다. 수년 뒤 정부가 대피령을 해제하고 해당 지역 주민들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중단했을 때에도 일부 시민들은 이를 안전하지 않은 환경으로 시민들을 강제 귀환시키려는 조치로 보고 항의했다. “방사능에 대한 민감도는 사고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정책의 문제로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재난 이후 설치된 정부 자문 위원회인 부흥 구상 회의의 이이오 준은 말한다. “보다 감정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 정부의 재건 노력은 기반 시설 구축과 토지 오염 제거에 집중됐다. 그래픽으로 가득한 공식 프레젠테이션은 재건된 도로와 철도를 보여 준다. 계획된 공공사업의 96퍼센트가 완료됐다. 수백만 세제곱미터의 방사능 오염 토양을 포함한 수백만 톤의 쓰레기가 제거됐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회복은 잘 진행되고 있다. (2020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올여름까지 연기된) 도쿄 올림픽 개최는 지역 재생의 절정이 될 것이다. 정부는 대회를 ‘부흥 올림픽’으로 홍보해 왔고, 2011년에 재난 구호의 거점이 되었던 후쿠시마의 경기장에서 성화 봉송을 시작할 계획이다. 성화는 오쿠마, 이이타테, 미나미소마를 거쳐 도쿄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복구에 대한 강조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3.11 당시 미나미소마의 시장이었던 사쿠라이 가쓰노부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은 회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상실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후쿠시마 주민들의 우울증과 불안 장애 비율은 전국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당뇨와 고혈압 같은 질병이 더 흔해진 것은 계속되는 불안과 혼란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족들과 헤어지고 생계 수단을 잃었다. “진짜 회복은 건물을 짓는 것, 물리적인 것들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코와타 마스미가 말했다.

“이 기반 시설들은 실제로 누구를 위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사쿠라이 가쓰노부는 물었다. 재난 후 대피 명령을 받은 이들 중 상당수나 자진해서 대피한 사람들 모두가 지역을 떠나 있었다. 대피령이 내려진 지역에서는 인구의 4분의 1 정도만이 돌아왔고,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일본의 다른 농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후쿠시마현의 인구는 재난 이전에도 9년간 평균 10만 명 줄어들며 감소하고 있었지만, 3.11이 감소세를 가속화했다. 그 후 9년간 인구는 연평균 18만 명씩 줄었다(표1 참조).
귀환의 공포/ 일본, 인구, 2010년을 100으로 환산/출처:일본 통계청
지역 사회 재건은 도로 재포장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후쿠시마 재생회의 타오 요이치는 “지난 10년의 과정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제야 마을이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노력의 초점은 이전 거주자들의 귀환에서 새로운 거주자 유치로 옮겨 갔다. 성과는 있었다. 한 무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이이타테의 주민 센터 근처에 있는 버려진 학교를 스튜디오로 개조했다. 미나미소마에서는 기업가 와다 도모유키가 공유 사무실과 소기업 인큐베이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파트너들은 대부분 사무에 얽매인 도시 생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해 온 새 이주민들이다.

하지만 진보는 더디다. 와다 도모유키는 2014년 오다카 워커스 베이스(Odaka Worker’s Base)를 개장하며 100개의 새로운 사업체를 지원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었다. 현재까지 15개의 상점이 운영되고 있다. 정부는 연구 개발 센터들이 모인 후쿠시마 ‘혁신 해안’의 첨단 기술의 미래를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재난 구호나 원전 폐로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후쿠시마현 우치보리 마사오 지사는 폐로 자체가 “미래에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말한다. 3개의 원자로에서 나온 잔해 중 방사능이 가장 강한 900톤의 용해된 연료의 제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원전을 소유하고 있는 도쿄전력(TEPCO)은 잔해물 청소에 30~40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낙관적인 전망일 수 있다. 지난해 사고 이후 신설된 원자력 규제 위원회(NRA)는 2개의 원자로 위에 설치된 임시 덮개에서 검출된 방사능 수치가 예상보다 높다고 보고했다. 이는 폐로를 위한 계획을 복잡하게 만든다. 지역 곳곳의 검은 자루에 담겨 쌓여 있는 오염된 토양도 여전히 처리되지 않고 있다. 올해 그 자루들은 ‘귀환 곤란 구역’의 ‘중간 보관 시설’로 옮겨지고 있다. 이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에 폐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법적으로 오염된 토양은 2045년까지 현 밖으로 내보내야 하지만 정부는 옮길 장소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원전으로 스며들거나 핵연료 냉각에 사용되면서 발생한 오염수다. 이미 100만 톤이 넘는다. 저장 공간은 내년에 고갈될 것이다. 도쿄전력은 방사선 물질인 삼중수소를 거르기 위해 오염수를 여과한다. 일본 정부는 전 세계 원자력 발전소의 표준 관행에 따라 처리된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려 한다. 그러나 어민들과 농민들은 그 때문에 사람들이 지역 생산물의 구매를 꺼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활동가들은 수조 탱크들의 오염수에 알려지지 않은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고 걱정한다. 수년간 오염수에 삼중수소만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해 온 도쿄전력은 2018년에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오염수의 대부분을 다시 여과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후쿠시마 공중 보건을 확신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했다. 후쿠시마산 식품의 선별 과정은 철저하고 안전 기준은 높다. 정부 기관인 후쿠시마 농업 기술 센터는 하루 100~200개의 표본을 검사한다. 고무장갑을 착용한 근로자들이 복숭아, 버섯, 쌀을 분쇄해 방사능 검출 장치에 투입한다. 마지막 증가 수치는 6년 전에 측정됐다. 독립적 감시자들 또한 지역 식품이 안전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여전히 후쿠시마산 상품은 대체로 다른 지역의 상품보다 저렴하게 거래된다.

지속적인 불신은 원자력으로 확대된다. 3.11 이전에는 3분의 2 이상의 일본인들이 원자력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확대하기를 원했다. 정부는 금세기 중반에는 원자력이 일본 전력의 절반을 생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현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자민당 총리, 재난 당시 총리였던 간 나오토 등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반대하고 있다. “저는 일본의 기술자들이 매우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인재가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죠.” 간 나오토가 말했다. “제 생각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원자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2012~2020년 재임한 아베 신조 총리가 열의를 보였지만, 재임 기간 대부분의 원자로에 대한 안전 점검이 엄격해지면서 일본의 화석 연료 의존도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표2 참조). 현재까지 일본의 54개 원자로 중 9개만 재가동이 허용됐다. 그 원자로들은 지난해 일본 전력의 겨우 6퍼센트를 공급했다. 나머지 원전의 절반 가까이는 폐쇄될 예정이고, 다른 절반은 다양한 형태의 행정적 혼란에 빠져 있다.
원자력은 방사능이다/일본, 발전 방식에 따른 전력 생산 비율, 단위: %/ 출처: 아우어 월드 인 데이터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2050년까지 일본을 탄소 중립국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더 많은 풍력과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하려 하는 동시에 쉬고 있는 원자로들의 재가동을 추진하고 있다.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도쿄에 위치한 일본 에너지 경제 연구소의 도요다 마사카즈 소장은 주장한다. 몇몇 도시들은 원전 재개를 희망하고 있다. 일본의 기준 규제 수명인 40년 이상이 된 원전의 재가동을 승인한 첫 번째 지역이 된 다카하마시의 노세 유타카 시장은 “5~6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우리가 경제 성장 측면에서 어디까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원자력 산업은 3.11로부터 교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도쿄전력은 문제의 보고를 막는 완벽주의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도쿄전력을 비롯한 다른 전력 회사들은 새로운 방조제, 여과 시스템 및 기타 안전장치의 구축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지방 정부는 적절한 대피 계획을 세웠다. “후쿠시마 이전에는 정부 관계자들이 대피 계획을 세우면 필연적으로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 가정했기 때문에 아무도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 노세 유타카 시장은 말했다. “이제는 계획이 있습니다.” 도쿄전력의 아네가와 다케후미는 위험의 존재가 기술을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고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우리에게 불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불로 인해 목숨을 잃지만, 우리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반핵 운동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지진 활동이 활발한 나라 중 하나인 일본에서 원자력을 사용하는 위험은 금지되어야 할 만큼 크다고 주장한다. “사회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위험은 그런 것입니다.” 환경 단체 그린피스의 숀 버니가 말했다. 후쿠시마의 많은 사람들은 갑작스레 원자력을 기후 친화적 에너지로 평가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본다. “우리는 기후 재앙과 핵 재앙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후쿠시마 지역의 반핵 운동가인 무토 루이코는 말했다.

반핵 운동가들은 재생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3.11 이후 정부는 재생에너지 장려금을 도입하고 전력 시장을 자유화했다. 현재 재생에너지가 일본 전력의 20퍼센트 이상을 공급하고 있지만, 지역 소매 독점 기업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지역 간의 연결이 강화됐다면 점유율은 더 높았을 것이라고 지속 가능 에너지 정책 연구소의 이이다 데쓰나리는 주장한다. 그는 거대 전력 회사가 전력 발전과 송전을 별도의 단위로 관리하도록 한, 작년에 시행된 개혁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역 공공 사업체 직원들은 여전히 동일한 명함과 이메일 주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송전망은 좀 더 독립적으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지난해 말 발표된 계획에 따르면 2050년에는 50~60퍼센트의 전력이 재생에너지로 생산될 것이다. 탄소 포집 기술이 적용된 원자력 혹은 화석 연료 발전소가 나머지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산업성이 새로운 에너지 발전 3주년 전략을 내놓는 올여름에 더 선명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가지야마 히로시 경제산업상은 원자력에 더 큰 지지를 표명했다. 몇몇 원전의 재가동이 석탄 화력 발전소의 빠른 폐쇄를 의미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 기반의 일본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원자력 발전에 반대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새로운 원자로의 건설은 훨씬 까다로울 것이다.

어느 경우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결함 감지와 수리를 막은 원인이었던 공공 사업체의 느슨함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된 원자력 규제 위원회가 감독을 맡게 될 것이다. 후케타 도요시 위원장은 “우리는 에너지 정책 논의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정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주의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원자력 규제 위원회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3.11 이후 계속되어 온 큰 변화는 기관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의 상실이다. PR기업 에델만의 연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재난 이전 51퍼센트에서 재난 이후 25퍼센트로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37퍼센트다. “핵심적인 문제는 신뢰의 상실입니다.” 재난 이후 방사능 감시를 위한 독립적인 노력에 앞장섰던 도쿄 기반 NGO 세이프캐스트(Safecast)의 애즈비 브라운은 말했다. “신뢰는 재생 가능한 자원이 아닙니다. 한 번 잃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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