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이라는 ‘문제’
온라인 힙합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많이 받고 싶다면 아이돌 래퍼인 빅뱅의 지드래곤이나 방탄소년단의 랩몬스터, NCT의 마크 등을 언급하면 된다. 혹은 쇼미더머니에 나가는 래퍼를 비난하는 것도 좋다. 소위 ‘진정한 힙합 팬’을 자처하는 힙합 커뮤니티 이용자에게 이보다 뜨거운 논란거리가 있을까. 무엇보다 이 두 가지 논란거리는 공유된 상상을 근거로 한다.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진정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한국 힙합을 흔히 ‘국힙’이라 부른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힙합 음악가나 한국만의 특징이 반영된 힙합 장르를 뜻하는 신조어다. 한국 힙합이 무엇인지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한국과 힙합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힙합은 미국에서 시작한, 미국적인 음악 장르의 명칭이다. 1970년대 가난과 폭력, 인종 차별에 시달리던 미국의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저항 정신을 표출하기 위해 개척한 음악 장르다. 이들이 함께 모여 흥겹게 즐기는 파티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어떠한 의미에서든 힙합은 미국적인 특수성이 분명하게 반영된 문화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힙합은 완전히 다르게 수용된다. 한국 젊은이들은 힙합을 미국의 선진 문화로, 미국에서 유행하는 세련된 문화로 인식했다. 국내 래퍼들의 인터뷰를 담은 송명선의 책 《힙합하다》(2016)에서 많은 래퍼들은 말한다. 주 한미군방송(AFKN)을 통해 힙합을 접했노라고 말이다. AFKN 은 당대 미국 문화를 그대로 전달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초중반생들은 청소년 시절 AFKN을 통해 처음 힙합 음악을 접했다. 힙합의 전설인 래퍼 투팍(Tupac)과 가장 인기가 높던 래퍼 에미넴(Eminem)에 푹 빠졌고 비보잉과 디제이 문화에 매료됐다. 1990년대는 소위 1세대 한국 래퍼들이 힙합 문화에 눈을 뜬 시기였다.
비공식 위성 방송도 힙합 전파에 큰 몫을 차지했다. 글로벌 위성방송 채널V 등은 당시 상업적으로 인기 있던 미국의 힙합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우리 안방에 실어 날랐다. 음악 차트 순위 프로그램인 ‘빌보드 US 카운트다운(Billboard US Countdown)’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미국 대중음악이 힙합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힙합은 미국만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깔린, 말 그대로 미국적인 음악 장르였다. 정확하게는 미국 대도시 흑인들의, 흑인들에 의한, 흑인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그들은 마약과 범죄를 노래하는 한편 백인 사회를 향한 분노를 거친 언어로 표현했다. 힙합을 말할 때는 갱스터 랩이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이런 힙합이 한국에 들어올 때는 전혀 다른 맥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과 차별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점철된 힙합을 소비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경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이 한국 사회에 적용됐다. 힙합은 중산층 중심의 문화로 변형되기 시작했다.[1]
1996년 헌법재판소가 음반에 대한 사전 심의를 폐지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폭력적인 가사가 담긴 음반이 정식 수입되기 어려웠다. 외설적인 표현과 욕설이 들어간 힙합 음악은 당연히 심의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위성 방송을 보거나 서울 중심가에서 암암리에 수입된 음반을 구입해야만 했다. 이러한 소비를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문화적, 경제적 자본이 필요했다. 실제로 한국 힙합 1세대로 알려진 음악가들은 강남의 중산층 집안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되는 교포 출신도 적지 않았다. 특히 방송을 매개로 힙합을 대중문화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음악가 가운데 다수는 교포 출신이었다.[2]
이들의 음악은 물질적 쾌락주의를 표방하고 하층 계급의 분노와 차별, 억압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미국 힙합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의 불안이나 사랑 문제를 다루는 등 주제적 변화가 불가피했다. 힙합은 저항의 장르라기보다는 아이돌 음악, 양산형 음악보다도 트렌드에 민감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이 선호하는 장르로 인식됐다.
그러나 방송이 아닌 인디 문화 안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용자 가운데 몇몇이 중산층 출신의 세련된 음악, 방송 출연과 연예계 진출보다는 인디펜던트 정신에 충실한 음악을 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힙합의 인디펜던트 정신 혹은 언더그라운드 정신은 곧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이들은 상업적인 의도로 음악의 순수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믿으며, 대형 기획사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 또한 거부했다. 한국말 랩에 대한 의지도 드러냈다. 상업 힙합과 언더그라운드 힙합, 이 두 가지 흐름의 충돌 속에서 현재 한국 힙합의 진정성 담론이 시작됐다.
한국 힙합은 한국말 라임이 가능한가라는 기술적인 문제와도 맞닥뜨렸다. 한국 대중음악은 주로 끝말의 운을 맞추는 라임 배치를 채용해 왔는데, 1997년 아이돌 음악이 전성기를 맞으면서부터는 그룹 내 라임을 담당하는 래퍼가 한 명 이상 배치되기도 했다.[3] 그러나 단순한 라임 체계를 비판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았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2013년 본인의 트위터 계정에 한국말 라임은 부자연스럽게 들린다는 글을 올려 한국말 라임 논쟁이 다시 한 번 불거지기도 했다.
래퍼에게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한 마디에 들어가는 가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랩의 특성상 라임은 리듬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말 라임에 대한 비판 역시 래퍼를 향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래퍼 버벌진트가 다음절 라임 방법론을 제시한 이후, 한국말 라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상당 부분 잦아들었다. 다음절 라임이란 끝말을 맞추거나 특정 단어를 반복하는 형태를 벗어나, 다수의 음절에서 유사한 모음을 이용해 청각적으로 익숙하게 들리는 효과를 말한다. 예컨대 버벌진트의 곡 〈오버클래스(Overclass)〉에서 “어서 그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서 크기를 바랐어. 그러나 이 문화는 덧없는 언쟁과 함께 무너져 갔어”라는 가사가 이에 해당한다. ‘어서 그 저개발~바랐어’ 와 ‘덧없는~갔어’에 적용된 리듬감이 바로 다음절 라임이다.
억지 라임이나 영어를 사용한 라임을 문제 삼는 시각도 있다. 이는 힙합과 알앤비 장르를 다루는 웹진 ‘리드머(Rhythmer)’의 평론가들이 음반 평가 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한영 혼영 여부를 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으로 래퍼 더콰이엇의 앨범 평에는 항상 ‘과도한 한영 혼영’이라는 말이 따라다니고 이는 별점을 깎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현재 힙합 소비층에게 랩 가사의 한영 혼용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래퍼 빈지노가 영어 발음을 흘려 한국어와 라임을 맞추는 것에 환호한다. 빈지노의 히트곡 〈부기 온 앤 온(Boogie On & On)〉에는 “사이가 되어도 I don’t care at all”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빈지노는 ‘되어도’를 발음할 때 혀를 굴려 ‘care at all’ 부분과 라임처럼 들리게 한다. 반면, 래퍼 스스로 영어를 쓰지 않고 랩 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래퍼 화지와 가리온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한국말로만 랩 하는 것을 자신의 강점으로 내세운다.
현재 팬들이 지적하는 한국 힙합의 가장 큰 문제는 미국 트렌드를 따라간다는 점이다. 음악 장르 가운데 하나인 트랩(trap)이 2010년 이후 미국 힙합의 주요 장르로 떠오르면서, 거의 동시에 유사한 곡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쏟아졌다. 표절 논란도 있었지만 대개는 레퍼런스[4]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러자 미국에서 유행하는 장르를 그대로 베껴다가 한국말만 붙였다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 대응하고자 극단적으로는 힙합 비트와 국악을 결합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미국 본토 문화인 힙합에 한국 색깔을 넣어 보자는 것인데, 여기서 발생한 부조화가 오히려 힙합과 한국이란 개념에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힙합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때면 모두들 어려움을 느낀다. 어떤 이는 서양인이 한복을 입고 판소리하는 합성 사진에 한국 힙합을 빗대어 폄하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힙합 골수팬임을 자처하며 ‘리얼 힙합이 다 죽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호한 위치에 있는 한국 힙합은 다양한 논쟁거리를 양산한다.
한국 힙합 씬은 온라인이다
리드머의 평론가 남성훈은 단언한다. 우리 힙합 씬은 언제나 온라인이었다고 말이다.[5] 통상 음악 장르에서 씬(scene)이란 음악의 생산, 유통, 수용 단계에서 다양한 행위자가 공존하고 상호 작용하는 문화 장소를 일컫는다. 주로 특정 장소와 연관된 개념으로 사용되며 씬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갖는다. 미국 힙합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서부 힙합은 로스앤젤레스 중심의 갱스터 랩으로, 동부 힙합은 뉴욕 중심의 철학적 주제와 어두운 비트 등을 핵심으로 하는 올드스쿨 힙합으로 유명하다. 미국 힙합 씬에서는 같은 지역 출신의 래퍼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통된 주제 의식을 갖고 특정 음악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공유한다. 힙합 음악 초기에는 주제와 가사가 씬별로 현저하게 다르다는 주장이 강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가사나 주제의 차이가 있다고 명확히 구분 짓기 힘들어졌다.
한국의 경우 힙합 역사는 두 흐름으로 나뉜다. CB매스, 원타임, 서태지와 아이들 등 방송 플랫폼을 통해 대중성과 힙합 장르의 특성을 결합한 노래를 세상에 선보인 축과 홍대에서 힙합 클럽 문화를 형성한 축이다. 힙합 레이블인 마스터플랜은 1997년 홍대에서 회사 이름을 딴 라이브 클럽 MP를 운영하며 힙합 공연 문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마스터플랜을 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팝 칼럼니스트 이종현은 이 공간을 통해 힙합 음악이 홍대 문화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리드머의 편집장 강일권 역시 마스터플랜의 가장 큰 의의로 힙합을 아는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한 것을 꼽았다. 이에 부합하듯 마스터플랜은 정기 공연이 마무리될 즈음 관객도 무대로 올라가 프리스타일 랩 공연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6] 누구나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자연스럽게 랩을 뱉는, 자유로운 힙합 문화를 계승하고자 했다.
무대와 객석 간 거리는 지금의 공연장보다 훨씬 가까웠으며 공연자 역시 전문 가수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공연자도,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도 대부분 나우누리의 ‘SNP’, ‘돕사운즈’, 하이텔의 ‘검은 소리’ 등 PC통신의 특정 흑인 음악 동호회원 정도였다. 1세대 래퍼 김디지는 힙합 웹진 ‘힙합플레이야(Hiphopplaya)’에서 마스터플랜 공연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팀명 없이 활동하던 어느 날 한 기자가 팀 이름을 물었을 때, 그냥… PDPB요, 라고 답했는데 그 이름으로 한참 활동했다.”
홍대 클럽 마스터플랜은 4년 정도만 운영됐다. 이 시기 몇 군데 힙합 클럽이 생겼지만 곧 양현석 YG 엔터테인먼트 사장이 운영하는 대규모 클럽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한국 힙합은 이처럼 홍대 클럽을 통해 오프라인 힙합 공연의 구색을 갖췄지만, 실제 이 공간의 주요 활동가는 1990년대 초반부터 PC통신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힙합 음악 동호회원이었다. 90년대 PC통신의 성격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아니, 대중적일 수가 없었다. 일단 비용의 문제가 있었다. 4대 PC통신 중 하나인 천리안이 이용자 수 100만 명을 넘긴 것은 1997년 12월의 일이었다. 그러니 힙합 수용자 중 PC통신에 가입할 여력이 되는 몇몇만이 온라인상에서 일종의 전문가 집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세련된 미국 음악을 주도적으로 소비하는, 감식안을 가진 집단으로 생각했다.
한편 힙합 씬의 대표 구성 요소로 언급되는 거리 싸이퍼(cypher)는 아직까지 몇몇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싸이퍼란 래퍼들이 둥글게 모여 무작위로 나오는 비트에 즉흥 랩을 선보이는 것을 말한다. 다함께 어울려 실력을 겨룬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한국의 싸이퍼는 힙합 공동체를 구성한다기보다 래퍼를 꿈꾸는 이들이 자기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곤 한다. 일단 한국에는 싸이퍼만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사람이 적다. 한국의 힙합 팬들은 철저히 ‘관람하는’ 공연 문화를 지킨다.
2000년대 이후, 대부분의 힙합 수용자는 거리가 아닌 온라인에서 활동한다. 공연을 본 뒤 인터넷 게시판에 사진과 후기를 남기는 식이다. 소울컴퍼니 등 2000년대 중반 인기를 누렸던 레이블들은 싸이월드 그룹이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별도로 운영하면서 아이돌 문화의 문법과 유사하게 움직인다.
대부분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았거나, 밟고 있는 사람들이 음반과 음원을 통해 힙합을 소비한다. 힙합 팬을 자처하는 이들은 스스로 녹음을 하기도 한다. 이 녹음물도 결국은 온라인에 돌아다닌다. 자작녹음게시판, 일명 ‘자녹게’는 모든 힙합 커뮤니티에 존재한다. 힙합 음악이나 앨범에 대한 비평 역시 온라인 중심으로 유통되며, 공연 장소는 홍대 지역의 소규모 클럽보다 대형 공연장이 선호된다. 따라서 한국의 힙합 씬과 거리는 미국에서와 같은 의미로 적용되기 어렵다.
물론 ADV크루처럼 싸이퍼를 통해 홍대를 한국 힙합 문화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경우도 있고, 홍대 놀이터를 중심으로 게릴라 공연을 펼치는 래퍼들도 있다. 온라인만 씬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한쪽에 치우친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자녹게의 존재 등 한국 힙합과 관련한 대부분의 생산, 유통, 수용이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은 분명한 현상이다.
레슨, 직업으로서의 래퍼
자녹게의 존재는 래퍼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래퍼 지망생과 관련해 말 그대로 한국적이면서 기이한 힙합 문화의 한 측면은 바로 이 ‘레슨’이다. 사실 모든 예체능 교과목을 비롯해 특정 기예를 전공 삼아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경우 레슨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힙합이 레슨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항상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최근 레슨 논쟁에 불을 지핀 것은 래퍼 스윙스가 자신이 속한 소속사 SNS 계정에 올린 공고문이었다. 시기상 스윙스가 의가사 제대 판정을 받고 영리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공지한 후였던 터라 논란은 더욱 거셀 수밖에 없었다. 레슨 역시 영리 활동이라는 비판이었다.
레슨비를 받는다는 점에서 랩 레슨은 일종의 과외다. 과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에 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대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제예술대학교의 힙합 전공이 대표적으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레슨은 입시를 목적으로 하는 예체능 수업과 유사한 형태를 띤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데뷔를 위해 레슨을 받기도 한다. 이때 레슨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레슨을 통해 기예를 익히고 힙합 인맥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학원처럼 몇 과목을 패키지로 묶어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랩과 미디, 편곡 과정을 패키지로 묶는 식이다.
레슨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흔히 레슨이 힙합의 진정성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힙합은 원래 삶의 노래이며, 자신만의 기술이나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장르인데 이를 학원이나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레슨이 단순한 인맥쌓기용이라고도 비판한다. 크루에 소속원을 추가하거나 피처링을 할 때 레슨에서 만난 사람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2010년대 힙합 문화를 소비한 사람들에게 레슨은 매우 자연스럽다. 힙합플레이야 사이트의 홍보 게시판에 들어가면 다양한 레슨 홍보 게시글을 볼 수 있다. 팔로잉하는 음악가가 자신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레슨 홍보 글을 올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래퍼가 되고자 하는 비공식, 공식 교육 과정이 있다는 점은 한국에서 힙합이 갖는 위치를 생각하게 한다. 래퍼가 일종의 자격 혹은 직업으로서 위상을 갖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실용 음악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소속사와 입시 준비반이 열리는 자본주의 생태계에서 힙합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래퍼가 일종의 직업이 된 현실에서, 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 체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랩 레슨에 대한 커뮤니티 이용자의 반응은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온 것으로 보인다. 불과 4~5년 만에 랩 레슨이 성행하고 체계화되면서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해졌다. 힙합 시장이 커지고 래퍼가 번듯한 직업군으로 인정된 것도 이러한 변화에 일조한다. 이제 힙합 수용자는 랩 레슨을 직업군의 역랑 강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랩 레슨 자체가 아니라 부실한 교육 과정이나 과도한 비용 청구를 해결하는 일이다.
ADV크루 소속 래퍼인 JJK는 라이브 공연장을 대여해 자신의 랩 레슨 수강생에게 라이브 공연을 시키고 녹음, 믹싱 등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자신의 탄탄한 교육 체계에 자부심을 보이는데, 실제 이용자들도 이러한 레슨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케이블 채널 ‘엠넷(Mnet)’의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