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각성주의의 시대
2화

정치적 각성주의는 어떻게 강단과 뉴스룸과 이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나

비자유주의 진보주의는 아카데미의 강단과 언론사의 뉴스룸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정치적 각성주의는 빅테크 기업의 경영 스타일도 변화시켰다.

단어 하나를 대표 사례로 들 수 있다. “Latinx(라틴계)”는 젠더 중립적인 형용사로, 미국계 히스패닉들 중 겨우 4퍼센트만이 이 단어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2018년에 “라틴계 공동체(Latinx communities)”를 전담하는 칼럼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백악관의 보도자료와 대통령의 연설문에도 포함되고 있다. 구글의 다양성 보고서에서는 훨씬 더 포괄적인 “Latinx+”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때는 학계의 소수만이 사용했던 단어가 주류로 편입된 것이다.

새로운 어휘를 지지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 생활의 더욱 많은 분야에 사회적 동원(social mobilisation)[1]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징후이다. 사회적 동원은 정치와 언론을 관통하고 있다. 때로는 경찰의 폐지를 요구하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학교들로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1년 넘게 아이들을 교실에 들여보내지 못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교육위원회는 “백인 우월주의의 증상”이라는 이유로 학교들의 이름에서 에이브러햄 링컨과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떼어내고, 학과의 이름에서는 VAPA(시각및공연예술)와 같은 이니셜 표현을 없애느라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부분 백인이고, 교육을 받았으며, 좌파 성향인 미국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는 느슨한 아이디어들을 통해서 서로 별자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직 확실한 이름이 붙여져 있지 않다. 그것은 좌파 자유주의 정체성 정치, 사회적 정의 행동주의, 또는 간단하게 정치적 각성(wokeness) 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의 분명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종집단 사이의 불균형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구조적인 인종차별의 증거이고, 진보를 가장하는 자유로운 발언, 개인주의, 보편주의 등의 규범이 실제로는 이러한 차별을 위장하고 있으며, 언어 및 특권 체제가 해체되기 전까지는 불의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특히 명문)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들에서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몇 년 동안 발전해왔다. 캠퍼스 문화에 대한 도덕적 우려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2010년대 초반 새로운 좌파사상이 출현했을 때에도 많은 관심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학생들이 교수들이나 행정직원들, 그리고 동료 학생들의 발언을 뒤지면서 일상적인 발언 속에 내재된 경미한 억압을 의미하는 미묘한 차별(microaggression)의 증거를 찾아내기 시작했을 때도, 안일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예전에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재였던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와 같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연설하려고 했을 때 학생 활동가들이 그녀를 두고 “제국주의와 가부장제도”의 공모자라고 비판하면서 취소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집단적인 반응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안일함은 순진한 것이었다. 인권옹호 단체인 ‘개인의 교육권을 위한 재단(FIRE)’의 그레그 루키아노프(Greg Lukianoff) 이사장은 미국이 대학 캠퍼스에 대해서 “라스베이거스적인 망상”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일은 캠퍼스 내에서만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 사회정의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의 영향은 현재 언론매체에서, 민주당 내에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여러 기업들과 학교들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세 가지의 조건이 이런 토대의 마련에 일조했다. 그것은 바로 불만을 품은 학생 단체, 정치활동을 위한 지침서로 만들어질 수 있을 만큼 유연한 학설, 그리고 대학들의 유순한 학사행정이다.

가장 먼저, 풀리지 않는 사회문제들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학문적 자유에 대한 구시대의 계율(ex. 공개토론)을 진보의 장애물로 보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이 나타났다. 금융위기,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같은 비무장 흑인 남성들에 대한 경찰의 살해 등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장기적인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을 키웠다. 그러면서 신선한 답안들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루키아노프 이사장과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애지중지 하는 미국인들의 마음(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2]이라는 책에서, 테러리즘과 대불황의 그늘에서 과잉보호를 하는 양육으로 인하여, 정서적인 안전을 포함하는 안전의식이 다른 모든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우려들을 능가하는 사고방식인 “안전지상주의”를 낳는다고 말한다. 안전에 대한 한계는 더욱 커져서 탐탁지 않은 연사들을 캠퍼스에 초대하는 걸 취소하게 만들고(표1 참조), 못마땅한 내용의 교재를 읽는 것에 저항하며, 동료 학생들의 발언을 규제해야 할 정도까지 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사회적 행동(또는 “실천”)을 요구하며 수십 년 동안 학계에서 발전해 온 모호한 내용의 텍스트들을 엮어서 만든 이론 체계에 매력을 느꼈다. 1965년, 비판이론가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진보를 이뤄내기 위해서 발언의 자유를 정치적인 권리에서 박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유로우며 평등한 논의라는 자유주의의 신조를 취소하는 것”이 억압을 종식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영향은 브라질의 교육자인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그의 책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학(Pedagogy of the Oppressed)》(영어판은 1970년에 출간)에서는 마오쩌뚱이 추진한 문화대혁명의 정신에 내재된 해방의 교육학을 옹호하고 있다. 프레이리는 이 책에서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의 세계를 드러내고, 그러한 교육학의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가 변혁에 헌신할 수 있다”고 썼다.



정치적 대각성


현재 재커리 골드버그(Zachary Goldberg)와 같은 정치학자들이 정치적 대각성(The Great Awokening)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유명한 전도사들은 이브람 X. 켄디(Ibram X. Kendi)와 로빈 디안젤로(Robin DiAngelo)이다. 학자이자 활동가인 두 사람은 모두 제도적인 인종차별의 광범위한 경계를 그려낸 베스트셀러를 저술했다. 둘 다 의도의 역할은 작게 보고 있는데,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켄디의 이원론적인 세계권에서, 행동은 인종적 격차를 적극적으로 좁히기 때문에 행동하는 이들이 반인종차별주의자들이며,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이며, 인종차별주의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그의 결론이다.

디안젤로는 일상적인 언어가 가진 인종차별을 우려한다. 그녀는 만약에 억압받는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모욕적이라고 느낀다면 억압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최근에 펴낸 《착한 인종차별(Nice Racism)》이라는 책의 주제는 “백인 진보주의자들이 어째서 백인 민족주의자들보다 [흑인들에게] 일상적으로 더 많은 해악을 입히는가”이다. 그녀는 개인주의나 인종과 무관한 보편주의에 대한 열망과 같은 자유주의의 규범들을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는 권력에 대해서도, 권력 내에서의 격차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녀의 말이다.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행정직원들의 역할이 없었다면 그 영향력은 여전히 미미했을 것이다. 2000년 이후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규모는 두 배 이상 늘어나면서, 교수진과 학생들의 숫자를 앞질렀다. 사립대학들에서의 증가세는 훨씬 가팔랐다. 1975년부터 2005년 사이에 공립대학들에서 행정직원들의 규모는 66퍼센트 증가했던 반면, 사립대학들에서는 135퍼센트나 늘어났다. 인원수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소관업무도 늘어났다. 명백한 인종차별이나 성희롱뿐만 아니라, 암시적인 편견 역시 찾아냈던 것이다. UCLA는 현재 교수진이 종신재직을 신청할 때 다양성 진술서(diversity statement)를 포함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2018년, 새라로렌스칼리지(Sarah Lawrence College)의 정치학자인 새뮤얼 에이브럼스(Samuel Abrams)는 이러한 행정직원들이 오히려 교수들보다도 더 좌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이터를 공개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보다 12대 1 비율로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글로 작성한 것 때문에, 에이브럼스는 자신의 종신직을 취소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분노한 학생들의 시위에 직면했다. 그는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가들 때문에 캠퍼스 생활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싫어합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의 한탄이다. “자신에게 시위대가 몰려오는 걸 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매스컴의 대격변은 그러한 추세를 가속화시켰다. 트위터에서는 결연한 목소리를 가진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확대될 수 있고, 불안감을 느낀 중도좌파[3]는 겁을 먹을 수 있다.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Hoover Institution)의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이렇게 말한다. “소셜미디어의 무기화는 게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이 뉴욕타임스나 펭귄랜덤하우스나 구글에 이토록 쉽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셜미디어의 침공은 자유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에게 끌려 다니는 오래된 문제의 한 가지 사례일 뿐입니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은 노골적인 전체주의자들에게 끌려 다닙니다.”

트럼프의 당선은 중도파들에게는 더욱 불안감을 부추겼고, 양극단의 세력들을 더욱 극단적인 성향으로 키웠다. “극좌파 진보주의를 제외한 모든 것이 트럼프와 함께 엮여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민주당 성향) 어느 검사의 말이다. 예를 들어서, 트럼프가 멕시코 국경에 설치하려는 장벽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국경의 보안을 강화하고 무허가로 장기간 체류한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민주당의 오래된 노선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은 이민당국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에 찬성함으로써 그들의 진정성을 입증해보였다.

뿌리가 단단히 자란 사회정의 의식은 주로 명문대 출신들이 많이 상주하는 학계 이외의 기관들로 가장 쉽게 확산되었다. 이처럼 엉망인 이론체계를 흡수한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고, 그들은 영향력을 가진 일자리와 직위를 얻게 된다. 문제는 상아탑의 밖에서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편협하고 호전적인 열정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좀 더 공정해지길 바라는 유순한 욕구로 부드러워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신문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디지털 혁명은 지역 신문들을 황폐화시켰고, 새로운 온라인 전문 매체들이 왕좌에 올랐다. 흉내만 낼 줄 아는 신출내기들에 의해 뉴스룸의 풍경이 바뀌면서, 발로 뛰며 취재한 덕분에 조직 내에서 승진을 했던 글쟁이들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명문대 출신의 젊은 직원들로 대체되었다. 어느 저명한 저널리스트는 이것을 두고 “중립적인 객관성”이 “도덕적인 명확성”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구분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숙청의 충동


뉴스룸의 변화는 또한 이것이 소수자들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진정한 방법이라는 가정에 근거하여, 인구통계적 다양성을 증가시키려는 노력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쾌하다고 여겨지는 발언권을 없애려는 것이나, 윤리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을 축출하는 캠퍼스의 열기도 유입되었다. (참고로 뉴욕타임스의 사설면 편집자로 일하다가 그런 논란을 겪으며 사임한 제임스 베넷(James Bennet)은 현재 이코노미스트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번 기사에서 그는 관여하지 않았다.) 젊은 엔지니어들을 포함하여 신문사에서 보도국 이외의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사회정의라는 새로운 비전과 상충되는 콘텐츠를 제작한 것으로 간주되는 동료들에 대한 반대 활동을 더욱 활발히 벌일 수 있다.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신문사에서도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는 편집국장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질책을 받지 않았다. 적대적 저널리즘(adversarial journalism)[4]에 특화된 온라인 출간 사이트인 인터셉트(The Intercept)에서 일하는 좌파 성향의 리 팡(Lee Fang)은 ‘흑인들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단체를 지지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인터뷰한 내용을 게재했다. 그런데 그가 이 단체를 개인적으로 비판한 내용이 함께 실리면서 그는 어느 동료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사과를 요구받았다.
이 조용한 문화혁명은 민주당에도 영향을 미쳤다. 10년 전, “인종적 차별은 수많은 흑인들이 오늘날 성공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백인 자유주의자들은 약 40퍼센트였다. 오늘날에는 70퍼센트 이상이 동의한다. (표2 참조)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에 따르면, 2013년 당시 미국인들의 70퍼센트는 흑인과 백인들의 관계가 원만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42퍼센트로 떨어졌다. 백인 보수주의자들과 온건파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흑인들이 성공하려면 “특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백인 자유주의자들의 비율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보다도 훨씬 더 많아졌다. (표3 참조) 인종평등을 고취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한때 민주당 내에서도 비주류 좌파의 의견으로만 여겨졌지만, 이제는 주류적인 사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현금 보상은 민주당원들의 49퍼센트가 지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41퍼센트는 경찰 지원금 감축을 찬성한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이런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 2008년, 버락 오바마는 자신의 목사[5]가 했던 지나친 설교 내용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백인들의 인종차별이 끝나지 않는 문제이며, 우리가 미국에 대해서 옳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 이상으로 미국의 잘못된 점이 크다며, 이 나라에 대해 심각하게 왜곡된 견해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의 견해는 현재 민주당원들 사이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은 제도적인 인종차별 철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2020년, 이런 움직임은 대통령 경선에서 결정적인 단층선이 되었다. 민주당의 합의된 견해를 대변하는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조 바이든은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6]의 문제를 포함하여 오바마보다도 훨씬 더 왼쪽의 입장을 취하면서 승리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시절보다 사회정의에 대한 발언들을 훨씬 더 많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백인이 아닌 농부들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40억 달러의 자금을 조성하고, 기후변화 관련 투자 혜택의 40퍼센트는 예전에 혜택을 받지 못한 공동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제안과 같은 보상에 가까운 정책들을 수용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만국의 각성인들이여, 단결하라![7]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가 상아탑을 넘어 확산되고 정치적 유명세를 얻으면서, 그러한 이념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더욱 중요해진다. 그것은 순수성과 효력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희석될 것인가?

기업계는 거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기업들, 특히 지식경제(knowledge economy) 분야의 업체들은 젊은 직원들이 변화를 요구하고 각성한 소비자들이 보이콧의 위협을 제기함에 따라, 사회정의 의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문제를 두고 고심을 해왔다.

다양성을 높이는 것과 이윤 추구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영 컨설팅 업체인 베인앤드컴퍼니(Bain & Company)의 최고다양성책임자인 줄리 코프먼(Julie Coffman)은 이렇게 말한다. “다양성을 대변하는 것이 수익성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수많은 것들이 결국엔 되돌아와서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McKinsey)는 인종 및 젠더 다양성이 뛰어난 기업들일수록 재무적으로 뛰어난 실적을 거둘 가능성이 더욱 높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플로이드의 살해 이후, 미국 기업들은 고용 및 조달에 있어서 평등성과 관련된 수많은 입장문을 발표하고 엄청난 할당량도 제시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대기업인 페이스북은 경영진의 위치에 흑인들을 30퍼센트 더 채용하겠다고 약속했고, “2023년 말까지 자사 노동력의 50퍼센트는 과소대표되는 공동체들에서 채용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소매체인점 타깃(Target)은 2025년 말까지 흑인들이 소유한 기업들에게 2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다른 소매 대기업인 월마트는 인종평등센터(Centre for Racial Equity)를 수립하면서, “제도적인 인종차별 유발 요인을 시정하기 위해” 1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대학 스타일을 혁파하지 않고 평등의 언어를 도입하는 건 어려울 수 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Z 세대나 젊은 밀레니얼 세대가 조직을 운영하는 베이비붐 세대나 X 세대를 상대로 벌이는 집단 전쟁입니다.” 안토니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Antonio García Martínez)의 말이다. 그는 5년 전에 펴낸 자서전에서 여성혐오적인 표현들이 발견된다며 2000명의 직원들이 탄원서를 돌린 끝에, 지난 5월 애플에서 해고되었다. 코인베이스(Coinbase)의 대표인 브라이언 암스트롱(Brian Armstrong)이 직장 내 행동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처럼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수많은 CEO들로부터는 수많은 칭찬의 메시지를, 그리고 대중들로부터는 어마어마한 비판을 받았다.

전직 생명기술 회사의 임원이자 《각성 주식회사(Woke, Inc.)》의 저자인 비베크 라마스와미(Vivek Ramaswamy)는 이렇게 말한다. “기업의 각성주의는 사회정의 추구라는 형태와 결합된 이기적 타산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술 대기업들이 기업의 각성주의를 추구하는 이유는 사회정의를 포용하는 것이 인재 채용이나 소비자들에 대한 매력 발산의 차원에서 모두 그러한 기업들의 상업적 이해와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적인 비판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정체성 정치학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많은 기술 대기업들이 진보적인 좌파로 방향을 돌리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새로운 좌파가 그들의 독점 권력에 대해서는 못 본 체 하고 지나가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선은 점점 더 만연해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소재의 기술 대기업인 세일즈포스(Salesforce)의 설립자는 도시의 노숙인 서비스에 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누진 소득세와 같은 사회정의의 명분을 옹호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회사는 2020년에 벌어들인 26억 달러의 수익에 대해서 연방세(federal tax)를 내지 않았다.

미래에 유명해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각성의 다음 개척지는 교실이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최근에 고등학교 졸업을 위한 필수과목이 될 수도 있는 인종학 커리큘럼을 승인했는데, 그 중에 한 단원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성공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고착화 시키는) “모범 소수자 신화(model minority myth)[8]를 떨쳐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가가 제안한 새로운 수학 교육 계획안의 약 6분의 1은 사회적 정의에 전념하고 있다. 이 계획안들은 남아 및 여아들이 스카프를 뜨개질 하는 것에 대한 언어적인 문제들이 젠더 규범에 대한 논의에도 동반된다는 사실을 제안하는 연구들을 인용하고 있다. 지난달 오리건의 주지사는 2014년까지 고등학교 졸업 요건에서 읽기, 쓰기, 수학을 없앤다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러한 결정은 비백인 학생들에 대한 형평성을 증진시키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각성인가 아니면 약화인가?


이러한 제안들은 새로운 좌파가 받아들인 일부 이론들을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암시한다. 불평등이라는 것은 대체로 명백한 차별의 결과로 이론화되기 때문에, 시스템을 해체해야 한다. 이는 이상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수학 과목에서의 인종간 점수 격차는 (수학시험을 아예 없애는)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개선될 수 있고, 모두에게 읽기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읽기 능력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가난한 지역과 학교에서의 지속적인 분리 등 옛날 좌파들이 신경 썼던 물질적인 조건들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일부 역풍의 조짐도 보인다.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의 위원장을 포함하여 세 명의 위원들은 주민소환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 도시의 급진적인 지방검사(DA)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부 학계의 의심스러운 아이디어들과 그로 인한 세대교체 등) 그것의 근본적인 엔진은 꺼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아직 절정의 각성에 이르지 못했다.
[1]
정치적인 논쟁에 대중들이 동원되는 현상
[2]
한국어판 제목은 <나쁜 교육,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프시케의숲, 2019
[3]
이코노미스트는 스스로를 중도좌파라고 천명하고 있으며, 지난 2019년의 영국 총선에서도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s)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었다.
[4]
취재 대상의 반대 입장에 서서 공격적인 스타일로 사안을 파헤치는 것
[5]
제레미아 라이트(Jeremiah Wright)
[6]
민족, 인종, 종교, 젠더 등의 집단성을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정치적 입장
[7]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패러디한 표현
[8]
아시아 인종들은 똑똑하고 사회에 동화도 잘 하며 스스로 성공한다는 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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