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이것은 모욕이자 침해였다. 지난 12월 21일, 그는 군 장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행동은 우리의 문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태연하게 보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의 발언은 다소 과장이 심하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상당 기간 우크라이나와 접한 국경으로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곳에 배치된 약 10만 명의 병력은 냉전 이후 유럽에서 최대 규모에 달하는 전력 증강이었다. 그렇게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든 채로, 그는 12월 17일에 미국과 나토 사이의 조약 초안과 같은 형태로 러시아의 안보에 대한 ‘법적인 보장’을 요구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나토가 동유럽, 캅카스(Kavkaz),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퇴각할 것과 함께,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춘 러시아의 세력권 창설을 주장했다.
그들이 작성한 조약의 초안에서 몇 가지의 조항을 살펴보면, 나토와의 조약에는 나토가 더 이상의 확장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구소련에 속했던 비회원국들과는 어떠한 형태로든 군사적 공조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상호 간의 어떠한 조치에서도 구속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토가 동유럽에 있는 회원국들 영토에 병력을 파견하거나 무기를 배치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조항에는 러시아가 2014년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크림반도를 합병한 이후에 나토가 폴란드와 발트해 국가들에 파견한 병력의 해산도 포함될 것이다. 미국과의 협약에는 유럽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철수시킨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만, 전술 핵무기에 버금가는 러시아의 가공할만한 무기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요구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많은 관측통들조차도 깜짝 놀랐다. 러시아의 대표적 신문인 《코메르산트(Kommersant)》 엘레나 체르넨코(Elena Chernenko) 기자는 다음처럼 재치 있게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 새해 선물로 제게 살아 있는 유니콘을 주세요.”[3] 싱크탱크인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Carnegie Moscow Centre)의 소장이자 전직 육군 장교인 드미트리 트레닌(Dmitri Trenin)은 민감한 협상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런 요구가 매우 신중하게 제시되는 것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러시아도 그들의 제안이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에 정통한 연구자들도 러시아가 보여준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긴박함에 놀라면서도, 그것이 끈기 있는 외교에 대한 의도를 내비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지난 12월 31일,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Sergei Lavrov) 외무장관은 이렇게 경고했다. “합리적인 시간 내에 건설적인 응답이 없다면, 러시아는 우리의 안보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푸틴 대통령의 의도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은, 서방이 그가 요구한 지나친 요구들을 묵살함으로써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빌미를 제공하는 걸 계산했다는 것이다. 최근 몇 주 동안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미국의 용병들이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 대한 화학 무기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끔찍하면서도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해왔다. 참고로 돈바스는 러시아의 대리인들이 점령하고 있다.
사용 후 해동
싱크탱크인 CNA 소속 마이클 코프먼(Michael Kofman)에 의하면, 유럽과 러시아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아직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위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는 작전 개시 여부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한다. 10만 병력이 침공을 위해 무한정 대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원래 기지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온 군인들이며, 따라서 차량 정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기가 저하되지 않은 채 무기한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얼어붙은 영토는 3월이 되면 녹기 시작하기 때문에, 탱크로 진격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징집되어 온 군인들은 4월이 되면 경험도 없는 신병들로 교체된다.
그런데도 미국이 회담 개최에 동의했던 이유는 푸틴 대통령에게 외교적 해결책이 고갈되었다고 주장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푸틴의 외교 정책 보좌관인 유리 우샤코프(Yuri Ushakov)는 지난 12월 30일 진행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통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하고 유의미했으며, 상당히 건설적이었습니다. 미국 측이 러시아가 우려하는 것의 논리와 본질을 이해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1월 10일에는 제네바에서 양국의 외교관들이 만난다. 이틀 뒤에는 브뤼셀에서 나토-러시아 위원회(NRC)가 몇 년 만에 만나게 되며, 1월 13일에는 러시아 및 나토의 모든 회원국이 포함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비엔나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처럼 순식간에 몰아치는 외교 일정은 테이블 상석에 앉고자 하는 푸틴 대통령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론이고 불만을 토로할 기회도 주게 된다. 그러나 회담만으로는 푸틴 대통령의 욕구를 해소해주지 못할 것이다. 지난 12월 27일 러시아의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이렇게 경고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논의는 서방의 일 처리 방식이며, 그것이 얼마나 악명 높은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외교적 승리의 결과물로 제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워싱턴에 있는 케넌연구소(Kennan Institute)의 매튜 로잔스키(Matthew Rojansky)는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그동안 유럽 안보에 있어서 관습적으로 걸림돌이 되어왔던 장애물을 우회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두 가지 영역에서 잠재적으로 협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나는 미사일 감축이고, 다른 하나는 재래식 무기의 축소에 관한 것이다.
미사일은 논의의 시작점으로 적절하지 않아 보일 수 있다. 2019년 미국은 사거리 500~5500킬로미터 사이의 지상 발사 미사일을 금지하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을 탈퇴했다. 당시 미국은 러시아의 신형 미사일이 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나토는 그러한 무기의 사용을 중단했다는 러시아 측의 해명을 거듭해서 일축했고, 러시아가 이미 해당 무기를 배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러시아 측은 미국이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구축하고 있는 미사일 요격 시스템이 공격용 미사일 발사 기지로 용도가 변경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과 러시아는 합의의 기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늘 그렇듯 만약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동유럽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다면, 모스크바를 불과 몇 분이면 타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푸틴 대통령이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에 배치한 순항 미사일도 베를린을 빠르게 공격할 수 있다. 만약 협상에서 그런 미사일을 미국이 유럽에서는 쓸 수 없지만,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상대로 배치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INF가 지역적인 형태로나마 부활하는 것이며, 양측 모두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미사일에 대해 다루기가 힘들다면, 재래식 무기 통제에 대하여 논의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양측은 모두 오랜 불만 사항들을 잔뜩 갖고 있다. 1999년에 체결된 유럽 재래식 전력 개정 조약(Adapted Conventional Armed Forces in Europe Treaty, ACFE)은 러시아가 소련에 속했던 몰도바와 조지아에서 적시에 철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방 국가들이 비난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러시아는 2007년에 해당 조약에 대한 참가를 유예했다가 2015년에는 다른 국가들이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완전히 탈퇴했다.
서방의 동맹국들은 러시아가 대규모 훈련을 사실상 소규모의 개별적인 훈련인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지난해의 자파드(Zapad)처럼 대규모 군사 훈련 시 그 사실을 사전에 통보해야 하는 규정들을 위반했다고 불평한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전투기를 트랜스폰더(transponder, 전파 송수신 장비)로 활용하고, 장거리 폭격기 비행에 대해서는 통보의 수준을 더욱 높이고, 군사 훈련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시하자는 등 지난 수년 동안 자신들이 제안한 신뢰 구축 조치를 서방이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든 내용을 아우르는 완전한 형태의 새로운 조약이 맺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나토가 러시아 인근에서의 군사 훈련을 포기한다는 것은 러시아와 멀지 않은 발트해 국가들을 잘라내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가 그에 대한 대응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고립된 자국 영토인 칼리닌그라드나 노르웨이 인근의 무르만스크(Murmansk), 폴란드와 접하고 있는 벨라루스에서의 군사 훈련 중단을 고려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RAS) 소속 세계 경제 및 국제 관계 연구소(IMEMO)의 드리트리 스테파노비치(Dmitry Stefanovich)는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훈련의 투명성을 더욱 높이고 규모를 제한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ICG)의 올가 올리커(Olga Oliker)는 상호 갈등을 자제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지로 흑해를 꼽는다. 예를 들어서 나토 국가들은 크림반도 근처에 대한 정찰을 줄이고, 대신에 러시아는 자국의 흑해 함대에 대한 활동 제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모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적극적으로 논의 석상에 앉아서 합의해야만 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러한 조치들은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이 단순히 앞으로 예정된 나토의 군사 훈련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쟁 위협을 거론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의 반감은 전반적으로 러시아가 배제된 냉전 이후의 질서에 관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 및 유럽의 동맹국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러시아의 약세를 이용해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파기했다. 그들은 1999년에 러시아의 동맹국인 세르비아에서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구소련 국가들에서 친러 성향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해 벌어졌던 이른바 ‘색깔 혁명(colour revolution)’들을 지원했다. 실제로 이번 주에도 친-크렘린 성향의 언론 매체들은 카자흐스탄의 반정부 시위가 러시아와 친분이 있는 세력을 권좌에서 축출하려는 서방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쳤다.
러시아가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다양한 약속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나토가 입장을 바꿨을 때도 그것을 기꺼이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1997년에 체코공화국, 헝가리,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라는 초청을 받았을 때도, 러시아와 나토는 나토의 확대를 러시아가 수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기본협정(Founding Act)’[4]을 체결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나토는 동유럽에 “상당한 규모의 전투 병력”을 “영구적”으로 파견하거나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는 원칙이다. 게다가 냉전 이후 미국은 유럽에서 어마어마한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유럽 국가들도 자국의 무장 병력을 대대적으로 감축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나토의 동맹국들이 러시아에 대해 가지는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푸틴 대통령은 나토의 사무총장을 만나서 “서방의 모든 동반자들의 태도와 관점의 변화”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10여 개 국가가 나토에 신규 가입한 2010년 말, 당시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 대통령도 이에 동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들 사이의 어두웠던 시기를 과거로 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 문제야
그러나 최근으로 올수록 양측의 관계가 악화한 이유는 나토의 공격성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소련 국가들이 더 이상 독자적 노선을 가는 걸 마뜩잖게 생각했던 러시아가 2008년에는 조지아를, 그리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야기된 것이었다. 러시아는 또한 지난 10년 동안 선거 개입, 방해 공작, 암살 등의 형태로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 정치적인 전쟁을 벌여왔다. 자국 내에서 푸틴 대통령은 선거를 조작하고, 반대파를 독살하고, 시민 사회를 짓밟으면서 민주주의의 숨통을 질식시켜왔다. 미국의 러시아 대사였던 마이클 맥폴(Michael McFaul)은 이렇게 말한다. “푸틴은 현재 나토의 확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민주화입니다.”
나토는 현재 러시아와의 전쟁이 초래할 모든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일 만한 배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푸틴 대통령을 달래지는 못할 것이다. 독일의 전직 외교관이며 현재는 연례 뮌헨 안보 콘퍼런스(Munich Security Conference) 의장인 볼프강 이슁어(Wolfgang Ischinger)는 이렇게 말한다. “크렘린은 나토가 가까운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가입시킬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현대화되어서 국경 너머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