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각자의 고통, 각자의 회복
‘재활(rehabilit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habilis’에서 왔는데 여러 뜻 중에서도 ‘적절한’ 혹은 ‘탄탄한’을 의미하며 복구의 어감을 지니고 있다. 즉, ‘다시 꿋꿋이 서거나, 다시 단단해지게 하거나, 단단해지는 것.’ 그렇다면 재활의 목적은 누군가를 가능한 한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것, 그게 아니라면 운동성과 독립성을 최대한 회복하는 것, 그것이 재활의 목적이어야 한다. 과거 나는 뇌 손상 재활 전문병원에서 수련의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회복의 과정은 결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고 배웠다. 대체로 리듬과 속도가 느리고 조심스럽긴 하지만, 회복의 과정은 행위이며, 행위를 하려면 참여하고, 몰두하고, 우리를 아낌없이 바쳐야만 하는 것이다. 치료할 부위가 무릎이든 두개골이든, 혹은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폐든, 혹은 뇌진탕이 일어난 뇌든, 혹은 우울증과 불안으로 위험에 빠진 정신이든, 치유의 과정은 적절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일만 한 가치가 있으며, 그 과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환자들에게 자주 환기시킨다.
고통에는 위계가 없다. 상태에 따라 어떤 그룹은 동정심이 느껴지고 어떤 그룹은 무시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실패한 연애 때문에 고통에 사로잡혀 수년간 헤어나지 못하는 환자를 경험한 적이 있다. 반면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는 부상, 통증, 존엄의 상실, 그리고 보조기구 없이 걷지 못하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환자도 있었다. 나보다 병이 가벼워 보이는 사람을 보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수도 있고, 남들은 더 힘든 상황에도 잘 대처하는 것 같은 생각에 자신을 혹독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회복을 위해 엄격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때로는 어떻게든 호전될 가능성이 있다며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가 있다. 회복이라는 말로 환자들을 안심시키지만 사실 그것은 환자의 신체적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수 주 혹은 수개월에 걸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료 현장에서 가끔 목격한다. 드물게는 여러 해 지속되기도 한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지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마치 병과 싸우려면 신체 내부에 비축된 힘에 의지해야 하니 몸이 스스로 에너지를 간직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신체 활동 인지를 조작하는 단계까지 가기 때문에 잠깐의 산책이나 계단 몇 개를 오르는 정도의 활동으로 탈진 상태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2020년과 2021년 계속해서 몰아친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이런 식으로 지속적인 피로감을 느끼는 여러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3월 발간된 학술지 《네이처메디슨》에 실린 표본집단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 환자 8명 중 1명이 4주 이상 지속되는 증상을 겪었고, 22명 중 1명은 8주 이상, 44명 중의 1명은 12주 이상 증상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호흡 곤란, 후각 상실, 두통, 피로 등이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물리치료사들은 바이러스 감염 후 피로 증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한계에 이를 때까지 조심스럽게 신체 활동을 하라고 권장한다. 한계를 시험하지 않으면 가능 영역이 좁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고, 근육은 약해지며, 환자들은 활동 후 탈진하여 드러눕는 반복적인 사이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탈진할 만큼 활동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회복의 과정은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따라서 전략도 달라야 한다. 과정이 더딘 것도 정상이고, 장기적인 질병에서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증상이 발현되는 것도 정상이다. 바이러스 감염 후 지속해서 나타나는 증상은 개인별로 매우 다를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호흡 곤란, 집중력 저하, 기억력 감퇴, 감정의 기복, 불면증, 체중 감소, 체중 증가, 극심한 피로, 근육 약화, 관절 경직, 플래시백이 주요 증상이다. 이러한 문제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내가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회복이 멈추었다거나, 악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증상은 몸과 마음이 병에 대응해서 반응하고 변화하는 증거이다. 변화가 있는 곳에 희망도 있는 법이다. 코로나19의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건네는 작은 책자가 있다. 지역 물리치료사가 쓴 것인데, 회복을 위해서는 ‘적절한 속도’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나 역시 도움을 받은 태도이다.
3. 식물의 생명력을 닮은 치유 과정
공중보건의 수련 1년 차에 나는 병이 났다. 이미 수년간 병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고, 응급의학 수련의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공동체 의사라는 새로운 역할을 위해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문제의 폭과 깊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과거 나를 괴롭히던 부비강 문제가 재발해, 눈 위쪽으로 날카로운 두통이 지속되었고, 그 때문에 기력이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기진맥진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고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렸다. MRI 검사 결과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는데, 수술 일정을 잡는 데만 수개월이 걸릴 것 같았다. 그사이에 나는 공중보건의 수련 과정을 마쳐야 했다.
나로서는 수술 날이 어서 오게 할 수는 없어도, 극도의 피로감과 스트레스에 대해서만큼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일을 완전히 멈추기보다는 주 3일 근무로 시간을 줄였다. 하루 근무하면 하루는 회복을 위해 쉬었다. 두통은 언제나 지독했지만, 근무 사이사이에 휴식하면서 원기를 회복할 시간이 많아져서 통증도 줄어들었다. 집에서 하루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근무하는 동안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수련 과정은 지연될 터였다. 과정을 모두 마치고 공중보건의 자격을 따는 데 1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일정표를 지키느라 내가 소진될 위험을 무릅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 설득했다.
두어 달 늦어지긴 했지만, 나는 공중보건의 자격을 획득했다. 날짜가 되어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고, 두통은 사라졌으며, 나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에겐 병과 더불어 살아갈 힘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업무량을 줄인 덕분에 나는 수술 날까지 만성적인 통증을 견디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후 회복의 길을 천천히 밟아나가는 데 필요한 여분의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회복을 위한 모든 의미 있는 활동은 자연스러운 치유과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서로 맞물려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항생제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균을 ‘죽인다’라고 할 수 없다. 단지 세균 군집의 성장을 억제할 뿐, 나머지는 우리의 몸이 알아서 처리하게 두는 것이다. ‘치유’를 맡은 의사는 실은 ‘성장’을 책임진 정원사에 가깝다. 실제로는 자연이 거의 모든 일을 한다. 내가 환자의 상처를 꿰맬 때도 봉합사 자체가 세포를 결합시키지는 않는다. 수술용 실은 우리 몸이 고유의 치유 작업을 하는 데 길잡이가 되어줄 격자 울타리의 역할을 할 뿐이다.
내가 수련하고 근무했던 진료소나 병동에서는 사람의 신체도 녹색의 유기적 세계의 일부라는 생각을 대개 무시하고 넘어간다. 그래서 어떤 내과 의사가 이 생각을 본인의 병원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읽고 놀라웠다. 빅토리아 스위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의과 부교수이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마지막 빈민구호소 중 한 곳에서 수년간 일했다. 그곳은 갈 곳 없는 빈민을 위한 병원이다.
자신의 저서인 《신의 호텔: 의사, 병원, 그리고 의료의 심장부 순례》에서 스위트는 중세의 치유사 빙엔의 힐데가르트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후, 회복의 목적을 보다 잘 설명하려면 힐데가르트의 개념인 ‘viriditas’, 즉 ‘녹색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사연을 밝힌다. 치유된다는 것은 나무에 생명을 주는, 바로 그 힘으로 활기를 되찾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내과 의사가 하는 일이 정비사보다는 정원사 쪽에 훨씬 가깝다고도 했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타당한 이야기이다. 아주 최근까지도 내과 의사는 식물학을 공부해야 했다. 수많은 의약품이 식물에서 유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물을 연구하는 것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뇌수막염에 걸린 나를 병원으로 응급 이송시켰던 공중보건의가 나중에 말해준 것이 있다. 1950년대에는 식물학 수업이 의대 학사과정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제약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회복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접근법 같은 중요한 문제를 우리는 잊어버린 듯하다. 병상에서 회복 중인 환자들이 녹색으로 자라는 살아 있는 무언가를 내다볼 수 있는 경우 진통제 복용이 줄어든다는 점은 이미 증명되었다. 아주 오래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인지했던 사실을 현대의 병원 설계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