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득분위별 탄소 배출 ‘비율’만이 아니라 해당 25년간의 탄소 배출 ‘절대량’의 변화와 관련해서도 분명하다. 위 도표는 소득분위를 5퍼센트씩 20분위로 나누어 1990년의 탄소 배출량과 2015년의 탄소 배출량을 비교한 것이다. 도표의 모양은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도표의 왼쪽에 있는 소득 하위 25퍼센트까지는 탄소 배출량이 25년간 전혀 늘지 않았다. 소득분위 중위층은 ‘1인당’ 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이 늘었지만, 탄소 배출 ‘절대량’의 증가는 상위 5퍼센트에서 엄청나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상위 5퍼센트의 ‘과소비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기후 위기 대응에 가장 중대한 과업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처분가능소득을 늘리면 탄소 배출이 늘어난다고 비판하는 것이 옳은지 자문해야 한다. 왜 극소수 1퍼센트, 혹은 상위 10퍼센트의 고소득자만 탄소 배출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지구 빈곤층의 탄소 배출이 25년간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것이 그들 모두가 자원순환형 생활을 했기 때문인가? 이는 그들이 극심한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오히려 ‘기후 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층의 탄소 배출은 약간 늘어나되 부유층의 탄소 배출은 크게 줄어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일 것이다.
옥스팸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5년간 소득 하위 50퍼센트 이하의 탄소 배출량이 만약 실제 배출한 것보다 2배 많았다 가정해도, 최상위 1퍼센트가 같은 기간 동안 늘린 탄소 배출량보다 적다. 바꿔 말해 소득 하위 50퍼센트의 소득이 두 배 늘어나 그것이 전부 탄소 배출량 증가로 귀결된다 해도, 그 소득 증가가 최상위 1퍼센트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분배된 결과라면 지구에 가해지는 부담은 더 적다는 뜻이다. 최상위 1퍼센트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소득 능력에 따라 폭넓게 과세한다면, 부유 정도에 따라 과세가 차별화될 것이고 지구에 가해지는 부담은 훨씬 더 적어질 것이다. 이것이 기본소득의 과세 방식이다. 결국 기본소득은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주의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전제다.
물론 기본소득 지급만으로 지구 전체의 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원래 ‘배출 제로(zero emission)’를 위한 정책이 아니므로 그걸 못하는 것이 기본소득의 결점일 수는 없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소득 불평등을 개선하는 것이 바로 탄소 배출을 개선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본소득 지급으로 실질적 자유가 증대하게 되면 환경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도 중요하다. 인도네시아의 저소득층이 생계를 위해 삼림을 남벌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현금 지급 정책을 실시했더니 삼림 남벌이 30퍼센트가량 줄어들었다는 보고가 있다. 빈곤층의 환경 파괴 행위가 있다면 그 원인은 대부분 빈곤이다. 빈곤과 싸우는 길이 지구를 지키는 길이다.
탈성장과 기본소득
‘탈성장’을 처음 제시한 앙드레 고르츠는 기본소득이 탈성장의 중요한 요소임을 직시했다. 탈성장이 무엇이기에 기본소득과 연결되는 걸까? 탈성장은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다. 혹은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과격주의로 오독되기도 한다. 성장이라 하면 보통 GDP 성장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탈성장을 곧 GDP 감소로 생각하고 공포를 느끼는 경우도 많다. 정말 그럴까? 오독은 GDP에서부터 시작한다.
“탈성장은 GDP를 줄이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경제의 물질과 에너지 처리량을 줄여 생명 세계와 균형을 이루도록 되돌리는 것, 그러면서 소득과 자원을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사람들을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시키며, 사람들이 번영하는 데 필요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 탈성장 경제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4]
국내 총생산 GDP은 오랫동안 성장주의 도그마를 유지하는 도구가 되어 왔다. GDP의 전신은 국민 총생산 GNP이다. GNP를 1934년에 개발한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대공황을 겪으며 하나의 숫자로 경기 변동을 표현할 방법을 구하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GNP를 복지를 측정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창시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GNP가 증가하면 마치 국민의 삶이 개선되는 것 같은 지배적 관념이 형성됐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 미국은 GNP를 GDP로 바꾸었는데, 우연의 일치치고는 절묘하다. GNP가 GDP로 바뀜에 따라 ‘초국’적 기업이 구공산권이나 개발 도상국에서 영업을 했을 때, 그 성과가 그 나라의 국‘내’총생산으로 잡히면서 그 나라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것 같은 수치적 착각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이것 외에도 GDP는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일단 가치 판단이 부재하다. 이혼을 많이 하고 전쟁이 빈발하고 범죄가 발생하고 환경 파괴가 일어나면 GDP가 증가한다. 게다가 가사 노동과 자원봉사 활동 등 시장에서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비非시장 노동은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수치에 잡히지 않는다. 또한 GDP는 소득 분배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는 GDP가 측정하는 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GDP 증가가 갖는 의미가 그렇다면, 애초에 GDP 감소도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성장은 GDP 감소가 아니며 세상의 작동 원리를 바꾸는 아이디어다. GDP 감소는 환경적 압력이 감소하는 신호는 될 수 있지만 지속 가능성에 대한 어떤 정보도 되지 못한다. 또한 GDP 감소는 사회 진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GDP 대신 대안적 지표를 개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단 하나의 대안적 지표를 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삶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여 다양한 생물·물질적 지표(에너지 소비량, 생태발자국 등)와 사회적 지표(건강, 노동 시간, 빈곤율 등)를 연계할 수밖에 없다.
2010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생태적 지속성과 사회적 공정을 위한 제2차 탈성장 회의’에서는 탈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 제시됐다. 커먼스, 즉 공동자산의 확대, 지역 화폐 도입과 불환 지폐의 폐지, 노동 시간 단축과 자원 활동의 확대, 빈집 이용과 공동 주택의 확대, 기본소득과 최고소득, 천연자원 개발의 제한과 생물학적 다양성 확보, 쓰레기 줄이기, 메가시티 반대, 자동차 중심 도시에서 자전거·걷기 도시로의 전환, 공공장소의 광고 금지 등이 그것이다. 기본소득은 최고소득(특정 소득액을 초과한 구간에는 세율 100퍼센트를 부과하는 방안)과 함께 탈성장의 조건으로 제시되었다. 최고소득이 함께 시행되면 기본소득 수령자와 소수 ‘갑부’로 구성된 신종 계급사회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소득 바닥(income floor)’, 최고소득은 ‘소득 천장(income ceiling)’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사실 기본소득이 세계적으로 언급되는 것 자체가 성장주의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다. 성장의 과실 분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임금 상승이 보장되던 시대에는, 노동자는 성장을 위해서 열심히 노동할 것이 권장되었다. 성장주의와 노동주의의 결합은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다르지 않았다. 다만 분배의 룰을 정함에 있어 자본주의는 노동조합의 투쟁이 상수였고, 공산주의는 국가가 룰을 정해준다는 것이 달랐을 뿐이다. 기본소득은 소득과 노동의 연결고리를 끊어 ‘성장과 소득 보장의 성스럽지 못한(unholy)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시작이다.
성장주의가 저물면서 기본소득이 대두되었다면, 역으로 기본소득은 분배를 개선하고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여 성장주의를 약화한다. 전체 파이의 분배가 불평등할수록 파이 자체를 키우려는 성장주의의 유혹이 커진다. 성장의 부스러기라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이를 크게 만들려는 경제는 생태적 임계점에 도달하는데, 그 증거가 기후 위기다. 따라서 앙드레 고르츠가 말했던 “성장 없는 평등”, 즉 탈성장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고르츠는 기본소득을 그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더 평등하게 분배할수록 성장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탈성장의 주요 요소이고 성장주의를 약화할 힘이 있긴 하지만, 그 힘이 발휘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결합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탈성장에 기여하려면 첫째로 기본소득의 액수가 “인간다운 삶과 존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참여에 충분한 액수”로 ‘충분한’ 혹은 ‘해방적’ 기본소득이 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의 액수가 작다면, 노동에 대한 협상력이 증대하고 원치 않는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력이 강해지기보다는 노동 유연화의 조건만을 성숙시킬 가능성이 크다. 작은 액수의 ‘부분’ 기본소득으로 시작하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국민적 합의 수준을 높여 의미 있는 액수의 기본소득으로 끌어올려야 탈성장에 다가설 수 있다.
둘째로 앙드레 고르츠는 기존의 ‘사회적 배치’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부분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기본소득은 해방적이지 않고 기존의 사회적 배치를 강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노동 시간의 단축과 여가 시간의 확장, 자발적 활동 및 공동체 노동의 확대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본소득은 “자율적 영역”에서 다양한 생태적 활동으로의 이행을 위한 ‘존재적 평정’을 줄 것이라 고르츠는 역설했다.
셋째, 기본소득스페인네트워크 부대표인 다비드 카사사스(David Casassas)는 보건의료, 교육, 주거, 돌봄 등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상황 속에서의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기본소득은 반드시 사회서비스의 공공성 강화와 결합해야 탈성장을 위해서 소기의 목적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 생산주의·소비주의의 틀을 벗어나는 협동적·대안적·비자본주의적 생활 양식의 함양이 요구된다. 돈이 생겨도 이전과 다르게 살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다면, 확장된 여가 시간은 낡은 소비주의적 생활 양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고르츠가 말한 자율적 영역에서의 다양한 생태적 활동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탄소세의 비결, 생태배당
2019년 1월 16일 《월스트리트저널》에 ‘탄소 배당(Carbon Dividends)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성명–기후 변화와 싸우는 법에 관한 초당적 합의’가 발표되었다.
[5] 성명에는 27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해 3589명의 미국 경제학자가 참여했다. 성명은 다섯 가지의 정책 권고를 담고 있는데,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탄소세의 효율성을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일부만 살펴보자.
① 탄소세는 필요한 규모와 속도로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비용 대비 효율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② 탄소세는 배출량 감축 목표가 충족될 때까지 매년 높여야 하며, 정부 규모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재정 수입에 중립적이어야 한다. 탄소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면 기술 혁신과 대규모 인프라 확충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⑤ 탄소세 상승의 공정성과 정치적 지속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재정 수입 전액을 동일한 액수로 모든 미국 시민에게 직접 되돌려 주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미국 가계의 대다수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지불하는 것보다 ‘탄소 배당’을 더 많이 받게 됨으로써 재정적으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탄소 배당의 목표는 두 개, 탄소세 상승을 지속하기 위한 것과 탄소세로 인해 고통을 겪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보호이다. 탄소 배당을 해야 공정성과 정치적 지속 가능성이 극대화된다. 탄소세를 부과하면 탄소를 배출하는 물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당연히 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중산층 이하에게 큰 고통을 준다. 따라서 탄소세를 크게 올릴 수 없고, 탄소세를 크게 올릴 수 없다면 탄소세의 원래 목표인 온실가스 감축에 큰 기여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탄소세로 걷은 세금을 동일 액수로 생태 배당한다면, 과소비 부유층은 탄소세로 내는 것이 배당액보다 많고 경제적 약자는 탄소세로 내는 것보다 배당액이 많게 되므로, 재분배 효과도 생기고 경제적 약자들이 탄소세 인상을 반대하지 않게 된다.
탄소세를 반대하는 사람들
가끔 탄소세를 반대하는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탄소세가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탄소세의 문제점이 아니라 ‘생태배당이 없는 탄소세’의 문제점이다. 탄소세를 부과하는 전 세계 수십 개 나라 중에 그 세수를 배당으로 직접 돌려주는 나라는 스위스밖에 없다. 스위스가 탄소세율을 10년 만에 여덟 배로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배당이다. 탄소세율이 수직 상승한 스위스는 탄소세를 부과한 난방용 연료 소비를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다. 2018년 난방용 연료 사용이 1990년 대비 28.1퍼센트 감소한 것이다. 탄소세로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없었던 나라, 탄소세를 크게 올릴 수 없었던 나라는 반드시 위 경제학자들의 권고와 스위스의 사례를 교훈 삼아 배당을 결부시켜야 한다.
독일 녹색당도 2021년 선거를 앞두고 탄소 배당 정책을 수용했다. 독일은 현재 이산화탄소 환산톤
[6]당 25유로의 탄소세를 시행하고 있다. 2025년에 55유로로 올리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독일 녹색당은 2년을 앞당긴 2023년에 60유로로 올리자고 주장한다. 이런 탄소세 수직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당연히 탄소세 세수를 개인에게 환급하는 정책이다. 독일 녹색당은 이것을 ‘에너지 돈(Energiegeld)’이라 부른다.
탄소세를 ‘시장주의적’ 문제 해결 방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장주의적’ 온실가스 감축 방안이 그동안 실패했다고 비판할 때, 사실 그것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Emissions Trading Systems·ETS)’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가 경제 주체들, 주로 기업에게 배출허용총량(cap)을 설정해 주고 그 범위 내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permit)를 할당하게 된다. 배출권은 기업들 간에 거래(trade)할 수 있다. ETS는 개념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기업이 탄소를 배출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할당받거나 심지어 구매할 수 있다는 말은, 배출권을 구매할 여력이 있다면 무한정 탄소 배출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더 큰 문제는 정부의 무상 할당이다. 우리나라도 ETS를 2015년부터 시행 중인데, 2015년 525개 업체로 시작하여 2020년에는 609개 업체까지 확대되었지만 탄소 배출 감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무상 할당이 2018~2020년 사이에는 전체 할당액 중 97퍼센트, 2021~2025년에도 90퍼센트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국제 경제력을 운운하며 정부가 기업들에게 무상 ‘오염권’을 준 셈이다. 탄소세는 이와 다르다. 탄소세를 부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예외는 있을 수 없다. 배당을 결합하면 날개를 달게 된다. 배당과 결합하여 온실가스 감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탄소세를 시장에 기반한(market-based) 정책이라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가깝다.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장적 방법이건 비시장적 방법이건 가리지 말아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해서는 탄소세와 같은 시장적 해결 방식 외에도 공급의 ‘금지’와 같은 직접적 규제 조치가 필요하다. 꼭 필요한 금지 조치를 몇 가지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내연 기관 자동차 금지
• 단거리 비행기 운행 금지
• 석탄·LNG 발전 금지
• 1회용 플라스틱·비닐 사용 금지
• 에너지 낭비 신규 건물 금지
• 공장식 축산의 금지
• 생태 파괴적 기술의 금지
우리나라에는 아직 탄소세가 없지만 ‘교통·에너지·환경세’라는 세금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세수가 13조 9000억 원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많이 걷히는 세목이다. 하지만 재원의 80퍼센트는 도로, 철도 등 교통 시설 특별 회계로 사용되어야 하는 목적세다. 교통 인프라 확충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에서 세수 상당 부분이 예치금으로 남아 있다. 이제 교통·에너지·환경세를 보내고 탄소세로 바꿔야 할 때다. 교통·에너지·환경세는 유류 1리터당 종량세로 부과하지만, 탄소세는 이산화탄소 환산량 (carbon dioxide equivalent
[7])에 대해 부과한다.
탄소세의 장점은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모든 지점, 에너지 채굴, 산업 생산, 운송, 유통, 소비, 폐기물 처분의 모든 과정이 과세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탄소세는 탄소세로 인해 가격이 높아진 상품의 시장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최종적으로는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한 ‘교정 과세(corrective tax)’다. 단점은 배출권 거래제에 비해 탄소 배출 총량에 대한 규제 기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소세율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와 연동하여 탄력적으로 조정해야 하며. 전년도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세율을 대폭 올리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때 배당이 동반되어야 실행이 가능하다는 점을 한 번 더 강조한다. 탄소세를 위해 배당이 있는 것이지, 배당을 위해서 탄소세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탄소세는 찬성하지만 배당은 반대?
앞에서 탄소세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번에는 탄소세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만날 차례다. 탄소세는 좋은데 배당은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탄소세를 통해서 걷은 세금을 재생 에너지나 그린 리모델링 즉 친환경 주택 개량 등에 투자하자는 것이다. 유럽 녹색당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런 입장을 취한다. 탄소세를 재원으로 한 생태배당이 ‘기본소득 방식’으로 지급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기본소득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해도 생태배당까지 반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한 이유로 인해서 배당이 없는 방식으로는 탄소세를 획기적으로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배당과 결합하지 않은 탄소세는 서민층을 녹색 전환의 반대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 결과 유럽 일부에서 볼 수 있듯이 녹색당이 중산층의 정당으로 변모할 위험성이 있다. 녹색당은 ‘지구만 걱정하고 서민은 걱정하지 않는’ 정당처럼 비치게 되는 것이다.
탄소세 세수를 배당이 아닌 녹색 전환 기금으로 쓰면 어떨까? 모두를 위한 녹색 전환에 따르는 비용을 저소득층이 상대적으로 더 과중하게 부담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숫자로 예를 들면 100만 원 버는 사람이 3만 원을 탄소세로 추가 부담하게 되었고 1000만 원 버는 사람이 20만 원을 탄소세로 추가 부담하게 되었다 할 때, ‘세액’으로는 부자가 탄소세를 더 많이 냈지만 소득 대비 전자는 3퍼센트, 후자는 2퍼센트의 탄소세를 낸 것이다. 그 얘기는 녹색 전환을 위한 세금이 부자에게 세율이 높은 누진세가 되기는커녕 가난한 자의 ‘세율’이 높은 역진세로 편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탄소세의 재원을 가지고 녹색 전환 비용으로 쓰자는 주장은, 결국 지구를 지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고혈을 더 짜야 한다는 말과 같다.
기후 위기 시대에 녹색 전환 기금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탄소세 같은 목적세가 아니고 일반 재정에서 나와야 한다. 일반 재정의 가장 큰 세원은 우리나라 기준에 서 소득세와 법인세인데, 이 둘은 누진세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누진세로 걷어서 지구와 뭇 생명을 위한 일에 써야 하는 것이다. 헌법에 기후 정의를 명시하고, 기후 정의를 위한 법을 제정하여 재정의 특정 비율을 녹색 전환에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반대로 역진세로 걷은 탄소세는 배당을 해야 역진성이 없어지고 지속 가능한 목적세로 기능하게 된다. 물론 전액을 다 배당하지 않고 스위스처럼 일부는 녹색 전환 기금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스위스는 세수의 삼분의 일은 건물과 주택의 개량 사업에 사용한다. 탄소세의 목표가 무엇인지 국민에게 시그널을 주기 위해 세수의 일부는 그렇게 설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수는 배당으로 쓰여야 한다. 그것이 훨씬 중요한 시그널이다. 탄소세는 경제적 약자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시그널 말이다. 탄소세는 탄소 배출이 줄지 않는 한 계속 올라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본소득과 생태배당, 토지배당 등 성격이 다른 제도를 한데 섞어 기본소득의 전체 지급액을 표시하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늘어날수록 좋은 것이지만, 탄소세 생태배당과 토지 보유세 토지배당은 줄어들수록 좋은 것이다. 특히 생태배당은 없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셋을 섞어서 표현하면 액수를 키워 보일 순 있겠지만 국민에게 나쁜 시그널을 주게 된다. 현금 수급액을 늘리기 위해서 탄소를 더 배출하거나 부동산 투기가 더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니겠는가?
노동주의의 종언과 기본소득
19세기에 자본주의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이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여겨졌다. 제정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혁명적 해석을 기초로 1917년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한때 기세를 올렸던 소련 중심의 세계 사회주의 체제는 1991년에 몰락했고, 더 이상 바람직한 사회 대안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서유럽의 사회주의는 소련 체제와 구별하여 ‘사회 민주주의’ 혹은 ‘민주 사회주의’ 등으로 불렸는데, 20세기 노동자의 삶을 크게 개선했지만 20세기 말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der)의 ‘제3의 길’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했다.
근대 문명의 쌍생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당, 노동당, 사회민주당 등의 이름을 가진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은 원래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다. 하지만 생산 구조가 변화하면서 비정규직, 계약직, 임시직, 파견직, 파트타이머가 양산되고 내부에서는 실업자, 외부로부터는 이주자들이 급증하면서 이 당들이 대변하는 노동자들은 점점 노동자 계급의 일부가 되어갔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사회 체제 내에서 중간층을 형성하게 되고 그 아래에 위에 언급한 광범위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층이 존재하는 구조가 되었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의 뜻을 가진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 (proletariat)’의 합성어로서 1980년대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가이 스탠딩이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이란 책을 쓰고 나서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노동자 계급은 이제 안정적 화이트칼라인 ‘샐러리아트(salary+proletariat)’, 또한 전문 기술자 집단에 해당하는 ‘프로피시언(professional+technician)’, 전통적 육체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그 아래에 프레카리아트가 존재하는 중층적 구조로 변모했다. 원래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이었던 사회 민주주의 정당들은 여기서 프레카리아트를 중심으로 하는 ‘더 낮은 곳’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 위에 있는 샐러리아트와 프로피시언을 포섭하는 전략으로 이행했다. 바로 그것이 ‘제3의 길’의 본질이었다.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 이처럼 중산층 정당으로 변모하자, 프레카리아트는 자신을 대변할 정치 세력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배외주의적 극우 정당들에 포섭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영국의 영국독립당, 프랑스의 국민전선,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오스트리아 자유당,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그리스의 ‘황금새벽당’ 등 각국의 극우 정당은 유럽 정치의 상수가 되었다.
사회 민주주의 정당들은 왜 프레카리아트 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고소득 노동자 쪽으로 이동한 것일까? 원인을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사유 구조 하나를 들면 개인적으로는 ‘노동주의’를 꼽는다.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은 노동자의 ‘살아있는 노동’이다. 물론 원자재나 기계 같은 생산 수단도 상품의 가치에 기여한다. 하지만 생산 수단에서 상품으로 넘어가는 가치는 ‘이전’되는 것이지 창조되거나 증식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생산 수단은 과거의 살아있는 노동이 체현된 것, 즉 ‘죽은 노동’이다. 결국 환원해 보면 모든 가치의 연원은 노동이며, 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최초의 자본 축적’은 인클로저와 같은 폭력적 수탈로 이루어졌다.
노동이 가치의 유일 원천이며 최초로 존재한 자본은 폭력으로 생겼다면 자본가 ‘계급’은 존재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레닌주의는 그것을 직접 실행했다. 서유럽의 사회 민주주의는 그걸 말하기는 하되 실천으로서는 유예했다. 노동자의 분배 몫이 더 커져야 한다는 이론적 명분으로 ‘노동가치설’을 활용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 둘은 달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노동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말은 곧 생산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이며, 비생산적인 것, 즉 노동 과정에 투입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생적’인 것이 된다. 가치 및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고 돌봄이나 가사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이 된다. 화이트칼라 샐러리아트는 생산적 노동자인 반면, 프레카리아트인 실업자는 자본주의 축적 과정의 폐인, 즉 ‘산업예비군’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사회의 ‘공동의 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기본소득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노동을 가치의 유일 원천으로 보는 생각은 인간 중심주의로도 설명된다. 카를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
[8] 인간 중심주의에서 자연은 인간의 물질대사의 대상에 불과하다. 자연은 인간 노동의 가공 대상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군데군데 생태적 통찰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주요한 요소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모두 인간 노동을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가 근면한 노동의 결과라고 정당화했고, 공산주의는 근면한 노동자에게 ‘노동 영웅’ 칭호를 주었다. 생산력 향상을 위한 체제 경쟁에서 자연 파괴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공산주의에서 대규모적 생태 파괴가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앙드레 고르츠는 지구의 균형은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보는 동시에 ‘탈성장’의 개념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도 공박했다. “성장 없는 평등에 관한 고민을 거부하는 급진론자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연장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고르츠는 일갈했다. 유럽에서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생산주의의 기조 아래 ‘성장 동맹’의 파트너로서 성장의 몫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분쟁했을 뿐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자에게 분배 개선이란 ‘노동의 몫’을 늘리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에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를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로 그렸다. 사회주의자에게 분배의 권리는 노동에서 나온다. 이런 생각은 노동과 무관하게 모두가 모두의 몫을 분배받을 권리가 있다는 기본소득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 생산과 소득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본다.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공산주의도 유럽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노동은 권리로 선언되었지만 그 이전에 의무였다.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사회주의 인민의 고결한 책무였다.
“스스로 선택한 유익하고 사회적인 활동 분야에서의 양심적인 노동과 노동 규율의 엄수는 노동 능력을 가진 개개의 소련 시민의 의무이고 명예이다. 사회적으로 유익한 노동의 기피는 사회주의 사회의 원칙과 상용되지 아니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 제60조
‘더 많이 노동하고 더 많이 생산하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성장주의 근대 문명의 쌍생아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인간의 자연 지배를 정당화했던 이성 중심적, 인간 중심적 사고를 극복해야 기후 위기 시대를 이겨낼 수 있다.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로서 상호관계를 맺는 한 요소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는 ‘가치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만이 아니라 자연이 만드는 부, 인간의 관계와 협동이 만드는 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부, 커먼스의 지위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새로운 분배 원리로서 기본소득을 전면화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은 노동에 따른 분배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노동의 몫을 늘리려는 싸움이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니다. 노동조합 조직화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아니다. 이것을 포함하여 노동 운동의 전략이 전환·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몫’을 늘리려는 싸움과 함께 ‘모두의 몫’을 늘리려는 싸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노동 운동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노동 운동도 ‘모두의 몫’을 늘리려는 기본소득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프레카리아트 확산에 대해 노동 운동은 프레카리아트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아 프롤레타리아트에 포함시키고 ‘노동 3권’을 따내며 사회 보험의 일원으로 포함하는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9] 물론 이 전략은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몫’은 끊임없이 감소하고 있다. 그것은 21세기 자본주의 경제가 확고하게 그러한 추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재산생산과 사후적 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