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완결

블록체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스위스의 크립토밸리


스위스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기차를 타고 30분쯤 가면 추크(Zug)라는 지역에 도착한다. 호수를 끼고 있는 목가적 분위기의 추크는 인구 12만 4000명의 작은 주(州)다. 조용한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전 세계가 주목하는 첨단 기술의 성지로 꼽히고 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본떠 ‘크립토밸리(Crypto Valley)’라는 별칭도 붙었다. 각국의 3만 2000개 기업이 몰려 있는데, 블록체인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만 400여 개에 달한다.

추크가 세계 블록체인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4년 여름, 이더리움(Ethereum) 공동 창업자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기술 개발 재단 설립 지역으로 추크를 점찍은 것이다. 스위스의 기술력과 금융 시스템, 쾌적한 생활 여건과 자연 환경 같은 조건에 추크 지방 정부의 기업 친화적 정책을 더한 결과였다.

블록체인을 미래 먹거리로, 유망 사업으로 지목하는 사람들은 많다. 블록체인이라는 용어도 이제는 익숙하다. 그러나 블록체인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방법,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산업의 비전을 수립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딘 것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부터 생각해 보고,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유 사회, 초연결 사회의 키워드


블록체인은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회계 장부다. 회계 장부의 낱장이라고 할 수 있는 블록이 여러 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블록체인이라고 말한다. 블록체인의 역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10월 30일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을 쓰는 인물이 암호화 기술 커뮤니티에 〈비트코인 : P2P 전자 화폐 시스템〉이라는 논문을 올렸다. 거래 당사자 사이에서만 오가는 전자 화폐로 비트코인을 제시하고, P2P(peer to peer) 네트워크를 통해 이중 지불을 막는 기술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09년 1월 3일 비트코인의 첫 번째 제너시스 블록이 채굴되면서 비트코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사토시는 크게 두 가지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기술적인 측면이다. 기존의 분산 원장 기술(distributed ledger technology)에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이 개발한 16진법 최신 해시 암호화 기술(SHA 256)을 결합해 기술적으로 장부를 구현했다. 의미가 더 큰 것은 두 번째 업적이다. 코인이라는 보상 체계를 통해 암호 화폐 공개(ICO)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신기술 기반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자금의 확보 채널이 열렸다. 더 좋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기술이 개발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창업가들이 엔젤 투자자나 벤처 캐피탈의 선택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ICO를 통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2018년 상반기에 ICO를 통해 모금한 자금이 벤처 캐피털 투자액의 세 배나 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트코인 같은 1세대 블록체인은 무결성(integrity), 투명성(transparency), 적용성(availability), 분권성(decentralism), 확장성(scalability)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기여를 했지만, 산업에 적용되기에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한 블록의 크기가 1메가바이트에 불과하고 처리 속도가 10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한 것이 ‘천재 소년’ 비탈릭 부테린이 제안한 스마트 계약이다. 2014년 등장한 2세대 블록체인 이더리움은 블록체인에 스마트 계약 프로그램을 얹은 형태로, 상업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서 다양한 산업에 적용된다. 한 블록의 크기도 10메가바이트로 커지고 처리 속도도 블록당 2~3초로 빨라졌다. 최근에 발행되는 코인들은 이더리움을 운영 체제로 깔아 두고 그 위에 ERC20이라는 프로토콜에 기반한 기술 레이어를 깔아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형태다.

비트코인을 통해 블록체인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블록체인을 금융 기술로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다양한 가치를 바탕으로 전 산업 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는 패러다임 전환의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한다. 정부나 글로벌 은행 같은 권위 있는 중앙 집중적 시스템 없이는 신뢰를 담보할 수 없었던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비금융 분야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혀 가면서 기본 소스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오픈 소스(open source)화, 소비자 편의를 지향한 블록체인 서비스의 플랫폼(platform)화는 대세가 되었다.

추상적으로만 제시되어 왔던 ‘협력적 공유 사회(collaborative commons)’의 개념도 블록체인 기술의 신뢰성을 바탕으로 구현될 수 있다. 공유 경제의 전제는 신뢰다. 물건을 함께 쓰고, 빌려 쓰는 시스템에서는 공정하게 사용 시간을 측정해 대가를 지불한다는 약속이 지켜져야 한다. 공유 경제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 블록체인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록체인을 통해 플랫폼, 사용자, 공급자 간의 거래 내역을 기록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제는 기술보다 투자의 확산 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이다. 자금은 모여드는데 기술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블록체인은 미완성의 기술이다. 2세대 이더리움 이후 안타깝게도 블록체인 3세대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오스, 리플 같은 새로운 코인들이 등장해 ‘3세대 블록체인’, ‘이더 킬러’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2.3~2.4 세대에 불과한 것 같다. 속도에만 초점을 맞춘 경쟁이 벌어지면서 초 단위 처리량을 강조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만이 아니다. 각 산업 현장에서 겪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최종 소비자가 그 편리함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금융이 전부가 아니다


블록체인이 적용될 수 있는 산업으로는 우선 금융 분야를 꼽을 수 있다. 전 세계 외환 시장은 일일 거래량이 5조 달러에 달한다. 특히 해외 송금은 은행 간 거래를 완결하는 데 3~4일이 걸리고, 송금 수수료, 중개 수수료, 전신료 등 각종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 전 세계 400개 은행이 직접 가입한 국제 은행 간 통신 협정(SWIFT) 결제망에는 수직 계층적 구조로 3만여 개 은행들이 엮여 있어 수수료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을 활용해 P2P 거래를 하면 해외 송금 과정을 단순화하고 수수료를 없앨 수 있다. IBM이 소스를 제공하고 200여 개 은행, 대기업과 스타트업들이 참여해 리눅스재단에서 개발한 하이퍼렛저(Hyperledger), 씨티은행,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등 전 세계 80개 초대형 금융 기관과 중개 기관들이 참여한 R3CEV 컨소시엄의 코다(Corda) 등은 이 같은 국제 금융 거래 방식을 개혁하는 차원에서 블록체인을 활용한다. 블록체인으로 은행 간 신뢰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SWIFT가 보증하는 신뢰를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전자 상거래, 무역업에서도 블록체인의 활용 가능성이 크다. 전체 무역 거래량의 12퍼센트 이상은 아직도 신용장(letter of credit) 거래에 의존하고 있다.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은행이 발행한 신용 보증서인 신용장 없이 신용을 확인하고 당사자 간 직접 거래를 할 수 있다. 도이치뱅크, HSBC 등 유럽 대형 은행 9곳이 손을 잡아 운영하는 디지털 무역 컨소시엄 위트레이드(We-Trade)는 스마트계약을 통해 다수 이해관계자들이 신용장 없이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보통신개발청(IDA)은 HSBC, BoA 등과 함께 항만과 물류 분야까지 포괄하는 무(無)신용장 거래 블록체인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비금융 분야 중 블록체인 시범 사업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산업이 유통이다. 블록체인은 안전이 중요한 제품의 유통 정보 제공에 우선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식품 안전을 보증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2017년 IBM과 월마트가 손을 잡고 시행한 돼지고기 유통 이력제 시범 사업은 블록체인 정보로 도축 방식, 위생 관리 과정 등을 세밀하게 기록해 확인한다. 이 사업은 중국의 칭화(清華)대학교가 참여하는 중국산 돼지고기 유통 이력 정보를 제공하는 사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홍콩의 카 버티컬(Car Vertical)이라는 업체는 중고차 거래 과정에 블록체인 증명서를 도입했다. 소비자가 자동차의 상태에 대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확산이 더디다. 모든 정비소와 중고차 거래 업체들을 가입시켜서 블록체인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곳이라도 가입하지 않고 불법 영업을 한다면 루프홀(loophole)이 생겨 시스템 전체가 신뢰를 잃게 된다.

모든 상품에 블록체인이 적용될 수는 없다. 비용이 수익을 초과하는 영역도 있다. 경제성과 문제 해결 가능성이 있는 영역부터 상용화를 거쳐 확산해야 한다. 해당 사업 분야 관계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제안이 아니라면 참여를 바탕으로 한 신뢰 구축은 어렵다. 명품, 고가품의 신뢰 정보를 블록체인화할 경우 사업의 성공 가능성은 커질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에서 다이아몬드 거래를 관리하는 에버레저(Everledger)라는 기업이다. 이미 각국 60만 개 점포의 다이아몬드 거래를 연결해 블록체인 기록을 구축했다. 다이아몬드처럼 고가의 상품은 거래 과정에서 속을 경우의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사업자들은 루프홀을 최소화하려고 많은 투자를 할 것이다. 블록체인이 리스크를 해소해 주면서 시장 참여자들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콘텐츠 창작자들도 블록체인 활용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 유통돼 수익을 내고 있는 한국 콘텐츠의 지식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은 창작자에게 큰 이익이 된다. 블록체인으로 일기장을 쓰듯이 창작 과정을 기록해 놓으면 중국 등에서 불법 복제해 분쟁이 생길 때 작품의 독창성을 증명할 수 있다. 만화《미생》의 윤태호 작가도 처음에는 블록체인이나 비트코인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했지만, 저작권 보호의 중요한 기능을 발견한 다음부터는 강력한 블록체인 옹호자가 되었다고 한다. 블록체인이 콘텐츠 제작자가 플랫폼 사업자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번스타인(Bernstein)이라는 미국 회사는 발명, 상표, 실용신안 분야에서, 99디자인스(99Designs)는 산업 디자인에 특화된 지식 재산권 보호의 수단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하고 있다.

자선 사업 분야도 주목받고 있다. 기존의 자선 사업은 기부금의 공정한 사용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블록체인은 기부금의 전달 경로와 활용 내역 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빗기브(Bitgive)라는 업체는 신분증 없이 홍채 인식을 통해 수령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기부금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또한 빈 파운데이션(Veen foundation)에서는 기부자가 어플리케이션으로 기부금이 쓰일 곳을 직접 결정하고 기부금 전달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도 개발하고 있다. 최종 단계에서는 익명으로 기부할지 이름을 밝힐지도 기부자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 UN세계식량계획(WFP)은 블록체인을 자선 사업에 활용할 경우 난민 원조금의 98퍼센트를 당초 목적대로 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에너지 분야는 미래의 삶을 바꿀 주요 사업이라는 점에서 블록체인의 적용 가능성이 높다. 태양광 발전 등의 기술 보급으로 에너지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점에는 P2P 형태의 거래가 이뤄질 것이다. 전력 거래에서 블록체인을 주목하는 이유는 스마트 계약이라는 옵션을 통해 프로슈머들의 전력 거래를 신속하고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전과 같은 제3자의 중개 없이도 프로슈머끼리 거래할 수 있고, 계량기와 컴퓨터가 알아서 자동 거래와 정산을 한다. 블록체인은 전력 거래의 인터넷(IoE)으로 자리 잡아 갈 것이다. 스마트 그리드 역시 신재생 에너지 발전량을 조절하고, 송배전 손실을 최소화하는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블록체인 기반 위에서 운영될 수밖에 없다. 영국의 에너지 마인(Energi Mine)은 에너지를 절약한 소비자들에게 토큰으로 보상하는 플랫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호주의 파워 레저(Power Ledger)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블록체인 기반 마이크로 그리드를 건설하고 있고, 미국의 그리드 플러스(Grid Plus)는 연내 블록체인 플랫폼이 탑재된 발전소 장비들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4월 전기 사업법 개정으로 소규모 전력 중개업, 전기 자동차 충전업 등 새로운 업종이 허용되면서 프로슈머 시대가 열리고 있어 에너지 블록체인이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본다.

블록체인은 전력 이외의 다른 에너지 분야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탄소 배출권 거래다. 에너지 코인으로 불리는 스위치 토큰(Swytch Token) 같은 암호 화폐에는 총량이 있어 역산하면 최대 배출 허용량을 정의할 수 있다. 또한 배출권 거래는 이산화탄소 상당톤(tCO10-eq)이라는 공통 단위를 사용하고 있어서 탄소 시장은 블록체인과 함께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전 세계 공통의 장부를 통해 각종 거래를 투명하게 관리해 거래 비용을 낮추고, 후진국에서 발생하는 감축량 더블 카운팅(double counting, 이중 계산) 등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앞으로 우리 벤처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 기회로 눈여겨보아야 할 분야다. 이 밖에 사용 후 핵폐기물 저장고의 안전성을 보증하는 분야에서도 사회적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 자본을 구축하는 데 블록체인이 활용될 수 있다. 아직은 도입 초기 단계지만 블록체인이 더 확산된다면 에너지 시장 구조를 변화시키고, 신재생 중심으로의 에너지 전환 등 변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블록체인의 적용이 유망한 또 다른 분야는 공공 서비스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 발트해에 있는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Estonia)의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시민권(e-Residency)이다. 2015년 처음 도입되어 각종 계좌 개설, 온라인 송금, 유럽 연합(EU) 국가 내 결제 서비스 등을 제공해 2018년 현재 3만 5000명이 사용하고 있다. 이 시민권이 있으면 온라인 창구 업무를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EU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실제로 5000개가 넘는 기업이 에스토니아에 법인을 설립했다. 2014년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투표를 실시한 덴마크에서는 폴로우 마이 보트(Follow My Vote)라는 투표 인증 전용 앱도 개발되어 있다. 지역 코인 개발도 활발하다. 세계 최초의 지역 코인은 영국의 헐(Hull) 코인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운영되는 사례로는 우리나라의 노원 코인을 꼽을 수 있다. 서울 노원구에서 개발한 노원 코인은 간단한 토큰 형태로 민원 행정과 도서관 대출 등에 사용한다. 앞으로 잘 활용된다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추크에 있는 것과 없는 것


다시 추크로 돌아가 보자. 스위스의 작은 도시 추크가 세계 블록체인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추크는 기술 자체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블록체인 창업가들에게 스위스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우선 스위스는 금융 강국이다. 신용을 중시하고 고객의 자산을 보호하는 일을 우선시하는 곳이다. 동시에 스위스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국민 중심의 노동이 이뤄지는 나라다. 명품, 금융 등 고부가 가치 산업이 발달해 높은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자국민을 고용할 여력이 있다. 스위스는 블록체인의 핵심 효용인 신용에 대한 이해가 깊은 나라, 블록체인을 산업화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큰 고부가 가치 산업이 발달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 싱가포르, 홍콩, 지브롤터 등이 블록체인 산업 육성에 뛰어들었지만, 스위스만큼 효율적인 산업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지역은 아니다. 새로운 산업을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적 기반의 측면에서 스위스가 앞서 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그렇다면 스위스에서도 왜 추크일까? 부테린이 기술 개발 재단을 설립한 과정을 돌이켜 보자. 당시 부테린은 에스토니아, 이탈리아는 물론 스위스의 베른을 후보지로 검토하다가 추크를 최종 선택했다. 부테린은 추크 공무원들의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느꼈다. 추크는 ICT, 금융 산업의 기반이 갖춰져 있어 3200곳의 관련 기업이 창업한 지역이다. 깨끗한 자연 환경, 쾌적한 도시는 밀레니얼 세대 인재들이 선호하는 거주 조건이다. 번화한 도심의 삶보다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는 젊은 창업가들을 모셔 오려면 도시 환경을 제대로 구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지난여름, 추크를 방문했을 때 놀란 것이 있다. 블록체인 경제 특구도, 특별법도 없었다. 암호 화폐 거래에 관해서도 거래소 설립을 최근에야 검토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ICO가 자유롭게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스위스 은행법, 증권법과 자금 세탁 방지법(AML)의 엄격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고객에게 계정을 나눠 주고 예탁을 받을 때는 은행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실명(KYC·know your customer)으로 거래하고 자료 관리도 명확히 한다. 오직 기술만 보고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스타트업과 개발자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기술 개발을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추크는 블록체인을 기존의 ICT 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킬 돌파구로 보고 있다. 당장 새로운 법안을 만들기보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선에서 단계적으로 기술을 적용해 나가고 있다. 2016년에 주 정부 차원의 블록체인 코인을 발행했고, 2017년에는 블록체인 신분증을 도입하는 등 블록체인과 기존의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융합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추크의 가장 큰 경쟁력은 관료주의가 없다는 점이다. 추크 주지사, 시장에서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언제든 친절하게 기업들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추크 주정부는 과세·회계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비트코인의 유통을 공식 허용하는 촉매 역할만 했다. 그 대신 개인 소득세 22퍼센트, 법인세 14퍼센트로 세율을 낮추고, 유명 대학과 연구소, 로펌, 전문가들을 유치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스위스 금융 감독원(FINMA) 등 정부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정하고 자율 규제 원칙 아래 나머지는 기업에 맡기고 있다. 블록체인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 산업으로 육성하려면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기업인들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한국의 크립토밸리를 꿈꾸며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에 크립토밸리를 조성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경제 특구를 조성해 미래형 산업으로 전환을 촉진하고, 청년들에게 고급 일자리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편리한 교통과 정보 통신 인프라스트럭처 등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해 우수 기술 인력이 몰려들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런 조건들을 모두 갖춘 곳으로 우리나라에 제주도만 한 곳도 없다.

그러나 국내에 크립토밸리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이 적지 않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를 금융 허브로 만들자는 구호가 난무했지만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추크는 싱가포르, 홍콩, 몰타, 지브롤터, 에스토니아 등과 경쟁해 기업들을 유치하고 있다. 우리가 이들 지역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부품 소재 분야의 산업이 발달한 한국 시장의 특성을 살려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나라가 블록체인의 국제 표준을 선점하고 이끌어 가려면 몇 개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성지(聖地)로 만들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시범 사업을 통해 산업별 블록체인이 확산되어야 하는 이유다. 영국은 해외 송금과 지역 코인, 스페인은 탄소 배출권 거래, 독일은 P2P 전력 거래, 에스토니아는 전자 시민권, 덴마크는 전자 투표 등 블록체인 시범 사업을 최초로 실현하여 해당 분야에서 성지로 통한다. 우리도 블록체인 시범 사업을 성공적으로 실현해서 세계의 주목을 받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의료 정보 교환 시스템, 스마트 그리드를 통한 에너지 데이터 교환에 블록체인을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도전해 볼 만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시범 사업이 일회성 행사에 그쳐서도 안 된다. 시범 사업을 거쳐 해당 산업 전반으로 블록체인이 확산될 수 있도록 적용 가능성과 잠재력을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기업과 개발자의 변화가 필요하다. 회계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조사에 따르면, 블록체인 기업의 생존율은 8퍼센트 수준이다. 이더리움의 등장 이후 대략 8만 6000개의 어플리케이션이 등장했는데 그중 92퍼센트가 2~3년 내에 사라졌다. ICO를 먼저 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겠다는 기업은 이 92퍼센트에 해당되어 폐업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블록체인 기업의 생존율(8퍼센트)을 벤처 캐피탈 투자의 성공률(25퍼센트) 수준으로 올려야 안정적인 투자가 가능하고, 산업 생태계도 구축할 수 있다.

개발자들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먼저 찾아야 한다. 그래서 현장이 중요하다. 현장을 알아야 해결할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문제를 바탕으로 프로세스를 개선해서 최종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개선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개별 산업의 한 가지 문제라도 제대로 해결하겠다는 접근이 필요하다.

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신기술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분야다. 우리의 기술 격차가 앞선 국가들에 비해 크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선도 국가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경쟁력이 있다. 암호 화폐 거래 규모와 선진적인 산업 구조를 들어 한국을 블록체인 산업의 유망 투자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원천 기술, 전문 인력 중심으로 과감한 투자가 이뤄진다면 자연스럽게 블록체인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산업 전반에 적용될 블록체인 기술의 국제 표준을 선점한다면, 한국이 새로운 시대의 기술을 선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블록체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도입 초기 발생한 암호 화폐 사기 사건 등으로 인해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블록체인 관련 기업이라고 하면 은행 대출에서 제외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블록체인이 새로운 산업 혁명을 일으킬 핵심 기술이라는 점이다.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필요한 분야에 적용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다. 블록체인은 공유 사회, 초연결 사회를 실현하는 핵심 기술이 될 것이다. 거래 비용의 감소, 정보 보안의 강화,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개인 간 거래 활성화, 분쟁의 해결 근거를 제시하는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의 구축 등 블록체인의 기술적 특성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창출한다. 앞으로 블록체인이 가져올 산업의 변화와 미래를 꿈꿔 본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