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니엘은 서울시 관악구의 환경 공무관이다. 기타 전공으로 백석예술대학에서 실용음악과를 졸업 후 그룹 ‘타임콘체르토’ 등의 소속으로 기타리스트 생활을 이어 갔다. 실용 음악 학원 입시 수업과 개인 레슨 및 각종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으나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달았다.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 직장을 찾던 중 환경 공무관이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현재 관악구 지역 수거팀 환경 공무관으로 근무하며 2014년부터 이어온 밴드 ‘애시드로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기타미화원〉을 운영 중이다.
새벽을 청소하다
본인을 소개해 달라.
낮에는 밴드 ‘애시드로즈’의 기타리스트, 밤에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환경 공무관으로 일하고 있다. ‘환경미화원’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텐데, 인식이 좋지 않아 몇 년 전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환경 공무관으로서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우선 환경 공무관은 크게 세 팀으로 나뉜다. 가로 청소팀, 지역 수거팀, 그리고 집하장팀. 가로 청소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로변의 쓰레기와 낙엽을 쓸어 담는 사람들이다. 지역 수거팀은 재활용품이나 폐기물 등을 트럭에 실어 집하장으로 옮기고, 집하장팀은 그걸 분류한다. 나는 여기서 지역 수거팀에 속한다. 새벽 4시가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지정된 휴게실로 출근한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보호 장구를 갖춘 뒤 지도를 챙기고 나선다.
그날 들러야 하는 지점들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인가?
그렇다. 우리 팀은 재활용 쓰레기와 대형 폐기물, 이렇게 두 가지를 수거한다. 대형 폐기물의 경우 버릴 때 동사무소에 신고하고 스티커 붙여서 버리지 않나. 누가 무엇을 내다 놨는지 동사무소 측이 매일 업데이트해서 팀별로 지도를 배부한다. 우리는 지도를 갖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그 위치에 있는 물품들을 수거한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이 특이하다. 보통 환경 공무관분들은 커다란 트럭을 타고 다니시는 줄 알았다.
일과가 선작업과 후작업으로 나뉜다. 선작업 때는 수거 차량이 지나가지 못하는 작은 골목들을 오토바이로 다니며 재활용품을 수거해서 큰길로 빼낸다. 말하자면 중간 집하 과정이다. 그게 한두 시간 걸리는데, 4시 반쯤부터 수거 차량이 와서 그때부터 코스대로 다니며 수거를 해간다. 그렇게 쓰레기 집하장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걸 서너 번 정도 반복하는데, 우리는 그걸 “세 차를 실어 냈다”, “네 차를 실어 냈다”라고 한다. 최근엔 코로나 영향으로 사람들이 배달 음식을 많이 먹어서 플라스틱 배출량이 늘어 여섯 차까지 실어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통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처럼 중간에 쉬는 시간도 규칙적인가?
아침 7시쯤 밥을 먹고 잠깐 쉬다 8, 9시쯤부터 두 번째 작업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남은 재활용품을 수거하고 대형 폐기물을 싣기 시작한다. 장롱, 소파, 가전제품 등 다양하다. 정말 멀쩡한 냉장고여도 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잘 사는 동네에 가면 아직 괜찮은데 내버리는 품목들을 보며 조금 아깝기도 하다.
장롱에 냉장고라면 엄청 무거울 텐데. 직접 트럭에 싣는 건가?
우선 싣고 본다. 그래서 가끔은 이삿짐센터 직원이 된 기분이다. 그냥 넣었을 때 트럭에 실리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부피가 큰 가구는 부순다. 그러다 보니 이젠 어떤 품목을 봐도 부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어 보인다. 저 장롱은 이 부분에 힘을 줘서 부수면 되겠고, 저 의자는 철제로 마감이 됐으니 부수기가 어렵겠고 등등. 폐기물 파손하고 싣는 소리가 우당탕탕 나면 인근 주택가에서 민원이 들어오기도 한다.
아까 좁은 곳은 트럭이 못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좁은 길에 버려진 큰 가구들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트럭이 다니는 길까지 직접 옮겨 놔야 한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큰 도로가 많은 곳에서 근무하면 좋겠지만 내가 일하는 동네는 골목이 미로처럼 어지러운 편이다. 그나마 팀원이랑 같이 옮기니 낫다. 보통 두세 명이 한 팀이 되어 일한다. 그렇게 보통 낮 12시까지 일하고, 나머지 한 시간은 작업복 세탁을 비롯해 신변 정리를 하고선 오후 1시에 퇴근한다.
야근의 개념도 있는지 궁금하다.
원래는 밤 12시에 출근해서 그날 할당량이 끝날 때까지 일했다. 추가 수당은 없고 야간 수당 정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생기면서 시간이 고정됐다. 일이 많든 없든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할 수 있게 됐다.
밤에 일하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직장인보다 병원이나 은행 방문도 수월할 것 같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난다는 점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자기 할 일을 착실히 하는 성격에겐 오히려 괜찮은 직업이다. 햇빛도 잘 보고. (웃음) 하지만 우리는 구청 소속 환경 공무관이라 나름 괜찮은 시간대에 일하는 것이지, 외주 업체분들은 상황이 다르다. 최근에는 구청 측이 환경 공무관 업무를 외주 업체로 많이 넘기는 분위기다. 그분들은 아직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정말 해를 보기 어려운 시간대에 일한다.
이상과 현실이 다를 때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기타를 전공해서 백석예술대학을 졸업했다. 실용 음악 학원에 강사로 취직해 10년 가까이 기타 레슨을 했다. 그 외에 공연이나 활동 같은 것들은 수익 목적이 아니라 음악적인 성공을 위해서 했던 일들이다. 그러다 스물아홉에 갑자기 세상 물정에 눈을 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려면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한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철이 없었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문득 깨달은 것인가?
그런 것 같다. 정말 문득이다. 사랑과 이별을 겪다 보니 보이더라. 20대 막바지에 다다라 현실적인 것들을 마주하자 막막했다. 학원에선 수강생 수만큼 월급을 받는데 매달 학생 수도 달라 수익이 일정치 않았고, 학생 수가 많다 해도 수강료를 학원과 일대일로 나눠 가지니 돌아오는 게 얼마 없었다. 학원도 두세 군데 뛰고 개인 레슨도 따로 했지만 월수입이 150~200만 원 선이었다. 잠을 줄이고 오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더해 최대한으로 벌어도 월 300만 원을 못 벌었다.
돈을 벌려고 임상 실험까지 고민했다고 들었다.
가난할 당시엔 큰 고민이었다. 돈인가, 건강인가. 결국 실제로 참여하진 않았으나 당시 신청 직전까지 갔던 병원에서 아직도 문자가 온다, 혹시 참여할 생각 없는지. (웃음) 그러다 서른을 맞았다. 기술도 없고 기타 치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분야를 새롭게 시작하려 해도 마음이 쉽게 서지 않고 나이도 걸렸다. 청년내일배움센터라는 곳에 가서 취업 연계 과정에 들려 했는데 그곳에 가서도 새로운 분야의 취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우연히 어떤 신문 기사에서 환경미화원이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글을 보게 됐다.
반가운 기사였을 것 같다. 대한민국 취업 시장은 특히 학력이나 살아온 배경 등을 꼼꼼히 따지지 않나.
여기저기 구직 실패를 경험한 나로선 너무 반가웠다. 또 특별히 요구하는 기술도 없었다. 체력 검정 시험과 면접만 본다는데 자신 있었다. 당시엔 환경 공무관이 빗자루로 거리의 쓰레기를 쓸어 담는 일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대형 폐기물을 드는 등 체력적으로 힘든 일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무튼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차라리 더 힘들면 힘들었지, 환경 공무관은 정말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전히 처음 해보는 일인데, 준비 과정은 따로 없었나?
필기시험은 따로 없었고 체력 시험을 보러 가기 전 나름 연습했다. 시험 유형은 지역구마다 다르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이 20킬로그램짜리 모래 마대 같은 것을 들고 일정 구간을 달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힘을 요하는 직업이라 미리 지구력 테스트를 하는 것 같다. 혼자 쌀 마대를 들고 동네를 뛰며 시험장에서의 시뮬레이션을 미리 돌려 보던 기억이 난다.
합격한 뒤 엄청 기뻤을 것 같다. 처음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것 아닌가.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 같더라. 50명 지원자 중 여섯 명만 뽑는데 내가 거기에 든 것이다. 계약서 쓰고 바로 투입됐다. 사전 교육 같은 것은 따로 없었고, 현장에서 보고 눈치껏 배웠다. 처음엔 좀 얼떨떨했는데 금방 적응했다.
‘환경미화원’ 하면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꽤 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주변의 우려는 없었는지.
부모님은 안전상의 이유로 약간 걱정하셨지만 친구들은 대다수 응원해 줬다. 또 내 입장에선 오히려 불필요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내 관계망에서 거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굳이 내가 만날 필요는 없지 않나. 주변의 우려는 있었으나 불필요한 시선을 신경 쓴 적은 없다.
친구들 중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그분들은 요즘 뭘 하시는지 궁금하다.
음악은 대부분 그만두고 다른 일들을 한다. 건설 현장 일도 하고, 화물차를 운전하는 친구도 있다. 여자인 친구들 중에선 네일 아트 같은 뷰티 분야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음악 전공을 살리려고 장비를 구축해서 렌탈 사업을 하거나, 소규모 공연의 음향 엔지니어로 일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드물다.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친구는 거의 없나 보다.
대학 동기 중 여전히 음악 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가까운 사람 중에선 없다. 지금 내가 소속된 밴드도 직장인 밴드다. 드러머는 병원에서 경호 업무를 하고, 보컬은 특이하게 치과 의사다. 각자의 사연이 길다. 여하튼 음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음악에 대한 미련은 없나. 한때 뜨거운 애정을 갖고 몸 담았던 분야인데.
사실 졸업 후 각자 일이 바쁘다 보니 대학 때 친구들을 만날 일이 많이 없었다. 그래서 음악 활동에 대한 미련이나 향수를 누군가와 얘기할 기회도 잘 생기지 않는다. 요즘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고, 서로 그걸 응원한다.
머리는 가볍게, 몸은 분주하게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나?
좋아한다. 우선 나는 머리 쓰면서 일하는 걸 안 좋아하는 타입이다. 땀 흘리면서 단순노동 하는 것을 즐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오래 할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남들은 반복 노동이 지루하다 하는데 나는 매일 같은 길, 같은 코스로 1년 365일 다니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건 내 성격과 관련된 것이지, 일 자체의 장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요일 감각이 사라지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그만큼 노동 강도가 센 것도 사실이다.
무엇이 가장 힘든가?
우선 다치는 분들이 많다. 무거운 것을 들다가 허리가 다치는 일은 다반사다. 게다가 재활용 봉투 안엔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 않나. 그 속에 게 껍데기나 심지어 식칼이 든 것을 무심코 잡았다가 손이 다치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그래서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시민들이 분리수거 좀 잘했으면 좋겠다. (웃음)
환경 공무관의 일에도 ‘잘한다’는 개념이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일을 빨리 끝내면 좋긴 하다. 재활용품을 어떻게 더 빠르게 차곡차곡 쌓을지, 지도를 보고 어떻게 코스를 효율적으로 짤지 고민하는 것이다. 결국 본인이 얼마나 센스 있냐의 문제인데, 그 모든 것보다도 안전이 중요하다. 조금만 숙련이 되면 익숙해지니까 마음이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늘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조심하려 한다.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나.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몇 번씩 했다. 신입 시절에는 일 자체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 정도 일과에 익숙해졌을 때쯤엔, 내가 담당하던 구역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업무량이 소화 불가능할 정도로 많아졌다. 어딜 가나 불공평은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다른 지역 다른 팀과 같은 월급을 받고 일하는데 우리 팀만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것이 억울했다. 게다가 이제는 야근의 개념이 사라졌지만 그 당시엔 일이 끝날 때까지 집에 못 가는 시스템이었다.
한낮의 야근이라니, 상상하기 어렵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다른 일 하고 말지’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야간에 일하는 것이기도 하고 노동 강도도 셌으니까. 요즘은 몸도 적응을 했고, 관할 구역이 바뀌며 일의 양도 줄었다. 시간대도 많이 나아진 편이다.
일과가 끝나면 낮 시간엔 보통 뭘 하나?
운동 가고, 기타 친다. 직접 만든 곡으로 이따금 밴드 공연도 한다. 〈기타미화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기타 치는 영상이나 환경 공무관 일과 관련된 영상들도 업로드하고 있다.
음악인의 기준에선 나름 프리랜서다. 본업이 끝난 후 시간 관리하는 것이 어렵진 않은지.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MBTI 끝자리가 J다. 잠깐 찾아오는 영감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창작도 연습도 그런 마음으로 임한다.
사람 만날 시간이 부족하진 않나?
정상적인 근무 시간이 아닌 건 사실이다. 대부분 친구들은 나인투식스로 일하니까. 야간에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토요일 저녁, 딱 하루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친구들도 다 바빠졌다. 서로의 삶이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울 때가 많다.
돈을 많이 안 쓰는 점은 좋을 것 같다. (웃음)
그것도 맞다. 하지만 제일 걱정되는 건 결혼 후의 삶이다. 현 여자친구와 근무 시간이 완전히 어긋난다. 낮 1시에 퇴근하고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점에서 좋지만, 여자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도 가끔 한다. 근무 시간 때문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환경 공무관도 연차나 육아 휴직의 개념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가 쉬는 동안 나의 몫만큼 누군가 더 일해야 한다. 함께 일하는 팀원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는 분위기는 아직 아니다. 그래서 근무 시간이 점점 늦춰지는 추세를 기대하고 있다. 예전엔 밤 12시에 시작해서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면 이제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하고, 근무 시간대도 점점 낮 시간과 겹치고 있다. 현재는 아침 4시 출근이지만 아침 6시 출근, 좀 더 늦추면 아침 9시까지도 미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내 돈은 내가 지킨다
근로 소득만이 답이던 시대는 일견 막을 내린 듯하다. 혹시 본업 외 주식도 하는지.
안 한다. 몰라서 못한다.
공부하면 되지 않나. (웃음)
한때 조금 공부해서 연습 삼아 삼성전자 주식 하나 산 적 있다. 그 정도였다. 성격 자체가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타입이기도 하다. 주변에 주식으로 돈 잃은 사람도 많이 봐서 좋지 않은 인식이 크다. 게다가 내 월급은 내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국민의 피땀이 어린 세금이기도 하다. 그런 돈을 잃고 싶지 않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살면 안 되는 때인 것 같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 때’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요즘 주식 말고는 서울에서 집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나. 투자 분야에 뚜렷한 지식이나 센스가 있다면 무조건 해볼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아니니 그냥 더 열심히 벌어서, 더 많이 저축하련다. 돈 욕심은 없는 편이지만 내 돈만큼은 지키고 싶다.
돈을 모아서 하고 싶은 게 있는지?
시간만 허락이 된다면 여행을 다니고 싶다. 새로운 곳을 탐방한다기보단 동남아시아 같은 따뜻한 나라에 가서 휴양하고 싶다.
의외다. 집 욕심은 없나.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있으면 좋긴 하겠다. 하지만 꼭 서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돈만 많다면 시골에 가서 별장을 짓고 싶다. 인생의 최종 목표는 그거다. 은퇴 후 내가 지어 놓은 별장에 가서 쉬는 것.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가 우주 탐험을 마치고 지구에 돌아왔을 때, 후손들이 그가 살던 집을 복원해 놓은 장면이 있다. 쿠퍼가 그 앞 테라스에 앉아 옛날 생각을 하며 맥주 한잔하는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다. 서울? 아파트? 차? 큰 욕심 없다.
환경 공무관으로 언제까지 일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60대 중반의 정년까지는 꼭 채울 것이다.
지금부터 60대까지면 거의 30년을 같은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아득하진 않은지.
같이 일하는 환경 공무관 선배들이 종종 놀린다. “너는 이 일을 앞으로 30년이나 해야 되네, 좋겠다”와 같은 식으로. 그런데 나는 큰 감흥이 없다. 애초에 현실적인 이유로 시작한 직업이기 때문에 일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리고 30년이라는 시간이 사실 너무 길다 보니 그런 먼 미래까지 내다볼 겨를이 없다.
은퇴하면 새롭게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화물차를 한번 몰아 보고 싶다. 화물차 기사분들은 회사 소속도 있지만 대부분 개인이라 들었다. 출퇴근도 자유롭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것이 부러웠다. 정해진 고속도로를 생각 없이 달린다는 게 나라는 사람과도 잘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마음으로는 30년간 열심히 돈을 모아, 은퇴 후에는 평생을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