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찰스 3세의 멋진 하루
완결

2014년, 찰스 3세의 멋진 하루

우리는 지금 찰스 3세의 영국을 생각한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청사진을 그려보고 있었다.

ⓒPhotograph: David Levene

2014년 9월 15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의 이슬람국가(IS)를 상대로 세계 최강인 미국의 군사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자신의 참모들과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미국의 주영대사인 매튜 바전(Matthew Barzun)은 영국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서 질소 고정(nitrogen-fixing)[1] 식물과 소에게서 나타나는 무증상 유방염의 위험성에 대해 배우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그런 일정을 보냈던 이유는 단순했다. 바전 대사는 찰스 왕세자의 유기농 홈팜(Home Farm)을 방문했던 것이다. 갓 포장을 벗긴 헌터(Hunter) 부츠를 신은 바전 대사는 소똥 사이를 돌아다니며 유기농 붉은토끼풀(red clover) 밭을 자세히 살펴보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지난 34년 동안 찰스 왕세자는 이 농장에 상당한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곳은 자연계부터 세계화된 경제까지,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농업적으로 구현된 곳이다. 겨울철 주말이 되면 찰스 왕세자가 사랑하는 전통 농업 기법을 살리기 위해 군데군데 덧댄 트위드 소재의 작업용 코트를 입고 농장에 울타리를 두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울타리 작업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2005년에 이곳에서 전국 울타리 치기 선수권 대회(National Hedgelaying Championships)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농장에는 찰스 왕세자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한쪽 들판에는 에어셔(Ayrshire) 젖소 무리가 있다. 찰스 왕세자는 흔해 빠진 ‘흑백 얼룩소’를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후 에어셔 젖소들을 구입했다.

그날 아침 이곳 왕실 농장의 비공개 투어 일정에 초대된 유력 인사는 바전 대사만이 아니었다. 영국 환경식품농촌부(DEFRA)의 수석과학자문위원인 이언 보이드(Ian Boyd) 교수, 브리스톨의 민선 시장인 조지 퍼거슨(George Ferguson), 영국 최대의 유통업체인 테스코(Tesco)에 자문해 주는 홍보 회사 브런스윅(Brunswick)의 회장 앨런 파커 경(Sir Alan Parker)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환경식품농촌부와 비즈니스혁신역량부(BIS)의 공무원들이 그들과 동행했으며, 왕세자의 친구이자 유기농 활동가인 패트릭 홀든(Patrick Holden)과 찰스 왕세자의 농장 관리자인 데이비드 윌슨(David Wilson)이 그들을 안내했다.

이날의 행사는 홀든의 서스테이너블 푸드 트러스트(Sustainable Food Trust, 지속 가능한 먹을거리 신탁)가 주최했다. 그러나 그날 화두에는 산업화된 농업은 우리의 환경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거대하면서도 위험한 실험이며 소작농들에게는 생계의 위협이 된다는 찰스 왕세자의 견해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찰스 왕세자가 가진 권력 네트워크의 한 갈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들이 대중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영국의 가장 막강한 유력인사들 몇 명과 함께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986년에 그가 자신의 식물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밝혔던 유명한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데, 당시에는 떡갈나무들이 토양을 통해서 동족과 의사소통을 하는지에 대해 짧게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좀 더 최근에 그는 자신이 실제로 “식물들을 훈육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홀든과 윌슨이 과학적이라며 이야기한 일부 주장들, 특히 육류에 포함된 항생제의 위험성에 관한 이야기는 몇몇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대체로 수용적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찰스 왕세자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들에 대하여 줄기차게 로비를 펼치고 캠페인을 하면서 엘리트 활동가라는 독특한 지위를 스스로 다져왔다. 농업에서부터 건축과 의료, 환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언제라도 그의 견해와 경고와 불평을 들을 수 있다. 그는 글쓰기와 연설을 통해서, 자선활동과 우군들을 통해서, 그리고 막후에서는 비공개 회동이나 정부 각료들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한다. 그의 개입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가 대체 의학(代替醫學)[2]에 대한 임상 시험을 하도록 찰스 왕세자와 함께 로비를 펼쳤던 전직 각료 피터 헤인(Peter Hain)은 그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대체 의학 분야의 수많은 다양한 협회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고급스러운 로비를 하더라도 확보하기 어려웠던 발언권을 그는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검은색 잉크로 직접 쓴 편지는 그가 로비를 하면서 휘두르는 핵심적인 무기이다. 그가 사용하는 왕실열차(British Royal Train)의 객차[3]에는 책상과 압지(壓紙)[4], 그리고 붉은색 문장(紋章)이 새겨진 왕실의 편지지들이 구비되어 있는데, 왕세자는 이 편지지에 ‘검은 거미 메모(black spider memo)’[5]를 휘갈겨 쓴다. 그는 밤늦은 시간이든, 저녁 만찬의 손님이 떠난 다음이든, 심지어 3만 5000피트 상공에 있는 왕실 제트기에서든, 가능할 때면 언제나 이 메모를 작성한다. 이와 관련하여 패트릭 홀든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와 함께 여행을 다녀 봤는데, 이륙 후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에도 그는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택에서는 저녁 식사 후에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지난주에 만 66세가 된 왕세자는, 때로 밤늦게 편지를 작성하고 매우 지쳐 책상에서 잠든 채 발견되기도 한다.

그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것도 그의 습관 때문이었다. 영국 대법원(UKSC)은 2014년 11월 24일과 25일에 찰스 왕세자가 각료들에게 보낸 편지를 비공개로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판을 열 예정이다. 이 사건은 정보공개법을 두고 본지 가디언과 영국 정부가 9년 동안 벌여온 법적 분쟁의 마지막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05년에 본지는 찰스 왕세자가 2004년과 2005년에 각료들에게 쓴 편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이를 거부했지만, 찰스 왕세자가 여덟 달 동안 다수의 부처에 27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밝혔다. 2012년 10월, 당시 법무 장관이었던 도미닉 그리브(Dominic Grieve)는 해당 편지들의 공개를 재차 거부하면서, 이를 공개하면 국민들이 찰스 왕세자가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미래의 군주인 그의 역할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것이다. 만약 현재 왕위 계승자인 그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이미지를 상실한다면, 국왕이 된 후에도 그것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왕세자와 각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다룬 경험이 있는 정부의 최고위 관료였던 그는 서신의 공개로 인해 찰스 왕세자의 왕권에 가해지는 위협이 “상당히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편지는 상당히 많으며, 그중에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편지들도 있다”고 말했다.
‘검은 거미 메모’란 무엇인가? ⓒGuardian
데일리 메일(Daily Mail) 측에 유출된 2002년 2월의 편지 한 통에서는 찰스 왕세자의 공격적인 접근법이 드러났다. 당시 노동당 내각의 대법관(Lord Chancellor)이었던 어빈(Irvine) 남작[6]에게 작성한 편지에서, 그는 1998년에 제정된 영국의 인권법(Human Rights Act 1998)을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이 법안은 그저 개인의 권리에 대한 것이며(거기에 일련의 사회적 책임들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걸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 사고와 법률적 사고 안에서의 근본적인 왜곡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01년 6월에 작성하여 어빈 남작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이 법안에 대한 자신의 우려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법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명분을 챙기도록 장려할 뿐이며, 이는 온전하고 고상하며 질서정연한 생활의 추구를 훨씬 더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개인의 피해를 중시하는 미국식 문화가 이 나라에 점점 더 퍼질 현실적이고 큰 가능성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낍니다.”

설령 그 편지들이 공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찰스 왕세자가 국왕이 된 후에도 의욕적으로 활동을 지속할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 스스로가 캠페인 방식의 접근법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찰스 왕세자는 자신의 이러한 활동을 “종횡무진(mobilising)”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오지랖(meddling)”이라고 부른다. 영국에는 ‘왕실은 그저 상징적인 권력일 뿐 그것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는데, 그들은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왕세자의 개입이 그러한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본다. 찰스 왕세자는 왕위를 계승하기까지 이전의 그 어떤 후계자들보다도 더욱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그의 기다림이 최종 단계에 다다르고 있는 가운데, 그가 마침내 국왕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본능을 어떻게 쏟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의 궁정에서, 화이트홀(Whitehall, 영국 정부) 내에서, 그리고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점점 더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되고 있다. 입헌군주제를 완전히 수용하여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엄격하게 침묵했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과는 매우 다른 군주제에 대비하고 있다. 찰스 왕세자의 친구들은 그가 지적이고 세심하며 성실하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왕이 서거하는 날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조너선 딤블비(Jonathan Dimbleby)는 2013년에 이렇게 말했다. “헌법적으로 조용한 혁명이 임박해 있습니다. 저는 그가 지금까지의 그 모든 입헌군주들이 시도했던 것들을 훨씬 뛰어넘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체스터 성당(Chester Cathedral)을 방문한 찰스 왕세자. ⓒPhotograph: David Levene

 

행동하는 왕세자


지금까지 찰스 왕세자의 삶은 70년간의 기다림으로부터 어떻게 의미를 빚어내는가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삶을 규정하는 질문은 ‘이러한 불분명한 역할을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오랜 기다림이 끝났을 때 그가 어떻게 군림할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도 만들어냈다.

찰스는 역사(B학점)와 프랑스어(C학점) 등 2과목에서 (영국의 대학입학자격인) A레벨(A-level)을 취득하여 1967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의 트리니티칼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했다. 그는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에서 2:2등급(Second Class, Lower division)의 우등학위(honours degree)를 받고 졸업했다. 1970년 무렵에 그는 카밀라 샌드(Camilla Shand)를 만났고, 이후 10년 동안 그에게는 여러 명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1981년에 그가 다이애나 스펜서(Lady Diana Spencer)와 약혼할 당시에 카밀라는 영국군의 기병장교였던 앤드류 파커-보울스(Andrew Parker-Bowles)와 결혼한 상태였다. 이때부터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로도 만들어지는 왕실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다.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에서 결혼식이 열렸고, 두 명의 왕자가 태어났으며, 부부 양측의 불륜이 있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고, 그러다 파리에서 다이애나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이 들려왔으며, 국가적인 추도 분위기가 형성됐고, 장례식에서는 엘튼 존(Elton John)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언론에서 부정적인 기사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지며 왕실의 평판이 무너져 내렸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찰스 왕세자는 사상과 영성의 세계에 몰두하면서 지적인 삶을 병행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20세기의 한 가운데인 1948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서양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의 시대(Age of the Machine)가 서서히 밝아오던 와중이었다.” 그가 2010년에 작성한 《조화: 우리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Harmony: A New Way of Looking at Our World)》이라는 저술에 쓴 내용이다. “1950년대 중반이 되자 전후 모더니즘의 파도를 타고 정신없는 변화들이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중략) 1960년대가 되자 산업화된 국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무한한 편리의 시대(Age of Convenience)가 될 거라고 상상했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당시 10대였던 나조차도 위험할 정도로 근시안적인 접근법이 될 수도 있는 것들 때문에 심히 불안감을 느꼈다.” 70년대가 되자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고, 찰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전통적인 사회였다면 매우 심오하게 느꼈을 신성한 존재들에 대하여 우리가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걸 매우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조화: 우리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책에서 찰스 왕세자가 펼쳐 보인 생각들은 아찔할 정도로 방대하며, 때로는 일종의 신비주의(mysticism)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는 “생애 전체를 뒷받침하는” 이슬람 미술의 “문법”에 대하여, 정원과 자연의 “마법적인” 리듬에 대하여, 기독교 도상학(iconography)의 영속성과 16세기 독일 천문학의 대칭성에 대하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영원법(eternal law)[7]에 대하여, 인도의 베다(Veda) 전통에 대하여, 중국의 도교(道敎)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더욱 큰 법칙 사이에 조율을 이루려 노력하고 그것을 성취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에 관심이 많았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어느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합니다. 그는 밤 시간이든 일정이 없을 때든 여행을 할 때든 언제나 폭넓고 깊게 탐독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닙니다. 그는 주로 논문을 읽는데, 그에게는 언제나 많은 논문이 들어옵니다. 만약 조지아대학교에서 21세기의 농업을 주제로 발표한 새로운 논문이 들어오면 그는 그걸 읽고, 내용을 이해한 다음, 그에 관해 누군가에게 쪽지를 보냅니다.”

1984년에 찰스 왕세자는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의 증축 계획에 대하여 “너무나도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에 생겨난 무시무시한 종기 덩어리 같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현대의 건축에 대한 필생의 전쟁을 개시했다. 결국 이 계획은 철회되었다. 5년 뒤, 그는 《영국의 비전(A Vision of Britain)》이라는 고상한 제목의 책을 집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1960년대의 도시 재건축이 그에게 어떤 믿음을 갖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중략) 그것은 수많은 가치들을 파괴하고 유행이라는 미명하에 소중한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갖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침묵하는 다수가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체스터턴(G. K. Chesterton)의 시를 인용해 말했다. “우리 영국 국민들은 지금까지 제대로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찰스 왕세자는 자선활동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처럼 후견인으로서가 아니라, 1979년에 자신이 설립한 자선 재단의 찬조 하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St James’s Palace)에서 자선 행사를 총괄하는 등 자선 단체의 이사장으로서 직접 회의를 주재했다. 건강, 일, 환경, 건축 등의 분야에서 자신의 믿음을 설파하면서 그의 조직 네트워크는 매년 1억 파운드의 기금을 다루게 됐다. 헤지펀드 업계의 억만장자인 마이클 힌츠(Michael Hintze)와 같은 친구들이 돈을 기부했고, 정부도 보조금을 제공했다. 찰스 왕세자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의 대표였던 토니 주니퍼(Tony Juniper)와 같은 전문가들을 자신의 자문 위원으로 위촉하기 시작했다.

세인트 제임스 궁전은 권력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일종의 거대한 응접실이 되었다. 찰스 왕세자가 삼림 파괴를 제한하고 기후 변화를 줄이기 위한 계획들을 제안하려 2009년에 개최한 ‘열대 우림 정상 회의(rainforest summit)’에는 당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대통령, 당시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국무 장관, 당시 UN의 반기문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찰스 왕세자는 자신의 궁정을 일종의 싱크탱크로 재정비했는데, 이 조직은 그를 따라서 버킹엄 궁전에도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찰스 왕세자와 알고 지내온 어느 관계자에 따르면, 건축, 도시 재생, 비즈니스, 환경 분야의 전문가들이 고용되어 있는 자선 네트워크의 규모가 작아지긴 하겠지만 “선제적이며 기업적인 면모”는 유지될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찰스 왕세자의 이러한 의욕적인 활동에는 단지 그의 성격만이 아니라 그가 태어난 시대상도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턴(Gordonstoun) 학교에 다닌 영국 최초의 군주가 될 텐데, 그는 훗날 이 학교를 두고 마치 “(스코틀랜드 전통의) 킬트(kilt) 의상을 입은 (나치 독일의) 콜디츠(Colditz) 수용소 같았다”라고 설명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에드워드 7세의 가정에서 자랐다. 이곳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남자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여성들이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관례였다. 반면에 1960년대 말에 성년이 된 찰스 왕세자는 자신의 독특한 역할이 제공하는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질 수 있었다.

찰스 왕세자는 자신이 왕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는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발언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보좌관들은 언제나 그것이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슬픈 가족사에 대한 논의가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의한 장기적인 결과들에 대해 생각해 보려는 그의 열의는 물론이고, 그의 저술 활동이나 수많은 공개적 개입을 통해서 표출된 그의 사상들을 결합해 보면 한 가지의 단서가 도출된다. 2010년에 그는 NBC 뉴스의 진행자에게 자신이 “어떠한 목적을 갖고 이 위치에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저는 손주들이 자라나서 이렇게 말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대체 왜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체스터를 시찰하고 있는 찰스 왕세자. ⓒPhotograph: David Levene

 

입헌군주의 덕목


때로 찰스 왕세자는 자신이 가진 지위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21세기의 입헌군주에게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다. “찰스 왕세자와 그 어머니 사이의 대표적인 차이라면 여왕은 이러한 사안들에 대하여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총리와의 비공개 면담[8]에서만 그 문제를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정부의 고위관료였던 어떤 사람의 말이다. “찰스 왕세자는 훨씬 더 적극적이며, 주류의 언저리에 있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편지를 씁니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그에 따른) 리스크도 감수합니다. 그는 (여왕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2012년 초부터 (2014년 11월까지) 찰스 왕세자는 정부 각료들과 27차례의 회의를 주재했다. 논의 안건에 대해서는 왕실과 화이트홀 모두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우리는 그가 이전에 NHS의 정책에 대하여, 여우 사냥에 대하여[9], 영농 정책에 대하여, 그래머스쿨(grammar school)[10]에 대하여, 인권법에 대하여 각료들에게 로비를 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찰스 왕세자가 거주하는) 클래런스 하우스(Clarence House) 측은 이러한 회의들이 왕세자가 “정부의 운영 현황을 파악하고 각급 부처 및 고위 관계자들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그가 국왕이 된 후에도 이러한 회의가 필요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찰스 왕세자는 오랫동안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수많은 정치인을 우군으로 받아들여 왔다. (식민지 케냐 태생의) 피터 헤인(Peter Hain)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 정책)를 반대하는 활동가 출신으로 2002년에 웨일스 국무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les)[11]이 되었는데, 찰스 왕세자는 그 이후에 피터 헤인을 알게 됐다. 당시에 헤인은 왕세자에게 매년 두 차례 간략한 보고 자료를 보내서 웨일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왕세자에게 알려줬다. 이후 그는 글로스터셔에 있는 찰스의 하이그로브(Highgrove) 저택과 런던의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왕세자를 단독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체 의학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NHS에 대체 의학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군의 동조 세력을 조직했다. 헤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엔 그냥 이야기만 나눴을 뿐입니다. 그러다 결국 저는 웨일스의 보건부에서 시범 사업을 시행해 보려 했습니다. 물론 접골사, 척추 지압사, 영양사, 동종 요법(homeopathy)[12] 치료사, 침술사 등 검증되고 인정받은 대체 의학 치료사들을 공중보건의(GP)들이 활용할 수 있는 분야에서 말입니다.”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으나, 2007년에 북아일랜드 국무 장관[13]이었던 헤일이 시범 사업을 개시했고, 이는 왕세자를 ‘극도로 전율하게’ 만들었다.

찰스 왕세자는 헤인의 프로젝트가 진척되는 상황을 세심하게 지켜봤다. 그는 라디오4(Radio 4)의 ‘투데이(Today)’라는 프로그램에서 했던 헤인의 인터뷰를 귀 기울여 청취한 다음, 그의 성과에 대해 피드백을 전달했다. 헤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보건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조직 내의 동료들을 설득하여 (대체 의료의 효능에 대해) 동일한 유형의 시범 연구가 시행되도록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주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 측에 접근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편지 쓰기와 회의 등이 포함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저를 격려했고, 저는 그를 격려했습니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은 클래런스 하우스의 위층에 있는 다이닝 룸에서 부부 동반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헤인의 말에 따르면, 의전상의 격식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스 왕세자는 “유머가 풍부”했으며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손님들이 왕실의 저장고에서 꺼낸 와인을 즐길 때면, 찰스 왕세자는 무알콜 음료를 홀짝였다.

헤인과의 동맹 관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채널을 통해 기울인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세자의 캠페인은 먹혀들기 시작했다. 2005년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통합건강재단(FIH)이 마사지, 아로마 테라피, 반사 요법(reflexology)[14] 등을 비롯한 대체 치료의 규제에 대해 자문해 주는 대가로 보건부로부터 11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받기 시작했다.

올덤 웨스트 및 로이튼 지역구의 하원의원(MP)이었으며 당시 환경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미처(Michael Meacher)도 1997년부터 2003년 사이에 내각에서 찰스의 우군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국 내에서 유전자 조작(GM) 작물을 상업적으로 재배하는 걸 허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거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8년에 찰스 왕세자는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와의 인터뷰에서 GM 작물의 개발이 “환경적으로는 역대 최악의 참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까지 총리를 지냈던) 토니 블레어는 GM 작물에 호의적이었으며, (노동당 내의 절친한 동료였던)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에게 찰스 왕세자의 로비가 “유익하지 않다”라고 불평했다. 훗날 맨델슨은 찰스 왕세자의 로비가 “개발도상국들에서 식량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비과학적이며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왕세자의 견해에 동조적이었던 미처는 곧바로 하이그로브 저택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우리는 함께 하이그로브의 정원을 통과해 걸어갔는데, 어느 특정한 장소에 도착한 순간 제가 그와 단둘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게 계획된 수순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하여, 유기농업에 대하여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목표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했고, 두 사람 모두 그 목표를 위해 할 수 있는 걸 해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왕세자가 참석하는 연찬회에서 미처는 이따금 “그의 보좌관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왕세자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미처는 그런 초대를 받으면 “너무나도 기뻤다”고 말했다. 그가 내각에 재직하는 동안 찰스 왕세자는 미처에게 기후 변화와 환경에 대한 내용으로 ‘격려하는’ 편지를 여덟 번에서 아홉 번 정도 썼다.

찰스 왕세자의 기세가 최근 몇 년 동안 누그러졌다는 신호는 보이지 않는다. 2014년 초부터 11월까지 찰스 왕세자는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영국 총리,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 영국 재무 장관, 앨릭스 샐먼드(Alex Salmond) 스코틀랜드 행정 수반(first minister)을 포함하여 영국 및 스코틀랜드 정부에서 모두 아홉 명의 각료들과 회의를 가졌다. 2014년 9월에는 불과 사흘 동안 당시 환경부 장관이었던 리즈 트러스(Liz Truss)[15], 주거부 장관이었던 브랜든 루이스(Brandon Lewis)[16], 교통부 장관이었던 존 헤이즈(John Hayes)[17]를 만났다. 또한 하이그로브 저택에서 수많은 저녁 만찬을 가지면서 편지도 꾸준히 쓰고 있으며, 자신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15개의 자선 재단을 통해서 캠페인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종횡무진’하는 찰스라는 기계는 최고의 전력으로 가동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가 국왕이 된 후에는 이러한 통제권을 기꺼이 내려놓을까? 영국 하원의 정치 및 헌법 개혁 특별위원회(Political and Constitutional Reform Select Committee)에 소속되어 있는 폴 플린(Paul Flynn) 의원[18]은 만약 그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군주와 의회 사이에 거대한 갈등”이 생길 것을 예측했다.
체스터 외곽의 레이취(Lache)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찾아간 찰스 왕세자, 그는 1972년에도 이곳을 방문했었다. ⓒPhotograph: David Levene

 

왕세자와 국왕의 차이


2014년 9월 따뜻했던 어느 날, 벤틀리(Bentley) 차량에 타고 있던 찰스 왕세자와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19]은 체스터에 있는 공공 주택 단지에서 내렸다. 그들은 그날 아침에 런던의 노솔트(Notholt) 공군 기지에서부터 개인 제트기를 타고 이곳으로 날아왔다. 당시 차량의 뒷좌석에는 벤틀리 특유의 크림색 가죽 시트가 불편하게 느껴질 것을 대비하여 ‘부부용’ 쿠션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찰스 왕세자가 이날 체스터에 온 이유는 민생 시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방문지는 레이취(Lache)라는 교외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였다. 찰스 왕세자는 이곳에 도착한 지 불과 몇 초 만에 세로 줄무늬 정장을 입거나 머리 장식을 꽂고 줄지어 서있는 고위 인사들에게 허스키한 바리톤의 목소리로 정신없이 인사말을 건넸다. 많이 긴장했던 사람들에게도 찰스 왕세자는 느긋해 보였다. 그의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착용한 정장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어쩐지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무심한 듯 보였던 그는 노련하게 환영 인파 속에서 사람들을 골라내어 그들 각자와 잠깐씩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틈틈이 유머를 구사했고, 특유의 중독성 있는 웃음도 자주 터트렸다.

이곳에서 한 것처럼 매일 15분 안에 20명을 상대로 간단한 대화를 해야 한다면 분명 찰스 왕세자는 굉장히 지루한 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찰스: “이 구근(球根, 화초의 뿌리)은 어떤 건가요?”
교사: “봄꽃 구근입니다.”
찰스: “오, 잘 가꾸었군요.”

(그가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지만) 만약 그가 지루함을 느꼈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는 그가 이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1972년이라고 새겨져 있었으니, 실로 오랜만의 재방문이었다.

학교의 정문 밖에서 필자는 지역 주민들에게 찰스의 왕위 승계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자 우리는 순식간에 최근의 기억에서 영국 왕실에 최악의 시기가 닥쳤던 1990년대로 소환됐다. 지방 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74세의 존 스코필드(John Schofield)는 가스 수리 기사로 일하는 이웃인 47세의 브라이언 윌리엄스(Bryan Williams)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왕세자의 차량 행렬이 지나갔다. 스코필드는 왕실 가족들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저분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이혼을 했기 때문에 왕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윌리엄스도 동의했다. “다음 왕위는 한 세대를 건너서 내려가야 합니다.” 그의 말이다. “제 생각에 찰스 왕세자는 너무 늙었고,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에서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아주 높이 평가했고, 그녀가 대변하던 모든 덕목은 그녀의 아들들에게 있습니다.”

리서치 기업인 컴레스(ComRes)가 2014년 6월에 실시한 인기도 조사에서는, 만약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군주제에 대한 대중적인 호감도가 현저하게 하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찰스에 대한지지 여론은 43퍼센트였던 반면에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지지 여론은 63퍼센트였다. 필자가 대화해 본 한 전직 장관은 사람들이 그에게 비호감을 갖는 이유 중 가장 커다란 요소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관계 때문이라는 대중적인 견해에 동의했다.

“군주제를 진심으로 신경 쓰는 대도시권 바깥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상당히 분개하고 있습니다.” 《타임(Time)》의 선임 에디터인 캐서린 메이어(Catherine Mayer)의 말이다. 그녀가 쓴 찰스 왕세자의 전기[20]는 2015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그들은 찰스 왕세자가 냉소적이고 노련하며, 훨씬 더 어린 신부와 결혼했다가[21] 그녀에게 못되게 대했던 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찰스 왕세자는 자신이 대중 사회의 정치적인 측면에 관여해야 하는 공공의 사명을 갖고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다. 그의 우군들은 정부 측에 관여할 수 있는 그의 권리가 매년 수백 회의 공공 행사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영국 국민과의 심도 깊은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왕세자가 “수많은 사안에 대하여 각료들에게 여론을 전달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라고 말한다.

2010년에 그는 카타르 왕실이 소유한 런던 한복판의 첼시 병영(Chelsea Barracks) 부지에 대하여 유명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가 추진하던 30억 파운드 규모의 현대식 재개발 프로젝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카타르 총리에게 이 프로젝트는 런던을 “파괴”하는 또 다른 유형의 “브루탈리즘(brutalism)[22]” 개발이라며 비판했던 것이다. 당시 찰스 왕세자의 개인 비서였던 마이클 피트 경(Sir Michael Peat)은 “쉽게 들을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의 의견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도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는 찰스 왕세자와 의견을 달리했다. 이와 관련한 고등 법원 사건을 담당했던 제프리 보스(Geoffrey Vos) 판사는 찰스 왕세자의 개입이 “예상치 못했으며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어디까지 목소리를 내야 할까? 2014년 5월에 캐나다 순방에서 그는 당시 고조되던 우크라이나 위기[23]에 대해서 성토했다. 그는 나치를 피해 건너온 78세의 유대계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지금 히틀러와 똑같은 일을 벌이려 하고 있습니다.” 푸틴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국왕으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라고 했다. 영국 외무부의 외교관들은 아연실색했을지도 모르지만, 리서치 기업인 유가브(YouGov)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51퍼센트의 영국인들이 해당 발언을 적절하다고 말했으며, 이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비율은 36퍼센트에 불과했다.

찰스 왕세자를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가 국왕으로서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신중한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들이 지난 40년 동안 봐온 그 모습이 바로 찰스 왕세자의 본모습입니다.” 오랫동안 찰스 왕세자를 알고 지내온 또 다른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충실할 것입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기틀을 다져놓은 군주의 모습에 맞춰서 자신을 완전히 개조하기보다는, 자신의 진심 어린 개입을 꾸준히 시도하는 전략을 취할 것입니다. 비록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개입이 군주제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인지 그 내용과 어조를 일일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새로운 개입 원칙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한다. “가령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은 테스트를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상해 보일까? 혹은 이 발언이 위험해 보일까?’”

그의 우군들은 우려할 만한 이유가 없다며 안심시킨다. 우선, 그들은 찰스 왕세자와 그의 직원들이 이미 정부와 긴밀하게 협업하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클래런스 하우스의 팀원들은 찰스 왕세자가 정부의 정책에 관해 발언할 때는 일반적으로 장관 측의 보좌관들과 미리 그 내용을 공유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국 남부의 범람에 대한 정부의 늦은 대응에 관련해 2014년 2월에 찰스 왕세자가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24] 화이트홀이 승인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또한 그들은 찰스 왕세자가 국왕이 되면 ‘종횡무진’할 만한 여유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영국 군주의 일정은 매일 국정 관련 문서가 담겨 전달되는 레드박스(red box) 확인과 각종 수여식, 그리고 새로 취임하고 떠나가는 수많은 외교관 및 성직자와의 공식 회의 등으로 이미 빼곡하게 짜여 있다. 왕세자가 활동적인 성향임을 보여 주는 아주 많은 증거를 보면, 그가 하루 종일 이런 정적인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여전히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어느 관계자는 그러한 우려를 일축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거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개인적인 자리가 되면 찰스 왕세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잘 모른다며 어려움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국가의 수장이 된다는 것이 (왕자로 지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안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겁니다.”

어느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헌법 체계 안에서 군주의 역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정치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군주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세력이 분열돼도 괜찮습니다. 그들 각자가 국가를 대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5년 주기로 생각하지만, 군주는 장기적으로 생각합니다.”

환경부 장관이었던 마이클 미처는 찰스 왕세자가 국왕이 되면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처는 그러한 과정이 더욱 투명해야 하며, 국민들은 “국왕이 어떤 사안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담당 장관에게 편지를 썼는지 그 여부에 대하여 알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찰스 왕세자가 그런 행위들을 모두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면, 평소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는 강력한 조언들을 받게 될 것입니다.” 화이트홀의 최고위 관료였던 어떤 사람의 말이다.
찰스 왕세자가 체스터 대성당 밖에서 콘월 공작부인 및 그레이스(Grace)라는 이름의 검독수리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graph: David Levene

 

공화주의자들의 상상


찰스 왕세자가 체스터를 방문하기 전날 밤, 선거를 통해서 국가 원수를 뽑아야 한다는 전국적 캠페인을 펼치는 단체인 리퍼블릭(Republic)의 회원 4명이 올트링엄(Altrincham) 외곽의 깔끔한 교외 주택에서 당근 케이크에 차를 마시면서 군주제의 종식에 대하여 모의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급진적 정치 성향을 보여 온 맨체스터와 리버풀에서 가까운 이 지역이 리퍼블릭에게는 일종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지만, 지역 내 정규 활동가는 아직도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모임이 열린 주택의 내부에는 각종 전단지와 ‘평등하게 태어났다(#bornequal)’고 적힌 배지들이 주방의 테이블에 쌓여 있었고, 공화국을 요구하는 배너가 장난감 위에 걸려 있었다. 리퍼블릭의 회원들은 크롬웰(Cromwell) 통치 시절(1640~50년대)에 활약했던 정치 개혁가인 제러드 윈스탠리(Gerrard Winstanley)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위건 디거스(Wigan Diggers) 축제와 ‘더 나은 삶을 살기(Live a Better Life)’라는 비건 축제에서 가판대를 운영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영국 왕실이 사냥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로 계획했다.

이 단체의 활동가들은 영국에서 공화주의가 여전히 금기시된다고 말한다. 지난 10년 동안 실시된 설문 조사를 보면, 영국이 공화국으로 바뀌는 걸 지지하는 사람들은 겨우 10~20퍼센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회원들은 공화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커밍아웃하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이 단체의 활동가인 테리 베이츠(Terry Bates)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흐른 뒤에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저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베이츠에게는 사람들로 가득한 위건(Wigan)의 럭비 리그 경기장에서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 그는 영국의 국가가 연주될 때에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기로 결심했다. “경기장을 찾아온 3만 2000명의 관중들 앞에서 제 나름의 시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TV에서 국가가 들리면 밖으로 나와 버립니다.”

베이츠는 찰스 왕세자가 공화주의에 대한 명분을 가져오는 데에 유용한 “모병 장교”라고 한다. 전직 간호사였던 36세의 헬런 게스트(Helen Guest)도 여기에 동의했다. “사람들이 ‘신이여 국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25]를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왕세자 부부가 이날 두 번째 행사를 가졌던 체스터 대성당의 펜스에 바짝 기대어 운집한 베이지색 옷을 입은 중년층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였을 것이다. 찰스와 카밀라는 여러 사람들과 악수했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사람들이 건네는 선물도 받았다. 찰스 왕세자의 우군들에 따르면, 윌리엄 왕세손 및 케이트 미들턴(Kate Middleton) 왕세손비에 대한 이야기[26]가 찰스 왕세자에 대한 관심을 ‘가리면서’ 여전히 찰스 왕세자의 핵심적인 지지층인 베이비부머 세대에서의 인기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고 한다. 체스터에서는 그가 악수를 한 번 나눌 때마다 지지세가 더욱 굳건해지는 것 같았다.

성당의 안쪽에 들어서자 찰스 왕세자의 생활에서 이상한 측면이 뚜렷하게 보였다. 실내의 한쪽 구석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휴버트 패리(Hubert Parry)의 곡을 성가대가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15년 전에 설치한 현대식 성가대석을 향하는 그의 눈빛이 탐탁지 않아 보였다. “썩 좋은 연주는 아니군요.” 왕세자가 성당의 고위 성직자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비평하는 시간을 좀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의 코너에는 머시아 연대(Mercian Regiment)의 병사들이 왕세자와의 악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뒤쪽에는 나름 진지한 아마추어 연기자들이 종교극 일부를 시연하기 위하여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성서의 두건 대신 막스앤스펜서(M&S)에서 판매하는 것 같은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안뜰에 들어선 찰스 왕세자는 그레이스(Grace)라는 이름의 검독수리를 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기품이 도도한 이 새는 조금 전에 필자의 노트에 배설물을 폭발시키듯 비워냈었다.

이날의 일정은 브로튼(Broughton)에 있는 에어버스(Airbus)의 공장에서 비행기 날개 조립 현장을 견학한 후, 산업 인력 양성 프로그램의 연찬회 참석으로 마무리됐다. 이 프로그램은 더 많은 청년이 공학을 배우도록 격려하기 위해 찰스 왕세자가 지원하던 것이었다. 이처럼 세심하게 계획된 민생 시찰 일정에는 아마도 그 자신의 관심사가 반영돼 있었을 것이다. 찰스 왕세자는 이렇게 불과 세 시간 반 만에 이 나라의 교육, 청년, 신앙, 유산, 산업 분야에서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는 전용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한 시간가량의 비행이겠지만, 검은 거미 메모를 서너 개 정도 작성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메모의 내용을 절대로 확인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1]
지구 대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질소를 반응성이 높은 다른 화합물로 변환하는 것
[2]
서양의 주류 의학에서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는 치료 및 시술
[3]
현재 영국 왕실열차의 2922호차가 왕세자의 침대칸이고, 2923호차가 왕세자의 휴게차량이다.
[4]
잉크가 번지거나 묻지 않도록 물기를 빨아들이는 종이
[5]
찰스 왕세자가 검은색 잉크로 거미가 기어가듯 휘갈겨 쓴 메모를 일컫는 말
[6]
본명은 알렉산더 앤드류 맥케이 어빈(Alexander Andrew Mackay Irvine), 줄여서 데리 어빈(Derry Irvine)이라고 부른다. 1987년에 레어그의 어빈 남작(Baron Irvine of Lairg)이라는 일대귀족(life peer) 작위를 받으며 귀족(lord)들로 구성되는 영국의 상원(House of Lords)에 입성했다. 1997년에는 토니 블레어(Tony Blair) 총리에 의해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7]
우주를 지배하는 영원한 신의 섭리
[8]
영국의 총리는 매주 한 차례 국왕을 알현(audience)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 관례이다.
[9]
토니 블레어 총리가 여우 사냥을 금지시키려 하자, 찰스 왕세자는 2002년에 블레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여우 사냥이 친환경적이고 낭만적인 전통이라고 주장하며 금지 법안을 무산시키려 시도했다.
[10]
영국에서 성적 상위권의 학생들이 다니던 중등학교의 한 형태
[11]
연합왕국(UK)의 정부 조직에서 웨일스를 담당하는 장관. 웨일스 자치정부의 행정수반(first minister)과는 전혀 다른 직책이다.
[12]
어떤 질병과 가장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물질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기법
[13]
역시 연합왕국(UK)의 정부 조직에서 북아일랜드를 담당하는 장관이다.
[14]
인체의 특정한 부위에 압력이나 열 자극을 가하여 치료하는 기법
[15]
2022년 9월에 영국의 총리에 취임했으며, 고(故)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기 이틀 전에 마지막으로 알현한 총리이자 찰스 3세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6]
현 리즈 트러스 내각의 법무부 장관 겸 대법관(Lord Chancellor)
[17]
2018년에 교통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2022년 9월 현재는 하원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8]
2019년에 작고
[19]
당시 찰스 왕세자의 부인이었으며 현재는 왕비가 된 카밀라를 가리킨다. 현재 콘월 공작부인이라는 칭호는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인 케이트 미들턴(Kate Middleton)이 갖게 되었다.
[20]
《찰스: 왕의 심장(Charles: The Heart of a King)》
[21]
찰스는 1948년생, 다이애나는 1961년생이다.
[22]
가공되지 않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적극 활용한 건축 양식
[23]
2014년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점령하여 합병한 일
[24]
찰스 왕세자는 상습 범람 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사람들은 꼭 심각한 재난이 발생해야만 뭔가를 시작한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비극이다.”라고 발언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25]
영국(UK) 및 영국연방(Commonwealth)의 국가로, 여왕이 재임하는 경우에는 Queen으로 바꿔 부른다.
[26]
2011년에 윌리엄 왕세손(현 왕세자)과 결혼한 케이트 미들턴은 당시만 해도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연상케 하는 행동과 평범한 중산층 집안 출신이라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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