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제기구
IMF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 중 하나는 설립 당시에 원래 성취하려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초기의 목적으로부터 얼마나 빠르게 이탈했는지다. IMF의 창설은 1944년 7월 브레튼 우즈 컨퍼런스(Bretton Woods Conference)에서 결정됐다. 당시 이 회의에서는 세계 경제의 규칙을 새로 쓰기 위해서 40개국 이상의 대표단이 만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그 상대로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가 주도한 이 회의의 목적은 통화 안정과 자유로운 교역으로 복귀하기 위한 국제적인 금융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각국의 통화 가치는 달러화에 대한 고정이지만 조정 가능한 환율로 설정됐고, 달러화는 금 1온스당 35달러의 고정환율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IMF의 역할은 단기적 국제 수지 문제를 겪는 회원국들을 돕는 것이었다. 협력 기관인 세계은행(World Bank)은 (각국의) 재건 및 개발을 위해 장기 대출을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이같은 원래의 비전에 의하면 IMF는 회원국이 불경기일 때 예산 삭감이나 금리 인상과 같은 고통스러운 정책을 단행하도록 협박하지 않고 무사히 재정 불안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줘야 했다. 이는 각국의 통화 가치를 특정한 양의 금에 고정시킴으로써 19세기 말부터 각 나라들에게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제공했던 이전의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었다. 금본위제도에는 안정성이 있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3] 반면에 IMF의 창설에 관여한 관료들은 케인스가 말했던 “할머니의 권력(grandmotherly powers)”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할머니의 권력이란 회원국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하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심하게 훈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IMF 집행이사회의 유럽 대표들은 전쟁 중 미국과 분명히 합의했음에도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IMF가 예전의 금융 제국주의 시절과 연관된 나쁜 관행을 다시 채택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빌려주는 자금에 대해 대출 약관을 첨부하려는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IMF는 재정 및 통화 정책의 결정과 관련해서 회원국 내부의 민감한 사안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미국 측 대표단은 회원국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달러를 가져가는 걸 경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IMF의 활동에 대해 월등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IMF에서 미국의 특권은 강력했다. 그러나 IMF가 이러한 간섭주의적 권력을 처음 행사한 곳은 유럽이 아니었다. 그곳은 소위 말하는 제3세계로, 칠레, 파라과이, 볼리비아 같은 50년대의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 달러화의 금태환(金兌換) 제도를 없애며 70년대 초에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 IMF가 할 일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들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금세 새로운 존재감을 얻었다. 이런 대출금에는 재정 및 금융 긴축에 더해서 민영화, 탈규제, 관세 철폐 등 주요한 구조 개혁 요구안이 따라왔다. IMF가 이토록 막강해진 이유는 시티은행(Citibank) 같은 시중 은행이나 외국 정부 등의 다른 채권자들이 IMF와의 사전 협의를 그 나라의 신용도를 나타내는 신호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90년대 초에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자, IMF는 직전까지 소비에트의 공화국들이었던 나라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걸 관장했다. 이는 IMF 역사상 가장 야심찬 작업이었다. 정치학자인 랜들 스톤(Randall Stone)의 표현을 빌리자면, IMF는 그 과정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제기구”가 됐다.
그러나 90년대에 IMF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반발이 시작된 곳은 아시아였다.
2. 금융 제국주의의 시대
서구는 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9.11 테러 공격이나 ‘테러와의 전쟁’이 그 사태를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은 사건이었으며, 그 영향력은 이후 25년에 걸쳐서 세계 경제를 재편했다. 그 시작은 1997년 여름이었다. 태국 바트(baht)화의 붕괴가 금융 공황을 촉발했고, 이는 아시아 전체로 빠르게 확산됐다. 투자자들이 휘청거리는 통화들을 하나둘 폐기하면서 이 공황은 계속해서 번졌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그리고 러시아와 브라질처럼 멀리 있는 나라들에까지 대혼란이 일어났다.
IMF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최악의 타격을 입은 나라들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이 사태에 신속히 개입했다. 이런 구제 금융의 대출 조건에는 재정 축소 및 통화 긴축 정책과 같은 IMF의 오랜 요구 사항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 중 어떤 나라도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지 않았고, 해당 국가의 경제를 위기로 치닫게 할 만한 인플레이션도 없었다. IMF는 또한 그 나라들의 경제를 자유화하기 위해 많은 개혁안을 설계하고 강요했다. 그들은 특히 ‘패거리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고 조롱받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형태의 관행과 제도를 해체하고자 했다. IMF는 한국에서 현대 같은 거대한 재벌을 목표물로 삼았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 및 자국의 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장기 집권 독재자인 수하르토(Suharto) 집안의 부를 늘리는 막대한 후견 제도의 근절을 요구했다. 예를 들자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익성이 높은 정향(clove) 생산을 국가가 독점한 채 수하르토의 아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향은 인도네시아에서 인기 있는 크레텍(kretek)이라는 담배의 핵심 원료였다.
IMF는 외환 위기와 관계 없는 분야에 개입함으로써 커다란 야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잘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던 국가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특히 경제 운영에 있어서 국가가 주도해 특정한 산업과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특징인 ‘아시아 모델’을 뒤집어엎기로 단호히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아시아 모델의 접근 방식은 여러 나라에서 인상적인 결과를 낳았다. 특히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관료와 투자자들은 대체로 이 방식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아시아의 국가주의적 접근법은 영미권의 자유방임주의를 대체할 수 없었으며, 아시아 금융 위기는 그에 대한 사망 선고였다.
이렇듯 IMF는 아시아 국가의 경제 운영 방식을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에서의 인기가 낮았다. 사람들은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를 완화시킨 데에 특히 격노했다.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이 태국과 한국의 금융기관을 헐값에 사들이자, 많은 이들이 IMF를 신식민지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던 중국은 국영 인민일보(人民日報)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를 굴복시키려 한다”며 힐난했다. 심지어 2003년에 IMF의 수석 경제학자가 되는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조차도 IMF가 위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금융 제국주의라는 비판에 변명하기 힘들다고 시인했다.
한편 쌀이나 밀가루 같은 식료품이나 연료에 대한 보조금 삭감 등의 긴축 조치는 극심한 생계비 문제와 실업 위기를 겪고 있던 나라들에서 정치적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한 위기는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극에 달했다. 1998년에 루피아(rupiah)화의 가치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폭도의 공격으로 중국계 소수 민족 사망자 수십 명이 발생하면서 인도네시아는 정치적 불만과 폭력의 격랑에 휩싸였다. 수도인 자카르타에서는 군부가 트리삭티대학교(Trisakti University)의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네 명이 사망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의 불길을 더욱 부채질했다. 흑자 예산을 만들라는 IMF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수하르토가 연료 가격을 인상하자, 정권에 대한 반대가 더욱 심해졌다. 그는 결국 1998년 5월에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당시 IMF를 옹호하던 이들은 수하르토가 몰락을 자초했다며, 위기는 부패 때문이었고 그를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개혁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수하르토 정권이 의지하던 후견 체제 전체를 즉시 근절하라는 것이 불가능한 요구였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어떤 외교관은 “사람들에게 자살하라고 요청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논평했다.
1998년 1월에 IMF와의 협약서에 서명하고 있는 수하르토와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당시 IMF의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의 사진을 보면, 이 장면은 주권 국가의 치욕적인 항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굳이 음모론을 꺼내 들지 않더라도 미국 재무부를 비롯한 서방의 투자자들이 수하르토의 축출을 원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는 전략적 파트너의 안정을 위협하는 조치에 대해서 미국의 국무부와 펜타곤이 반대했더라도 말이다. IMF가 수하르토의 제거를 획책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재무부의 관료들이 인도네시아의 정권 교체를 이 나라 경제의 유일한 구원책으로 여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캉드쉬 총재도 훗날 스스로 이렇게 시인했다. “우리는 수하르토가 권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었다.”
미국의 일부 관측자들이 보기에 인도네시아는 역사의 철칙을 입증해 보였다. 즉, 시민들의 물질적 번영은 필연적으로 독재 통치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하르토에게 벌어진 일이 결국엔 중국 공산당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그 시기를 2015년으로
예측하고, 중국에서도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아의 외환 위기 및 그로 인한 정치적 효과들이 다른 나라의 정부들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 신호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했다. 각 나라는 금융의 세계화로 인한 위기에 스스로 버틸 힘을 만들어야 하고, 그 위기가 닥쳤을 때 혼자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