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험한 레트로
6화

묵묵한 시민상이 만든 사회

정치적 소극주의의 기원


지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언론에 보도되자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대규모 촛불 시위를 벌였고, 이는 전국 곳곳으로 번지며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어올렸다. 이에 대해 2017년 3월 일본 《산케이신문》의 한 논설은 “친북 대 반북의 대리전쟁”이라며 “북한에 동조적인 좌익 세력과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 세력 간 치열한 싸움”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는 민주주의(民主主義) 문자 그대로 백성이 주인 되는 한국식 민주주의가 잘 표출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과거 한국 전쟁 이후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에서부터 그 맥락이 시작됐다. 1987년, 연세대학교 이한열 군의 사망과 서울대학교 박종철 고문 사건 등이 불씨가 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독재타도’의 외침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군부 독재 사회를 민주 사회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오죽하면 총칼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여 만세’만 된다면 ‘나 태어난 이 강산에 투사’가 되고자 수많은 대학생들이 분신하기까지 했겠는가.

반면 일본에선 좀처럼 집단 시위를 통해 정부에게 항의하는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일 양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각 국민의 정치 참여도는 매우 다르다. 일본 국민들은 정치 참여 의지가 적은 편인데, 그 배경은 1854년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선별된 특수 계층만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근대화 이후 봉건 사회적 신분제가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재산과 지역적 특권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암묵적으로 이어지면서 현실 정치를 움직여 왔다. 특정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대대로 세습하며 당선되는 경우가 이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현대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일본 대학생들조차도 정치 권력의 분배가 과정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마치 국가적 전통인 양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그 결과 잘못된 사회 문제와 시스템에 대해 집단행동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일본도 과거에는 정치·사회적 집단행동이 활발했던 적이 있었다. 패전 후 1960년 6월, 미국 주도의 냉전 체제에 가담하게 될 일미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해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들까지 일본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대규모 반대 시위운동을 벌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을 물러나게 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터졌을 땐 전국 300여 개 시민 단체가 연대하여 만든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 연합( ベトナムに平和を! 市民連合)’이 주도한 시위에 수백만 명이 자발적으로 참가해 일본 정부 측에 전쟁에 협조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미국 정부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당당히 전했다. 그러나 경제 성장 과정에서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여유로운 중산층으로 자리 잡으며 정치적 관심은 옅어졌고, 학생 운동의 주역과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들이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386세대, 586세대 등으로 일컬어지며 과거의 운동가들이 아직도 국내 정치의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길거리 시위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확진자가 속출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스가 정권의 부실 대응을 비판하면서 일부 젊은 층들이 거리로 나섰지만 정부를 강하게 꾸짖는 집단행동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치적 효능감(political effectiveness)이 낮은 탓도 있지만, ‘화(和)’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시민들의 집단행동을 탐탁치 않게 보는 시선이 많기 때문이다. 화합을 최우선에 두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모난 역할을 자청하기는 부담이 큰 탓에, 결국 “일상 속에서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도 바람직한 시민”이라는 역할론으로 무기력함을 정당화하는 분위기가 만연하게 됐다. 반면 한국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통해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역사를 경험했기에 정치·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야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힘이 강하다. 자신이 행동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정치적 효능감, 더 나아가 적극적인 정치 참여 의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정치 참여도가 낮은 또 다른 이유는 종교에서 기인한다. 우선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은 유교 문화권이지만, 마치 오렌지와 레몬처럼 겉모습만 비슷할 뿐 본질에서는 차이가 크다. 한국에선 유교가 조선시대 전체를 장악한 하나의 사상이었지만, 일본은 유교를 교양을 쌓는 학문 영역으로 한정했을 뿐 통치의 근간으로 활용하진 않았다. 국가 권력과 결합되지 않았고 쇼군(將軍)이나 다이묘(大名) 역시 유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결과, 유교는 유학자들끼리 자유롭게 토론하고 연구하는 대상 정도로만 인식됐다.[1]

특히 일본은 무가(武家) 권력을 주축으로 한 신분제 사회였기에 권력은 왕실이 아닌 쇼군에게서 나왔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5~1333)에서 에도 막부(江戸幕府, 1603~1868)에 이르기까지 일본 천황은 권위만 있을 뿐 실질적인 지배는 쇼군의 권력에서 나왔고, 부동의 계급 사회는 680여 년간 이어져 왔다. 따라서 유교가 문치적 이상보다는 마치 오늘날 대학의 교양 수업처럼 한문 학습의 도구, 순수한 학문적 관심으로 한정되다 보니 일본의 유학자들은 조선의 선비들만큼 국정에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에도 시대 전기의 유학자이자 고의학의 창시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가 의학을 포기하고 유학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온 집안이 나서서 말렸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오늘날 의과대학 합격을 포기하고 철학이나 인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2] 그만큼 유교를 통한 출세는 기대할 수 없는 사회가 일본이었다.

또 조선과 달리 일본은 소위 ‘한탕주의’가 없었다. 조선은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로 등용될 경우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반면, 일본식 카스트 제도에선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했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이게 운명이려니’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경향으로 굳어져, 주어진 일에는 충실하지만 사회 변화 및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비교적 무관심해지는 문화를 정착시켰다. 그 결과 현재 일본은 정치인들이 지역구를 자식이나 친인척에게 세습해도 시민들은 ‘주군의 판단이겠지’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한국과 달리 유교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가를 이루기 위한 발판이자, 국민 통합과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유교 논리를 끌어들였다. 1890년에 만들어 낸 교육칙어(敎育勅語)에는 국민들에게 천황의 신민으로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 민주주의의 대표적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는 일본이 유교를 타자화하고 주자학을 배제하면서 근대의 길을 돌파해 나갔다고 분석한다.[3] 조선과 중국의 유교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효(孝)와 선비 사상을 강조한 명분론이었다고 한다면, 일본은 같은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효보다는 충(忠) 이념에 더 큰 가치를 뒀기 때문에 무(武) 사상, 즉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권위와 복종을 중시하는 논리를 천황과 백성, 주인과 종,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등의 모든 인간관계에 확대 적용했다. 충성은 곧 주군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고, 의리를 다하는 것은 곧 은혜를 갚는 것이며, 이것을 무사의 최고 명예로 삼았다. 그래서 에도 시대 신도학자였던 요시카와 고레타리(吉川嶊足, 1616~1695)는 무사의 기본 수양에 대해 “주군을 위해 부모를 버릴 수는 있어도, 부모를 위해 주군을 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사람은 사무라이, 꽃은 벚꽃(人は武士、花は桜)’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는데, 이는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벚꽃이며, 사람 중에선 충을 중시하는 무사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에도 시대 중기 아코우 사건(赤穂事件)을 각색한 소설 《츄신구라(忠臣蔵)》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쇼군을 위해 복수하는 창작 작품이지만, 실제로 도쿄 시나가와(品川)의 센가쿠지(泉岳寺)에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할복한 무사 47인 전원의 묘지가 있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참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충성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희생정신과 의리가 오토코(男, 사나이)라는 것이며, 이는 어린아이들에게 충을 교육할 때도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같은 정신이 일본의 ‘옛날 옛적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대신 권력에 순응하는 것이 미덕이라 교육받은 일본 국민들은 집단과 주군에 대한 충을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이것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제2차 세계 대전 말,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테러까지도 가능케 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여전히 주류 종교로 정착하지 못한 채 하나의 서구 문화라는 인식이 강한 것 역시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다.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 정신은 전통 사무라이 문화에서 책임을 강조하는 무사도 정신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는 또 어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구 열강의 침투로부터 자국민들을 내부적으로 단단히 결속할 매개체로 삼은 것은 바로 천황을 전면에 내세운 국기와 국가였다. 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천황의 신화를 이용해 가미노 쿠니(神国), 즉 신의 나라를 만들었다. 천황을 신의 자손으로 규정하고, 이를 근대 국가의 지배적 이념으로 내세우기 위해 동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히노마루(일장기)만큼 좋은 표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의 국가를 지칭하는 기미가요(君が代)도 마찬가지다. 누가 작사했는지도 모르는 지금의 기미가요는 1999년 8월 9일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일본의 공식 국가가 됐다. 내용은 이렇다.

님(천황)의 시대는 천대에서 팔천대에 걸쳐 작은 조약돌이 큰 돌이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君が代は千代に八千代にさざれいしのいわおとなりてこけのむすまで

천황의 처세를 염원하는, 그러니까 단 한 명의 ‘님’인 천황이 영원무궁토록 일본을 지배했으면 하는 용비어천가와 같은 내용이다. 태극기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과 음양의 조화 등 역사와 전통이 얽혀 있고 애국가 역시 민족의 얼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일본의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천황에 대한 이야기일 뿐 국민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데도 국민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천황의 신격화는 심지어 전쟁과 침탈의 과정도 합리화하는 형태로 이어졌다. 전쟁과 군국주의가 천황의 힘 있는 이미지와 결합한 결과, 오늘날 일본에서는 우리와 달리 국경일에 아파트 베란다나 주택 문가에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다.

 

가업에 등 돌린 청년들


한국의 많은 기업이 창업 2세대에서 3세대로 계승되고 있는 오늘날, 창업 의지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후계자들은 가업을 물려받고자 대기하고 있다. 재벌 기업이 아니어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키운 영세 기업을 계승하거나, 아날로그식 경영에 IT 기술을 접목해 벤처 기업으로 성장시키려는 신세대들이 줄을 잇는다.

반면 우리가 한때 선망했던 일본의 장인 정신은 오늘날 일본 사회를 후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일본에는 100년 이상의 장수 기업만 해도 조사 기관에 따라 3만여 개에서 5만여 개로 전 세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200년이 넘는, 아니 300~400년도 거뜬히 넘는 초장수 기업도 즐비하다. 1000년을 넘은 기업도 일곱 개나 있으며, 고베에 위치한 곤고구미(金剛組)는 578년 창업을 시작으로 ‘전 세계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었다.

곤고구미의 역사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파하고 싶어했던 쇼토쿠 태자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시텐노지(四天王寺)’라는 절을 짓고자 백제로부터 세 명의 건축 장인을 초대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중광(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이 바로 앞서 소개했던 곤고구미를 창설했던 인물이다. 1995년 10만 채의 건물들을 붕괴시킨 고베 지진에도 이 기업이 관여한 건물들은 끄떡없던 덕분에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곤고구미는 사찰과 신사 건축의 설계와 시공, 그리고 성곽이나 문화재 건축물의 복원과 수리를 주업으로 해왔는데, 19세기 들어 사찰 건립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호가 없어지고 전통적인 사찰 건축에 철근 콘크리트를 조합하는 새로운 공법이 각광받게 되자 파산에 이를 만큼 타격을 입었다. 결국 건축 패러다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경쟁력을 잃고는 2006년 1월, 일본 중견 건설업체 ‘타카마츠 건설’에 회사 영업권을 넘겨주는 형식으로 흡수 합병되면서 곤고구미는 무려 1429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막을 내린 건 곤고구미뿐만이 아니다. 과거엔 일본 최고의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했다가도 기업의 대를 잇기 위해 사표를 제출하고 장어 가게 사장으로, 산속 여관 주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은 가업 승계를 당연시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기업 세습도, 교회 세습도 사회적 지탄을 받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국회의원이 본인의 지역구를 딸이나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시민들이 큰 반감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그런데 이젠 오히려 일본 젊은층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 일본의 가업 승계 문화가 엄격한 신분제에서 기인했다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은 아니다. 조그만 공장에서 작은 부품에 심혈을 기울여 완성도를 높이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다 보니, 가업을 승계할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일본에선 가업을 보통 아들에게 물려주지만, 아들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할 경우 역량이 뛰어난 직원을 양자로 삼거나 데릴사위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고 가업을 이어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래서 노렌와케(暖簾分け)가 일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다. 노렌와케는 주인이 종업원을 독립시켜 주는 상관습인데, 우선 말단 점원인 데치(丁稚)로 점포에 입사 후 직급이 오르면서 중간 관리자로서의 데다이(手代)를 통과하고, 그다음 최고 직급인 반토(番頭)의 직위에 오른다. 이때 자립을 원할 경우 주인은 자신의 전통적인 상호를 사용해서 분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그런데 이제는 장남은커녕 데릴사위나 양자를 통한 후계자도 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유서 깊은 장인이 계승자를 찾지 못해 폐업해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통증이 없는 주사기를 개발하며 한국에서도 장인 정신으로 유명했던 오카노공업(岡野工業)도 이러한 이유로 지난 2020년 문을 닫았다. 지난해 일본 전국 경영자 연령의 평균은 62세인 반면, 후임자를 찾지 못한 기업의 평균은 훨씬 고령인 68세로 드러났다.[4] 경영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물려줄 사람이 없어 현장에서 퇴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코어 인력에 의해 혁신이 일어나는 서구 기업 문화와 달리, 일본의 기업 문화에선 본인의 직무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며 현장을 중심으로 기술이 기업에 축적된다. 그러나 이제는 제조 현장의 고령화와 후계자 문제라는 내부적 요인으로 기술의 노하우는 사장되고,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하락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 중소기업청은 2017년 7월부터 ‘중소기업 사업 승계 5개년 계획’을 통해 중소기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로 했고, 2018년에는 중소기업의 가업 승계를 장려하고자 상속세와 증여세를 전액 유예하거나 면제해 주는 ‘특례 사업 승계제도’를 도입했다. 2021년 8월에는 후계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의 인수·합병을 전폭 지원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투자자문업 등록제도’와 ‘우발 채무 보험제도’까지 실시하기로 했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일본의 시장 조사 기관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2021년 1월부터 10월까지 후계자를 찾지 못해 도산한 기업은 총 369개에 이른다.[5]

손대패로 나무를 깎는 장인의 수작업보다 전동 대패로 순식간에 목재를 깎는 기술이 더 정교하다. 뜨거운 고로를 앞에 두고 바람을 불어 만든 유리병보다 기계로 찍어 낸 그릇이 하자가 적다. 지금 젊은이들은 전통보단 IT, 아날로그보단 디지털에 익숙하다. 1990년대 초 버블 경제가 붕괴되고 잃어버린 30여 년이 흐르기까지, 기성세대에 눌려 지낸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야마토 정신이니 전통이니 하는 것이 쉽사리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로 일본 청년들에게 대패를 잡거나 용접광을 견디라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 아닐까.

 

매뉴얼 왕국의 오모테나시


‘철도 왕국’, ‘애니메이션 왕국’, ‘성인물 왕국’. 사회 현상을 표현할 때 ‘왕국’이란 단어를 흔히 사용하는 일본은 ‘매뉴얼 왕국’으로도 유명하다. 다양한 상황과 환경에 걸맞는 행동 지침이 꼼꼼하고 촘촘하게 매뉴얼화되어 있다는 의미다.

필자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던 1992년으로부터 30년이나 지난 지금, 매뉴얼 사회로서의 일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빠릿빠릿하던 20대 후반의 필자가 매뉴얼의 답답함을 못 이겨 스스로 일을 처리했을 때는 상사로부터 제재를 받았지만, 오히려 시키는 일을 기존 방식대로 하자 ‘마지메(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아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 손님이 카운터에 물건을 가져오면 각 상품의 금액을 일일이 말해 주고, 총 몇 가지 물건을 사는지 확인하고 상품의 총액을 알린 후 돈을 받으면 얼마를 받았는지 반드시 손님에게 알려서 확인하도록 했다. 지폐를 받았을 경우 손님 앞에서 지폐를 한 장씩 세어 보여야 했고, 거스름돈을 줄 때는 손에서 손으로 건네면 안 되고 꼭 작은 플라스틱 쟁반에 올려 건네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했다. 심지어 이를 점장 앞에서 몇 번이고 연습해서 합격해야 했다. 오늘날 일본을 가도 모든 매뉴얼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규칙을 처음 정할 때는 물론, 규칙을 지키는 후속 과정에서까지 불만 없이 꼼꼼히 원칙을 준수하려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도 매뉴얼이 있으나 일본만큼 엄격하진 않다. 점주가 아르바이트생에게 A4 용지 한 장으로 정리된 매뉴얼을 건네주거나, 구두로 간단히 설명 후 나머지는 자율에 맡기는 편이다. 만일 한국인들에게 일본처럼 근무하는 방식을 강요한다면, 고용주 입장에선 일이 일사천리 처리되는 과정을 보며 흡족할지는 몰라도 직원들의 불만은 쌓여 갈 것이다. 일본인들과 달리, 주어진 일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지금껏 일본은 꼼꼼한 매뉴얼로 제조업 분야에서 뛰어난 완성품을 생산하며 고도 경제 성장을 이뤄 냈다. 문제는 이것이 습관화되어 매뉴얼이 부재한 상황에선 쉽게 당황한다는 것이다. 2019년 겨울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일본의 대처는 글로벌 뉴스감으로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요코하마 바다에 승객과 승무원 3711명이 탑승해 있던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에서 감염자가 발생하자, ‘인권 침해’에 가까운 선상 격리 조치로 706명의 감염자를 양산할 때까지 일본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최근 중국의 관광지인 하이난성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발생했다고 모든 관광객을 격리하는 중국의 태도에 대해 인권 유린이라는 거센 비판이 빗발쳤지만, 당시 일본의 상황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상에서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전례 없는 사건을 마주했을 때,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이 익숙하던 시민들은 위기에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물론 매뉴얼도 장단점이 있다.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그러나 그 결과 벤처 기업이나 스타트업 등 리스크를 담보하는 회사에서 일할 때 창의성이 결여되고, 이는 낮은 창업율로 이어진다. 반대로 한국 사회에선 자신이 맡은 일에 있어 방식과 무관하게 결과를 내고 그에 대해 책임지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며, 오히려 매뉴얼에 없는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도전 정신을 시험하고 자신만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2022년 통계청 국가지표체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2016년부터 OECD 주요국가 중 창업률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9년 기준 창업률이 독일은 9.1퍼센트, 이탈리아는 7.4퍼센트, 일본은 5.8퍼센트였던 데 비해 한국의 창업률은 무려 15.3퍼센트로 매우 높았다.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의 친절 또한 촘촘히 구성된 매뉴얼과 연결된다. 일본인들의 친절은 일종의 ‘테크닉’처럼 다가오며, 감정 없는 친절에서 감동을 받긴 어렵다. 일본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겪어 보지 못한 정제된 친절함을 경험하며 비싼 가격 앞에서도 불평 없이 지갑을 열지만, 대부분의 친절은 매뉴얼의 일부일 때가 많다. 그래서 가게 점원들에게 가벼운 부탁을 했을 때 선뜻 응해 주기를 예상하나, 정작 매뉴얼에 없는 부탁을 하면 스스로 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해 주저하거나 상사를 부르러 가는 경우가 흔하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기다리다 지쳐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며 그 자리를 떠난다.

이처럼 매뉴얼을 우선시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일본에선 사회적 특징이자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일본인들이 성실한 반면 융통성은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에 오면 신세계를 경험한다고 한다. 매뉴얼과 상관없이 지하철에서도 커피숍에서도 크게 수다를 떨고, 전화 통화도 하는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던 일본은 없다


한국인들이 하는 걱정 중 가장 쓸데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연예인 걱정, 재벌 걱정, 그리고 일본 걱정이다. 세 번째 걱정은 이제 그만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안전 신화, 경제 기적, 친절 문화 등으로 단단히 성장해 온 과거의 일본은 더 이상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22년 7월 8일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大和西大寺)역 앞 거리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 중, 전직 해상 자위대원이었던 한 인물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망하며 일본 경시청의 경호 능력은 전 세계의 조롱거리로 떠올랐다. 인터넷에는 아베 총격 당시 일본의 SP(Security Police) 경호 수준과, 2022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한 소주병 투척 당시의 경호 수준을 비교하는 사진과 영상이 떠돌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자택 앞에서 대국민 인사를 하던 도중 소주병이 날아들었을 때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방어 태세를 갖추면서 박 전 대통령을 엄호한 것과 달리, 아베 전 총리 유세 당시 일본 경호원들은 총성 후에도 3초간이나 우왕좌왕하면서 경호에 소홀한 모습을 보였다. 야마가미란 인물이 아베 연설 중 7~8미터 앞까지 천천히 다가가 첫 번째 발포를 하기까지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을 뿐더러, 1차 폭발음 후에도 아베 쪽으로 몸을 날린 경호 인력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경호 허점은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다.

일본의 경호 및 치안 수준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던 것처럼 철통같지 않다. 아베 전 총리의 총격 사건뿐 아니라 재일 한국인에 대한 증오 범죄(hate crime)나 무차별 증오 범죄도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등장한다.[6] 2021년 10월엔 한 청년이 경제적 파탄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조커 복장을 하고 도쿄 지하철 내에서 휘발유를 뿌리며 방화를 시도하고 칼부림을 한 사건이 TV 뉴스를 하루 종일 장식한 바 있다. 이 같은 범죄나 사건·사고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빈번히 발생하지만, 일본이 특수한 이유는 바로 높은 치안을 자랑하던 과거에서 기인한다. 밤거리를 혼자 걸어 다녀도 괜찮을 만큼 안전한 나라로서 입지를 다지던 일본은 그 위상이 무너진 지 오래고, 일본의 안전 신화는 이제 말 그대로 ‘신화’로 남게 됐다.

2018년 10월 국제 자선 단체인 CAF(영국자선지원재단)이 발표한 세계 기부 지수(world giving index), 낯선 사람 돕기(helping a stranger), 금전적 기부(donating money), 자원 봉사 시간(volunteering time) 등을 살펴보면, 조사 대상 144개국 중 한국이 92위, 일본이 142위에 머물러 있다. 한국도 높은 수준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토록 친절과 이타심을 자랑하던 일본이 142위라는 것이 믿기는가? 그나마 매뉴얼대로 베풀던 호의도,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일본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건강을 해칠 것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점점 옅어지는 추세다. 일본의 친절이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친절이었는지, 아니면 그 친절마저도 매뉴얼이었는지 이제는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1]
일본의 무신정권인 막부(幕府)의 쇼군은 형식적으로는 천황으로부터 임명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다이묘는 지방의 번주(藩主)로서 막부의 쇼군과 주종 관계를 맺어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체제를 막번체제(幕藩)라고 한다.
[2]
진사이는 비록 학자의 집안이 아닌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학문에 관심을 두고 주자학을 공부하다 주자학의 모순을 깨닫고선 새로운 학문인 고의학(古義學)을 세우며 일본 유학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3]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였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정치 사상 및 파시즘 등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대표적 학자로 자리 잡았으며 대표적인 연구서로 《일본정치사상사연구》가 있다.
[4]
도쿄상공리서치, 〈社長の平均年齢は62.49歳、高齢の社長ほど業績悪化が鮮明に〉, 2021. 8. 4.
[5]
안타깝게도 이 분야는 한국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사업 승계제를 참고해 ‘가업 상속 공제’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일본보다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실질적으로 혜택을 보는 중소기업이 많지는 않다. 한국에서 가업을 물려줄 때 상속세율은 최고 60퍼센트에 달하고 실효세율은 일본의 12.95퍼센트에 비해서도 높은 28퍼센트에 달한다.
[6]
2021년 7월 나고야(名古屋)시 민단 건물 방화 사건이 발생했고 한 달 뒤인 8월에는 재일 조선인 집단 거주지인 교토(京都)의 우토로 마을의 빈집 방화 사건, 그리고 12월에는 오사카의 민단에 해머를 던져 유리창을 파손한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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