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본격적인 임팩트 투자(impact investing)를 시작할 때 바탕이 된 것은 앞선 두 기간의 경험이었다. 삼보증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바슈롬(Bausch&Lomb) 코리아의 경영을 접을 때까지의 30년과 아크(ARK) 사모펀드 운용사의 설립, 소셜 엔터프라이즈 네트워크(Social Enterprise Network·SEN) 활동에 이르는 15년이다. 첫 30년의 경험이 사회 책임 투자(Socially Responsible Investing·SRI)를 시작한 배경이 되었고, 이후 15년간 이어진 소셜 앙트러프러너십(social enterpreneurship)에 대한 관심이 임팩트 투자로 연결되었다.
MBA 공부를 마친 후 입사한 삼보증권 시절에는 상장된 회사가 주식이라는 종이쪽지로 잘게 쪼개져 거래되는 현장을 보았다. 증권 회사는 산업 자본을 조달하고, 국민이 기업 활동에 참여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투자하는 회사가 식품 회사인지 건설 회사인지 별 관심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관심사는 종이쪽지 거래에서 생기는 매매 차익이었다.
삼보의 경영층이 사업의 사회적 가치, 의미에 좀 더 진지한 관심이 있었다면 증권계 1등 자리에 연연해 단기 실적에 지나치게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회계 스캔들로 회사가 동양증권(후 대우증권)에 합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경영진의 도전 정신을 지금도 존경하지만, 회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은 후회로 남아 있다.
삼보를 떠나 첫 사업으로 시작한 컴퓨터 부품 제조업에서 실패한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하던 때였다. 미국의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국적 회사 바슈롬의 아시아 지역 사장이 된 친구의 제안으로 콘택트렌즈 사업의 한국 총판을 맡게 되었다. 한국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본사가 지분을 투자했고 내가 경영하던 총판 회사는 합작 기업이 되었다. 바슈롬 코리아 합작 회사는 생산과 판매 모두에서 성공을 거뒀다. 충북 음성에 공장을 세워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바슈롬은 당시 경제 잡지 《포춘(Fortune)》이 선정하는 500개 대기업 ‘포춘 500’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상승세였다. 그러나 사업적 성공에 집중하는 사이, ‘고객의 건강한 눈’이라는 사명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바슈롬 본사 연차 보고서에는 “회사의 사명은 전 세계인의 눈 건강 관리”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한국 법인은 물론 미국 본사에서도 그 사명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업계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중대한 사업 기회를 놓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폴란드의 한 기술자가 일회용 렌즈 제조 신기술을 팔겠다고 미국 본사에 제안해 왔다. 세척해서 소독하고 보관하면서 1년간 사용하던 콘택트렌즈를 매일 하나씩 쓰고 버리는 형태로 바꾸는 혁신적인 신기술이었다. 그러나 본사는 제안을 거절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매일 깨끗한 새 렌즈를 사용할 수 있어 회사의 사명에 부합하는 데다, 사업 타당성도 있는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회사의 단기적 이익에 미치는 영향, 이로 인한 주가 하락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익이 많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길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객의 눈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핵심 가치에 집중했더라면 당연히 사들였어야 할 혁신적 기술을 눈앞의 이익을 좇다 놓친 셈이다.
결국 콘택트렌즈 사업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그래서 지켜야 할 이익도 없었던 존슨 앤드 존슨(Johnson&Johnson)이 일회용 렌즈 기술을 사들여 크게 성공했다. 바슈롬의 콘택트렌즈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퍼센트 수준에서 10퍼센트 이하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본사는 한국 합작 회사의 내 지분을 사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그렇게 해서라도 단기 실적을 맞추고 주가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대표 이사직에서 물러나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공동 회장직을 맡으며 두 차례에 걸쳐 지분을 매각했다.
그리고 2003년, 아크 투자 자문(현 아크 임팩트 자산 운용)을 창업했다. 사회 책임 투자의 기치는 앞선 두 시기의 경험에서 나왔다. 특히 바슈롬에서의 경험을 통해 혁신이 회사의 중요한 사회적 책임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배웠다.
미국에서의 경험도 계기가 되었다. 2004년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열린 글로벌 소셜 벤처 대회(Global Social Venture Competition·GSVC)를 참관했을 때의 일이다. 대회 현수막에 쓰인 ‘Doing Good, Doing Well’이란 글귀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면 돈도 잘 벌 수 있다. 그러니 사회적 가치와 재무적 가치를 통합하는 길로 가라’는 취지로 다가왔다. ‘남 좋은 일을 하면 돈을 못 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배치되는 말이었다.
뉴욕에서 접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2005년 한국 소셜 벤처 대회(Social Venture Competition Korea·SVCK) 운영위원회를 발족하고, 2006년 1회 대회를 개최했다. 아크는 후원사로 참여했다. 2010년에는 SVCK가 아시아 소셜 벤처 대회(Social Venture Competition Asia·SVCA)로, 대회 운영위원회는 소셜 엔터프라이즈 네트워크(Social Enterprise Network·SEN)로 확대 개편되었다. SEN은 대학생들이 소셜 엔터프라이즈를 공부하고, 사명과 능력을 갖춘 지도자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한국 교육계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2010년 여름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에서 소셜 앙트러프러너십 강좌 개설을 제안해 왔다. 뉴욕에서 만나 친구가 된 레이 호튼(Ray Horton)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도움을 요청하는 나를 뉴욕으로 초대했다. 이 학교 소셜 엔터프라이즈 프로그램 창설자이기도 한 호튼 교수는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의 소셜 엔터프라이즈, 임팩트 투자 분야 교수 다섯 명과 하루에 한두 시간씩 열흘간의 미팅을 주선해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임팩트 투자라는 용어를 만든 록펠러 재단의 임팩트 투자 책임자 앤터니 버그 레빈(Antony Bugg-Levine)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11년 숙명여대에 소셜 앙트러프러너십 강좌가 정식으로 개설되었다. 같은 해에는 한국 최초의 ‘임팩트 투자 세미나’도 열었다.
기업 경영의 현장에서 배운 혁신의 중요성, 학계 전문가들과의 만남으로 확신하게 된 혁신 기업의 사회적 가치는 나를 임팩트 투자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글로벌 임팩트 투자자 단체인 진(GIIN·Global Impact Investing Network)의 보고서는 나의 확신에 힘을 더해 주었다. 2016년 보고서는 “임팩트 투자는 더 이상 유아기가 아니다”, “임팩트 투자는 주식, 부동산 같은 전통적인 투자 방식과 수익률에서도 경쟁을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2016년 말, 아크 이사회는 임팩트 투자 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펀드의 구성과 운용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① 세계 최고의 파트너 ; 해당 분야의 전문성, 경력, 경영 능력이 최고인 사업 파트너를 전 세계적으로 찾아 장기 투자한다. 정직성과 성실성을 필수 요건으로 한다.
② 듀 딜리전스(due diligence) ; 사업 내용 및 재무와 임팩트 분석, 법률적 검토, 경영층 면담, 공동 투자자 확인, 현장 검증에는 예외가 없다.
③ 투자 수익률 ; 주식 투자를 능가하는 투자 수익률을 내고 매년 배당을 지급한다.
④ 글로벌-로컬의 연계 ; 장기적으로 글로벌 전문성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의 투자 기회를 세계에 연결한다. 해외와 국내의 사회적 필요를 서로 연계해서 해결한다.
⑤ 생태계 기여 ; 국내외 임팩트 투자 생태계에 기여한다. 대학생 연합 임팩트 투자 클럽을 지도하고, 임팩트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아크는 위와 같은 다섯 가지 원칙하에 조사를 거쳐 네 가지 테마, 일곱 개 투자처에 총 2000만 달러(225억 원)를 투자했다. 투자자 모집을 위한 미팅이나 설명회에서 투자자들은 열띤 호응을 보냈다. 그러나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크의 사명은 임팩트 투자를 통해 ‘사회에 좋은 일 하며(Doing Good), 이익도 잘 낸다(Doing Well)’라는 가치 통합(blended value)의 생각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미래에는 모든 투자가 임팩트 투자가 될 것이다. 그 미래를 오늘 이곳에서 먼저 실현해 보려 한다.
삼보증권에서 시작한 45년간의 경험과 노력이 이제 임팩트 투자라는 종착역이자 새로운 출발점으로 모이는 것 같아서 기쁘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감사한다.
이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