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개의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은 노무현 후보의 16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2002년 12월 19일 밤 9시 52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간한 지 2년 10개월 된 신생 인터넷 언론사 오마이뉴스가 한 편의 기사를 게재했다. 〈‘언론 권력’ 교체되다: 인터넷과 네티즌이 ‘조중동’ 이겼다〉 제하의 기사에서 오마이뉴스는 80여 년간 권력을 누려 왔던 메이저 보수 신문들을 누르고 우리 사회의 주류를 바꾸는 변혁을 이뤘다고 선언했다.
오마이뉴스의 승전 선언에는 약간의 기대와 과장이 섞여 있었지만, 허황된 망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네티즌들은 보수 편향의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여론 환경에서 해방 이후 가장 진보적인 대통령의 당선을 이끌어 냈다. 인터넷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올 참여의 플랫폼이었다.
변화의 중심에는 여론을 주도하는 오마이뉴스와 ‘뉴스 게릴라’라 불린 시민 기자들이 있었다. 2002년 이미 2만 명을 넘긴 뉴스 게릴라들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 아래 오마이뉴스 전체 기사의 80퍼센트를 직접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디지털 저널리즘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기성 저널리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가 무성했다. 해외의 언론과 학자들도 시민 참여 미디어의 성공적 실험에 주목했다.
두 번째 장면의 시곗바늘은 2015년 3월 23일 오전 9시를 가리킨다. 연예 전문 인터넷 언론 디스패치가 수지와 이민호의 열애 소식을 다룬 특종 기사를 올렸다. 곧바로 포털 사이트에 이를 복제한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날 자정까지 수지를 키워드로 한 기사가 1840개나 올라왔다. 클릭 가능성이 높은 기사를 포털에 반복해서 전송하는 어뷰징(abusing) 기사들이었다. 특히 수지라는 단어를 열 번 이상 언급해 실시간 검색에 노출될 확률을 높인 기사는 79개나 됐다.[1] 대개는 기자 이름 없이 ‘○○닷컴’, ‘온라인뉴스팀’, ‘디지털뉴스팀’ 등의 바이라인을 달고 있었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걸 그룹의 ‘아찔한 몸매’를 강조한 가십 기사들이 넘쳐난다. 충격, 경악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낚시성 기사들이 뒤덮은 포털 뉴스 박스도 낯설지 않다. 어느새 디지털 저널리즘은 포털 사이트에서 트래픽을 끌어와 광고 수익을 벌어들이는 정글이 되어 버렸다. 오마이뉴스도 상근 기자 중심의 전통적 모델로 회귀하면서 포털에 기사를 전송하는 수많은 인터넷 신문 중 하나가 되었다. 시민 참여 모델의 실험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태동기와 오늘날의 대조되는 풍경은 불과 15년 안팎의 기간 동안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성격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했음을 보여 준다. 두 장면 사이의 간극을 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참여와 공유, 해방의 광장이었던 초기의 디지털 저널리즘은 왜 탐욕스럽게 수익을 추구하는 시장으로 탈바꿈했을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던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역동성과 진취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디지털 기술의 등장 이후 저널리즘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언론의 디지털에 대한 기대는 변함없이 크다. 진보와 보수, 신문과 방송을 가리지 않고 언론사들은 너나없이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며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기대의 내용은 바뀌었다. 언론사들의 디지털 혁신은 저널리즘의 공적 가치나 시민 참여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기업으로서의 언론사가 어떻게 수익을 극대화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빅데이터, 가상 현실,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이들이 저널리즘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며, 뉴스 미디어의 이윤 창출에 기여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기술 예찬론이 쏟아진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발맞춰 산업 지향적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저널리즘은 생존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문제는 저널리즘을 다루는 이러한 논의에서 정작 저널리즘이 실종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널리즘은 인간의 삶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매우 특수한 사회적 실천이다.[2] 뉴스를 개별 기업의 수익 창출 수단으로만 인식하면, 공적 영역에서의 책무를 위한 저널리즘의 본령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날 쏟아지고 있는 해법들은 뉴스를 예능이나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콘텐츠로 취급하며, 비즈니스 가치를 위해 저널리즘 가치를 희생할 것을 주문한다.
그렇게 해서 수익 창출이라는 약속이 실현될까? 한국의 뉴스 미디어들은 지난 몇 년에 걸쳐 산업 논리에 집중한 디지털 혁신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한층 더 악화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뉴스의 품질과 저널리즘의 품격을 포기했건만, 뉴스 미디어들의 살림살이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기레기(수준 낮은 기사를 쓰는 기자를 비하하는 의미로 기자와 쓰레기를 합성한 신조어)’로 낙인찍힌 기자들은 늘어난 업무에 지치고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
이제 발상을 바꿀 때가 되었다. 무비판적으로 혁신의 주문을 되뇌는 작업을 중단하고, 디지털 퍼스트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언론사들이 그렇게 목청 높여 외치는 디지털 퍼스트에서 말하는 디지털이 어떤 디지털인지, 지금 디지털 저널리즘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한 번도 질문해 보지 않았다. 이제 달리기를 멈추고 질문을 던질 때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혁신은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인가?
디지털은 본질적으로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의 기술이다. 자유와 해방, 탈권위주의를 앞당기는 요소와 통제와 감시, 억압을 효율화하는 요소가 동시에 있다. 공존하는 다양한 측면들 가운데 어느 쪽 특징이 구체화되고 극대화될 것인지는 사회적 과정에 의해 결정된다. 유동하는 디지털 기술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디지털 저널리즘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기술 숭배와 산업 논리에 경도된 디지털 혁신은 유일무이한 해법이나 필연적 대세가 아니다. 지금과 다른 디지털, 지금과 다른 혁신은 가능하다.
이 책은 한국 디지털 저널리즘의 20년 역사를 추적해 혁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역사는 지금과 다른 성격의 디지털 저널리즘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퇴적된 결과물을 보며 우리는 지금의 저널리즘 질서가 저절로 이뤄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 과정에서 어떤 힘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또한 드러날 것이다.
디지털 저널리즘이 가져오는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며 새로운 저널리즘은 아직 형성 단계에 있다. 디지털 저널리즘을 부정적 방향으로 몰아넣는 힘을 밝혀내고 그 요소를 제거하거나 재배치할 수만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디지털 저널리즘이 가능하다. 저널리즘의 과거를 논하는 일은 결국 저널리즘의 현재를 진단하고 저널리즘의 미래를 고민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급격한 변화의 시기일수록 바꿔야 할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을 섬세하게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저널리즘에서 마지막까지 지켜 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현장의 언론인들과 아직 저널리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시민들이 해답을 찾아가는 데 이 책이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