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구조란 제거될 수도 있지요. 모든 것이 제거되었을 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수도사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 중에서
과정과 절차의 파괴자, 트럼프
트럼프 집권 이후 모든 점에서 불확실성이 너무 커지자 한국의 지식인들은 도대체 미국의 정책 결정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지 의아해한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매우 곤혹스러운 심정에 처한다. 트럼프 이후 모든 상식과 정교한 프로세스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신뢰 프로세스라는 온건한 대북 접근이 하루아침에 폐기되고 강경한 압박 노선으로 선회하거나 반대로 ‘통일은 대박’이라는 부동산 투기 노선이 결정될 때 지식인들 사이에서 숨겨진 배후에 대한 말들이 많았듯이 말이다.
유학 시절 미국 정치를 공부할 때 ‘듀 프로세스(Due Process·적법한 절차)’란 말을 지겹도록 들으며 한국 민주주의와의 차이를 실감하곤 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민주화 이후 이명박, 박근혜라는 권위주의적 정부를 거치며 민주주의란 단지 선거에서의 선출만으로 완성되기보다는 그 이후 모든 사안에서 듀 프로세스 정착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듀 프로세스를 포함한 정교한 과정 관리 시스템은 한국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미국 제도의 자부심이다.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기본을 강조하는 이정동 교수의 책 《축적의 시간》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도 이제 조금씩 선진국화되고 있다는 징후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미국의 선진 시스템도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연약한 구조에 불과하다는 걸 미국인들은 절감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권위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유행은 이 심리적 충격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전문가들이 트럼프 집권 이후 가장 먼저 실감 나게 미국의 정교한 프로세스가 훼손되고 있음을 절감하는 영역은 국가 안보다. 특히 그동안 수십 년 세월을 겪으며 정교하게 진화했던 국가 안전 보장 회의는 탄생 이래로 가장 무력화되고 있다. 사실 국가 안전 보장 회의는 미국 국가 안보 시스템 진화의 꽃이다. 이 제도는 대통령 1인의 비밀주의와 자의적 판단력에 기대기보다는 다양한 경험과 접근법에 의한 견해들이 충분히 검토되고 난 후에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다. 흔히 한국에서는 쉽게 미국 대통령제를 이상화하는데 루스벨트, 케네디를 비롯해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온갖 비밀주의와 탈법 속에서 당선되거나 당선 이후에도 자의적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 국가 안전 보장 회의 시스템은 다양한 부침을 거치면서 진화해 부시 1세 시절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같은 지혜로운 지휘자 시절에는 최고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트럼프와 그의 국가 안보 보좌관인 볼턴(John Bolton)은 견제받지 않는 오만한 황제 같은 캐릭터이다. 볼턴은 특히 냉전 시절에나 통하는 자신의 화석화된 이념적 편견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향으로 워싱턴 정가 기피 대상 1호였다. 다양한 의견을 조정해 대통령에게 최선의 경로를 제안해야 할 국가 안전 보장 회의 실무 운용자의 자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볼턴 체제하에서는 주요 관계 부처 장관들이 참석하는 국가 안보 회의나 그 아래 차관급의 실무 조정 회의가 동면기에 돌입했다고 한다. 이슈에 따라서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열리기도 하는 이 조정 회의들이 기껏해야 일주일에 1~2회 형식적으로 열린다. 많이 열릴수록 볼턴의 자의적 권력 행사 기회가 늘고 다양한 이견이 대통령에게 올라갈 기회가 봉쇄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트럼프는 국가 안보의 대사를 논의하는 시스템에 한때 외교 안보에 무지한 스티브 배넌을 배석시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오로지 트럼프의 재선과 자신의 극우 이념 어젠다에만 관심 있는 배넌의 참여는 국가 안보의 정치화라는 매우 왜곡된 시그널을 줄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결정이다. 물론 배넌 같은 정무통은 과거에도 다양하게 외교 안보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외교 안보 영역도 대통령의 지지율 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무적 사안이어서다. 예를 들어 1994년 이후 클린턴의 귀를 잠시 장악했던 정치 용병인 딕 모리스(Dick Morris)는 자주 외교 안보 이슈에서 클린턴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곤 했다. 다행히 국가 안보와 정무를 구분할 정도의 상식을 가진 클린턴은 이를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의 이슈 물타기이자 북풍의 전형적 사례로 유명한 미사일 공격 소동도 사실은 알 카에다 간부 출현의 정보에 따른 정보 기관과의 신중한 토론 끝에 내려진 초당적 결정이었다.
반대로 트럼프의 외교 안보에 대한 판단은 대개 정치적이고 충동적이다. 트럼프의 의사 결정은 주로 과거 사업가 시절부터 형성된 선입견에 의존한다. 무역 적자는 절대악이라는 단순 무식한 개념이 전형적인 예다. 트럼프의 선입견은 즐겨 보는 폭스 채널로 인해 더 공고해진다. 트럼프는 밤에 맥도널드 햄버거로 혼자 식사하면서 루 돕스(Lou Dobbs) 등 극단주의 성향의 정치 평론가들의 논평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트위터에 배설한다. 혹은 삼류 연예 폭로 기사를 싣는 타블로이드지 《내셔널 인콰이어러(National Enquirer)》의 패커(David Pecker) 회장 등 사업계 쪽의 지인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묻는다. 그리고 다음 날 볼턴 같은 극단주의자의 보고를 받고 필요한 의견을 취사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찬반의 의견 수렴이나 판단 그룹 운용은 거의 없다.
트럼프의 자의적 의사 결정 과정은 그의 사업가 시절 습관과 경험에 기인한다. 흔히 거대 기업의 이사회 의장이나 CEO 출신들은 비교적 체계적 의사 결정을 통한 판단력 행사에 익숙한 편이다. 오랜 고도의 단련을 통해 이들은 자신의 직관이나 판단이 때로는 틀릴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행정 경험이 없으면 기업과 국가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곤 한다. 기업은 CEO가 주로 주주들에게 이윤을 책임지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정부는 공적 가치를 추구하며 그 이해관계자가 너무나 다양하다. 따라서 다양한 가치와 단기 이윤인 지지율 사이에서의 균형 있는 판단과 매우 복잡한 의사 결정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의 건국 시조들은 기업식 효율성과 생산성보다는 신중함의 미덕을 강조한 제도를 설계했다. 이 디자인 덕분에 병목 현상이 생기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국가 이익은 지혜롭게 유지되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같은 일부 탁월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CEO 출신 정치가들은 상대적으로 국가의 의사 결정 과정에 둔감한 경우가 많다. 특히 트럼프는 자의적 권력을 휘두르는 부동산 제국 사업가 출신이라 CEO 대통령 모델 중 가장 행정부와 어울리지 않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1인 기업 제국의 총수인 트럼프의 뇌 구조에는 행정부 직원들이 총수를 위해 충성하는 회사원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반면에 트럼프에게 의회는 말만 많고 음모나 꾸미는 비생산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업가 기질은 정치를 생산적 정치와 비생산적 정치로 구분하는 파시스트의 인식 구조와도 유사하다.
흔히 트럼프와 비슷한 반(反)정치 유형의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로 레이건이 거론된다. 레이건은 말이 과격했고 극단적인 이념파들을 대거 고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서실장을 통해 물밑에서 의회와 온갖 타협을 모색했고 미국의 복잡한 견제 제도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사업가 시절의 습관 그대로 대통령 임기 동안 지루하고 폼이 나지 않는 타협의 예술보다는 자의적 지배와 순도 높은 성취를 추구한다. 물론 조지 부시 시절에도 백악관 자문역이었던 존 유(John Yoo)는 대통령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법적 이론화해서 미국 내 자유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준 바 있다. 과거 1970년대 닉슨 시절에 오명을 얻은 제왕적 대통령제는 오늘날 미국에서 금기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존 유의 제언은 대통령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는 풍토가 존재하는 외교 안보 사안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이 펼치는 모든 영역에서 자의적 지배를 추구한다. 트럼프에게 미국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제국의 회사원일 뿐이다.
이탈리아 미디어 재벌 출신 파시스트이자 CEO 총리 유형이었던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에게서나 볼 수 있는 전무후무한 회사 통치 기술 때문에 트럼프는 탄핵의 담장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다. 특정 정당의 수장이 아니라 국가 안보에 충성해야 하는 FBI 국장을 마치 마피아 조직원처럼 부리려고 했다가 이에 충격을 받은 코미(James Comey) 전 국장과 결별한 것은 좋은 예다. 국무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구의 역할마저 축소시켜 버렸다. 환경 보호청장과 세계은행 총재는 놀랍게도 그 기구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인사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명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미국 공화국의 근간이 되는 초당적인 견제와 균형 기구인 대법원 및 경제 대통령인 연방 준비 위원회를 노골적으로 건드린 사실이다. 트럼프는 보수적인 성향의 대법원장인 존 로버츠(John Roberts)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조롱해 충격을 주었다. 오죽하면 점잖은 보수주의자인 로버츠가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정부 기구가 아닌 연방 준비위의 초당적인 금리 결정 과정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어두웠던 닉슨 시절도 아니고 오늘날 미국의 정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퇴행적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의 철저한 자의적 통치 덕분에 2019년 2월 현재 미국 행정부는 카오스 상태다. 워싱턴 소재 외교·정책 연구소 펜 바이든 센터(Penn Biden Center) 사무국장 앤토니 블린킨(Antony Blinken)이 지적하듯이 아직 상원 인준을 요망하는 고위직 705개의 40퍼센트인 275개가 공석이다. 국무부의 198개의 핵심 포지션 중 3분의 1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행정부 장관의 4분의 1을 대행이 지휘한다. 반면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백악관의 핵심 보직 교체 비율은 65퍼센트로 오바마 정부의 24퍼센트, 부시 정부의 33퍼센트에 비해 현저히 높다. 이제 워싱턴 정가에서 평판을 인정받는 탁월한 이들은 백악관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는다. 백악관의 자리는 자신이 수년간 쌓아 올린 평판이 하루아침에 파괴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소위 ‘어른의 축’으로 불렸던 트럼프 견제 세력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국방장관, 허버트 맥매스터(Herbert McMaster) 국가 안보 보좌관 등이 다 빠지고 난 후에는 용기 있게 트럼프 책상에서 황당한 대통령 지시 메모를 치울 사람도 없다. 남은 이들은 트럼프의 충동적 결정을 단순히 집행할 자이거나 날 것의 권력욕을 소유한 자들뿐이다. 혹은 볼턴처럼 트럼프를 활용해 자신의 극단적 이념을 실험하는 경우도 있다. 볼턴은 연일 트럼프의 귀에다 대고 자신의 오랜 꿈인 쿠바, 베네수엘라 정권 교체 공작을 권유하고 있다. 2018년 9월 5일자 《뉴욕타임스》에 익명으로 기고했던 행정부 내 소위 레지스탕스가 아직 남아 있는지도 의문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이 초현실적인 소동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제 익명의 레지스탕스 충격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심지어 보수적 성향의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마치 운동권처럼 공개적으로 레지스탕스를 천명하기도 했다. 사실 자신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만한 미국식 이념이 바로 트럼프라는 백래시를 불러왔지만 프리드먼은 그저 다시 좋았던 평평한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프리드먼의 운동권 선언은 미국의 주류 세계화주의자들의 전투적 총결집을 상징한다. 하지만 오바마나 대통령 시절 프리드먼과 오찬을 하며 그의 영향력에 귀를 기울였지, 트럼프에게 프리드먼과 같은 기득권의 레지스탕스 선언은 자신의 반(反)기득권 포퓰리즘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상냥한 트럼프가 더 위험하다
이제 트럼프 입장에서 마지막 남은 성가신 장애물은 의회(특히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와 로버트 뮬러(Robert Muller) 특별 검사다. 트럼프는 2018년 중간 선거에서 패배해 하원을 잃고 그제야 ‘미국 정치 101(기초 교과서)’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 망나니였던 트럼프는 시민 교육 코스에서 미국은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라 의회 중심제라는 걸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 미국은 한국에서 오해하듯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다. 미국 건국의 시조들은 의회가 중심이 되고 대통령이 이와 협력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제도를 설계했다. 예산 심의권과 입법권을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에 부여한 것은 바로 미국이 의회 중심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과거 레이건 대통령이 강한 반정치, 반민주당 의회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의회와 타협한 것은 트럼프보다 유약해서가 아니다. 레이건도 의회와 타협하지 않고는 사소한 예산 지출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의 국회법 개정 파동과 비교해 보자. 당시 제왕적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승리했지만, 미국의 레이건은 비슷한 사안에서 의회와 타협했다. 유승민 의원은 의회주의자로서 제왕적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는데 한국에서는 마치 배신자처럼 취급되는 희한한 일도 벌어졌다. 미국 대통령제를 원형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통령 중심제로 왜곡되어 운영되는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 주는 사례다.
2019 회계연도 예산 부결로 벌어진 셧다운(연방 정부 업무 정지) 파동에서 민주당 하원의 승리는 트럼프도 피해 갈 수 없는 건국 설계도의 구속력을 느끼게 한다. 트럼프는 자신이 완전히 통제하는 줄만 알았던 공화당 의원들이 동요하자 얼른 손을 들고 후일을 기약했다. 비록 권력욕으로 가득 찬 미치 맥코넬(Mitch McConnell) 공화당 원내 대표가 상원에서 트럼프 심복 노릇을 즐기고 있지만, 그는 집토끼 사이에서 트럼프 인기가 떨어지면 등을 돌릴 인물이다.
다행스럽게도 하원의 견제력은 뮬러 특검의 파괴력과 결합하여 트럼프에게 공포를 심어 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2019년 2월 23~24일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촘촘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안에는 아직 자신의 직무 원칙과 내면의 고결성(integrity)을 지키는 이들이 많다. 뮬러 특검팀만이 아니라 트럼프가 임명한 제프리 버먼(Geoffrey Berman) 검사장을 중심으로 한 뉴욕 남부 연방 검찰청은 살아 있는 권력을 상대로, 특검을 뛰어넘는 전 방위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 특검, 뉴욕 남부 연방 검찰청, 의회의 삼두마차는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낸다. 특검이 특검법의 규정 안에서 트럼프가 국가 안보를 해쳤는지 기소의 핵심 기준선을 제시하고 뉴욕 남부 연방 검찰청은 국가 안보 사안뿐 아니라 모든 범죄 혐의를 조사해 기준선을 제시한다. 의회는 이 두 가지 기준선을 고려하면서 각종 위원회에서 이 잡듯이 파헤치고 민심의 법정 앞에 세운다.
이 삼두마차는 공작에 뛰어났던 닉슨이든 벼랑 끝 전술과 상대 흠집 내기의 대가인 트럼프든 임기 기간은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피해 갈 수 없는 칼날이다. 앞으로도 자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가 누구라도 이 삼두마차는 지옥 끝까지 추적할 역량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 공화국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비록 건국의 시조들은 무덤에 있지만 그들이 설치해 놓은 촘촘한 견제망은 아직도 미국 공화국을 지탱하는 힘이다.
하지만 정치학자 브라이언 클라스(Brian Klaas)는 이러한 자의적 통치가 벌써 사람들에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처음에 트럼프가 중동 국가 출신 시민들에게 여행 금지 조치를 내리자 대규모 저항 운동이 일어났지만 몇 달 후 약간 수정된 금지 조치에는 눈에 띄는 저항이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비슷한 패턴이 샬러츠빌(Charlottesvile) 총기 난사 사태에서도 재현되었다. 처음에 트럼프가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시위자들을 네오 나치로 비유했을 때, 큰 반발이 일어났지만 한 달 후 똑같은 망언에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2]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권위주의적 조치와 담론들이 그저 일상적인 것으로 수용되기 시작하는 셈이다. 권위주의의 일상화가 위험한 것은 공화주의의 근간인 법에 의한 지배의 권위가 무너지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정서가 격화된다는 사실이다. 건국의 시조들이 그토록 걱정하던 미래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제임스가 트럼프를 가리켜 ‘개자식 자본주의’라고 지칭한 현상은 이미 오래전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리드먼이 그토록 칭송한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이후 초당적 합의를 얻으면서 부패도 비례해서 증가해 왔다. 사람들은 인간적 협력과 신뢰보다 비인간적 경쟁과 힘의 논리에 적응해 갔다. 심지어 표절 등의 금기 행위도 1980년대 이후 증가 추세라고 한다. 자의적 지배의 상징인 금권 정치와 마키아벨리가 말한 바 있는 약자를 위한 보호라는 법 지배 사상은 조화될 수 없다. 사실 철저한 자기애로 뭉친 ‘개자식’ 트럼프의 특징은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금권 사회의 결과이다. 트럼프는 공화국 파괴의 원인이 아니라, 누적된 파괴의 결과이자 완성이다.
뇌 심리학자인 사이먼 배런코언(Simon Baron-Cohen)은 《공감 제로》에서 이렇게 타인과의 공감 능력이 바닥난 상태를 ‘악’으로 부르자고 주장한다. 배런코언 식으로 보자면 오늘날 타자에 대한 공감 결여와 극도의 혐오 및 폭력이 만연한 미국 사회는 악이 창궐하는 사회다. 트럼프 현상의 진정한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악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트럼프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한 것이 이제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영화감독 구자홍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인터뷰의 내용과 최근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오컬트 영화의 유행을 언급하면서 디스토피아 시대가 다가오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과연 미국의 리버럴이 집권하면 미국이 민주 공화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물론 트럼프의 자의적 지배와 달리 듀 프로세스는 많이 개선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미국의 금권 정치 시스템은 곳곳에서 너무 많이 무너졌다. 어쩌면 자본에 법인격을 부여하는 순간, 모든 건 예정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금융 국가론 대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농업 국가론 사상 투쟁에서 해밀턴이 승리하고 반연방주의자들의 소규모 공동체론이 연방주의자들의 제국론에 패배하는 순간, 공화국의 타락은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지 않는 한 국가의 근본 원리를 바꾸기 위한 제헌 의회가 다시 소집될 수도 없다. 헌법 수정의 문턱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의회에서의 지루한 논의 끝에 그저 몇 가지 보완 장치만 마련하다가 교착 상태에서 다시 신경 발작과 같은 포퓰리즘이 등장할 것이다.
다음에 등장할 트럼프가 덜 자의적이고 덜 충동적이라면 사실은 더 위험하다. 보수 강경파 대선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가 파괴하지 못한 것을 내용은 같지만 스타일은 부드러운 레이건이 파괴한 것처럼 말이다. 난폭한 트럼프가 파괴하지 못할 것을 품위 있는 새 트럼프가 파괴할 수 있다.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라는 냉전 시기의 걸출한 전략가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는 첩경은 내부 민주 공화국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 바 있다. 케넌의 충고를 진지하게 따른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 민주주의는 군비 경쟁이라기보다 가치 경쟁에서 승리했다. 냉전에 대한 수정주의 역사학자인 존 개디스(John Gaddis)의 지적처럼 2차 세계 대전에 초대받은 제국인 미국과 초대받지 않고 강압적으로 개입한 소비에트 사이의 대결은 출발부터 승부가 갈려 있었다.[3] 미국은 민주 공화국의 핵심을 지켜 낸 뉴딜과 전 유럽에 미국 모델을 퍼뜨린 마셜 플랜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지금 민주 공화국의 훼손과 그 결과로서 트럼프의 집권, 가치의 침식은 미국의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게 한다. 이제 자유주의의 활력은 끝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