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촉발된 디지털 놀이 게임 문화는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 혁명을 시작으로 가정용 게임기로 확산했다. 소비자들이 영화나 음악, 연극이 아닌 게임에 주목하기 시작한 큰 이유는 쌍방향 피드백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조작하고 움직이는 것에 따라 이후의 결과가 바뀐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1장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게임의 파급력에 관한 내용이다. 원자력 연구소를 방문하는 관계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시작된 게임이 전 세계를 들썩거리게 만들고 100엔 동전 품귀 현상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거실 게임 문화라는 새로운 유행도 생겨났다. 우후죽순 쏟아진 게임들 덕분에 발생한 아타리 쇼크는 게임 산업 기틀을 마련했다.
게임이 단숨에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자극의 효과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직접 조작하며 공을 치거나 외계인을 공격할 수 있었다. 적을 무찌르거나, 상대방을 이기거나,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을 때의 자극은 그 어떤 콘텐츠가 주는 자극보다 짜릿했다. 자극은 또 있다. 바로 ‘상상력’의 자극이다.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도트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외계 침공이라고 생각했고, 공사 중인 초고층 빌딩으로 오르는 배관공이 거대한 킹콩을 물리치러 가는 중이라고 상상했다. 이러한 자극은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게임 업계는 더 강한 자극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상상하고, 세계를 개발했다. 우주와 새로운 행성, 미래 세계와 악마의 지옥까지 모두 그 소재가 됐다. 남들과 같은 게임을 만들어서는 안 됐다. 개발자들은 자극적인 소재와 그래픽을 찾기 시작했고,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게임을 만들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자극의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디지털 놀이의 등장
첫 디지털 놀이, 게임의 등장은 1958년 미국의 물리학자 월리엄 히긴보섬(William Higinbotham)이 만든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였다. 〈테니스 포 투〉는 저항과 콘덴서, 계전기의 전파 움직임을 이용한 게임으로, 테니스와 유사한 모습을 갖췄다. 레버를 어떻게 조작하느냐에 따라 공이 날아가는 강도, 각도가 달라졌고, 상대방은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르면 그럴싸한 받아치기가 가능했다. 거창한 그래픽이나 사운드는 없었지만, 계전기에 보이는 공의 움직임은 원자력 연구소 직원들은 물론, 이곳을 찾아온 방문자들에게도 인기였다. 〈테니스 포 투〉의 등장은 디지털 기기로 계산이나 연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첫 사례였다. 아쉽게도 연구소 밖으로 나가 상용화 되지는 못했지만, 이 게임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예고했다.
실제 디지털 놀이를 시장에 알린 사례는 1962년, 컴퓨터 과학자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이 대학 동기 마틴 그랫츠(Martin Graetz), 웨인 위터넨(Wayne Wiitanen)과 함께 선보인 〈스페이스워!(Spacewar!)〉다. 스티브와 마틴, 웨인은 MIT 재학 시절, 한 학기를 게임 개발에 매진했다. 1962년 2월, 드디어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게임인 〈스페이스워!〉가 등장했다. 게임의 구조는 간단했다. 가속 버튼, 좌우 회전 버튼을 이용해 움직였고 미사일 버튼을 누르면 공격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가 다른 이의 우주선을 격추한다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게임의 초기 버전에는 단순히 승패만 있었다. 게임에 흥미를 느낀 다른 대학 동기인 앨런 코톡(Alan Kotok)과 댄 에드워즈(Dan Edwards), 피터 샘슨(Peter Samson)이 게임 오버와 점수 규칙, 운석이라는 방해 요소 등을 추가했고, 〈스페이스워!〉는 비로소 현대적인 게임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스페이스워!〉의 최종 완성 버전은 1963년에 나왔다.
인기는 대단했다. 다른 지역 교수와 대학생들까지도 이 게임을 플레이해 보기 위해 MIT에 방문했다. 이는 미국의 IT 산업을 바꿀 혁명의 시초였지만, 게임이 상용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비용이었다. 시장에는 비싼 공학용 컴퓨터가 아닌 저렴한 보급형 제품이 필요했다. 〈스페이스워!〉를 개발했던 컴퓨터 ‘PDP-1’은 ‘덱(DEC)’에서 1959년 선보인 천공 테이프 기반의 미니컴퓨터다. 730킬로그램의 육중한 무게에도 ‘미니’로 불린 이 컴퓨터는 당시 가격은 12만 달러, 한화 약 1억 5000만 원의 가격을 자랑했다.
1971년 9월 개발자 빌 핏츠(Bill Pitts)와 휴 턱(Hugh Tuck)은 ‘PDP-11/20’ 용 게임을 선보인다. 이 기기는 가격과 기체 크기 등을 줄인 새로운 형태의 미니컴퓨터였다. 비행기 레버와 흡사한 레버 두 개와 여섯 개의 옵션 버튼, 그리고 동전 투입구가 디스플레이 양쪽에 마련돼 있었다. 이 게임이 바로 최초의 동전 투입식 게임기 〈갤럭시 게임(Galaxy Game)〉이다. 〈스페이스워!〉와 흡사하지만, 게임적 요소가 더욱 강했다. 단순 공격뿐 아니라 유도탄과 같은 요소가 있어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했다. 둘 다 상용화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게임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빌과 휴는 자신들이 다니던 미국 스탠퍼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의 학생들을 상대로 홍보했고 1979년 5월, 기기를 완전히 철수하기까지 제법 많은 수익을 냈다. 공식적인 수익은 집계되지 않았다.
1971년 11월에는 놀런 부시넬(Nolan Bushnell)과 테드 댑니(Ted Dabney)가 만든 상업용 비디오 게임기, ‘컴퓨터 스페이스’를 통해 〈스페이스워!〉 리메이크 버전이 출시됐다. 컴퓨터 스페이스는 흔히 오락실 등의 특정 장소에서 화폐를 지급하고 플레이하는, ‘아케이드 게임’으로 불리는 기기의 최초 버전이었다. 테드가 동전을 넣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기획했고, 놀런은 동전 투입 시 ‘1 Coin’을 확인하는 코드와 기기를 만들어 반영했다. 비싼 가격 때문에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놀런은 성공 가능성을 엿봤고, 본격적인 창업에 들어섰다.
그렇게 탄생한 업체가 ‘아타리(Atari)’였다.
미국을 삼킨 본격 상업화 게임 〈퐁〉
놀런 부시넬은 유타대학교(University of Utah) 전기공학과 재학 시절 〈스페이스워!〉를 보고 게임 산업의 미래를 내다봤다. 1972년 6월 27일, 놀런은 학업을 중단하고 테드 댑니와 함께 500달러로 아타리를 설립한다. 그들이 선보인 〈스페이스워!〉 리메이크 버전은 1500대를 판매해 3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런데도 적자를 봤다. 놀런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더 많이 팔릴 제품이 필요했다. 두 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서둘러 인재 모집에 나섰다. UC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전자공학과 출신의 앨런 알콘(Allan Alcorn)은 그렇게 아타리에 합류했다. 놀런과 앨런의 만남은 향후 게임 산업의 태동이자 경쟁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게임, 〈퐁〉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1972년 11월 29일 출시된 〈퐁〉은 앨런이 만든 스포츠 게임이다. 두 개의 컨트롤러를 가진 이 게임은 탁구처럼 공을 튕겨내며 겨루는 대전 방식을 띄고 있었다. 둥근 형태의 다이얼인 노브의 회전 속도에 따라 게임 속 바가 움직였고, 공이 바 뒤로 넘어가면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몇몇 상가나 술집에서만 구매 의뢰가 왔다. 놀런과 임직원들은 직접 전단을 뿌리며 게임을 홍보했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놀런은 낙심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개발이 완료된 후 본격적인 생산과 납품이 이뤄지자 분위기는 반전됐다. 이전에 게임을 구매했던 술집과 상가, 그 주변의 가게에서 구매 문의가 쏟아졌다. 입소문을 탄 것이다. 기기 판매량은 수직으로 상승했고, 납품은 구매 문의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놀런은 흥분하는 대신 다음 수를 준비했다. 바로 〈퐁〉의 가정용 게임기 개발이었다.
아타리는 엔지니어 헤럴드 리(Herald Lee)를 영입했다. 헤럴드는 난해한 문제였던 〈퐁〉의 보드 크기를 줄이고, 게임이 칩 하나로 구동될 수 있게끔 했다. 헤럴드 리가 기기를 발전시키는 동안 외판 경험이 풍부한 진 립킨(Gene Lipkin)도 합류했다.
1974년 말, 가정용 〈퐁〉의 시제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임은 아케이드 〈퐁〉과 같았다. 하지만 크기는 10분의 1로 줄었고 조작은 좀 더 쾌적했다. 브라운관 TV와 연결해도 화면은 깔끔하게 출력됐다. 이제 판매만 남았다. 판매 담당 진은 당시 유명했던 백화점 ‘시어스(SEARS)’와 미팅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어스 측은 1975년을 기한으로, 15만 대 독점 납품 계약서에 서명한다. 이제 대량 제작을 위한 시설 확충이 필요했다. 놀런은 투자 미팅 경험이 있었던 도널드 발렌타인(Donald Valentine)[1]을 찾았다. 가정용 〈퐁〉의 성능에 놀란 도널드는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다.
덕분에 아타리는 가정용 〈퐁〉 15만 대를 차질 없이 생산했다. 연말 시즌에 맞춰 납품까지 완료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대대적 홍보를 진행한 시어스 백화점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가정용 〈퐁〉은 연말에만 7만 대 이상이, 석 달도 되지 않아 15만 대가 팔렸다. 〈퐁〉의 성공은 아케이드 게임과 가정용 게임기 경쟁의 시발점이다. 상업적 성공과 실패, 그리고 플랫폼의 변화까지 게임 산업의 발전 구조를 시사한 사례로도 많이 언급된다. 〈퐁〉의 성공은 많은 반도체, 전자·전기, 완구 회사가 게임 개발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모두가 게임 산업의 장래는 밝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 ‘아타리 쇼크’
1983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1982년까지 30억 달러 규모로 미친 듯이 성장하던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이 거짓말처럼 무너진 것이다.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간 1985년의 시장 규모는 종전의 3퍼센트 수준인 1억 달러에 그쳤다. 이 사태가 바로 ‘아타리 쇼크(ATARI Shock)’다.
〈퐁〉의 대성공으로 막대한 자금과 영향력을 갖추게 된 아타리는 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인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 착안해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들어간다. 플랫폼을 장악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이 될 것으로 판단한 놀런은 1976년 대중 매체 기업 ‘워너 커뮤니케이션(Warner Communications)’[2]에 회사를 매각한다. 금액만 2800만 달러 규모의 빅딜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가 1977년 출시된 ‘아타리 2600’이다. 2세대 가정용 게임기의 시작이자 게임 대란의 시초이기도 하다. 아타리 2600은 유명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가정에서 즐길 수 있다는 강점을 비롯해 롬 팩 교체 방식 도입, 고급스러운 외형으로 인기를 끌었다. 199달러라는 높은 가격도 그 인기를 사그라들게 할 수 없었다. 승승장구하는 아타리 2600으로 인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회사를 온전히 장악하고 싶은 워너 경영진과 게임 산업을 이끌고 있다는 자신감에 찬 놀런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워너 경영진은 여러 핑계로 놀런을 압박했고 결국 백기를 든 그는 ‘동종업계에서 근무하지 않겠다’라는 조건으로 퇴사한다.
그가 떠난 후 아타리 후임 대표로 레이먼드 에드워드 카사르(Raymond Edward Kassar)가 발탁됐다. 그러나 그가 게임 업계에 경험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며 아타리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내부 개발자에 대한 처우였다. 아타리는 그동안 출시되는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권리를 독점해왔다. 그러다 보니 게임이 성공해도 개발자들에겐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 1979년 5월, 내부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들은 경영진에게 게임 저작권료 지급과 게임 내 개발자의 크레딧 표기를 요구했다. 레이먼드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이 사건은 대규모 퇴사로까지 이어졌다. 퇴사한 개발자들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타리 2600에 최적화된 게임을 개발했고 직접 소매점을 통해 만든 게임을 출시해 수익을 냈다. 레이먼드는 그들에게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백기를 든 쪽은 아타리였다.
소프트웨어가 없인 활로를 열 수 없던 아타리는 다수의 개발사에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거래한다. 이때 처음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서드 파티(Third Party)’다. 서드 파티는 기본적으로는 제삼자를 뜻하는 단어지만, 대체로는 제조자와 사용자 이외, 외부의 생산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게임 업계에서는 콘솔 하드웨어 제조사에 라이선스를 받아 해당 콘솔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을 제작하는 회사를 칭한다. 공식적으로 아타리 2600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그들은 1980년대 초반 게임 산업의 전성기를 이끈 주옥같은 명작들을 쏟아내며 성장을 이끈다. 라인업 확보에 성공한 아타리는 1980년 한 해 2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다. 많은 신생 업체들이 아타리와 서드 파티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하자 수익은 더 상승하기 시작했다. 많은 투자자가 기술이 조금이라도 있는 회사를 찾아 거액을 투자했으며, 음반 회사까지 서드 파티 계약을 체결해 게임을 선보였다.
서드 파티가 늘어나자 수익도 자연스럽게 쌓였다. 아타리 게임기로 게임을 출시하기 위해 내야 하는 로열티만으로도 아타리는 매달 최고 수익을 경신했다. 넘치는 돈에 아타리는 자제력을 상실한다. 로열티만 받았다면 기본적인 퀄리티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채 게임을 출시하는 일이 빈번했다. 수익에 기뻐하는 아타리와 달리 게임 시장은 시끄러웠다. 〈콜레코비전〉부터 〈RCA 스튜디오Ⅱ〉, 〈벡트렉스〉, 〈인텔리비전〉, 〈마그나복스 오디세이2〉 등 아타리 2600 게임이 다른 경쟁 게임기용으로도 출시되는 저작권 위반 사례부터 부적절한 내용의 게임도 마구 쏟아졌다. 이로 인해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악화했고 일부 학교, 학부모를 중심으로 게임에 대한 규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홈 컴퓨터라는 적수도 등장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코모도어(Commodore)’[3]는 299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홈 컴퓨터 게임 시대를 연다. 게임 외에도 교육 등 여러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이 제품은 아타리 선정성과 폭력성 논란에 지쳐있던 학부모들의 선택을 받았다. 코모도어는 게임 때리기 마케팅을 성공한 이후 1982년, 성능을 올린 ‘코모도어64’[4]를 595달러로 출시했고, 1983년에는 399달러까지 가격을 인하해 판매하기도 했다. 여기에 경쟁사의 기기를 가져오면 100달러를 추가 할인해주는 프로모션까지 더하며 전방위로 아타리를 압박했다.
아타리의 시장 예측 실패도 큰 문제였다. 당시의 게임 제작은 발주 기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유통사는 판매 수량을 예측해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했다. 매년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 중인 비디오 게임 시장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관계사들은 다음 해의 판매 예정 수량을 매우 높게 책정했다. 아타리의 대작 〈팩맨〉도 출시 예정이었기 때문에 발주량은 역대 최고를 찍는다. 북미 기준 〈팩맨〉 주문량은 1200만 장이었다. 1982년 3월 출시된 아타리 2600용 〈팩맨〉은 이름값만으로 700만 장이 판매된다. 하지만 좋지 못한 품질과 각종 버그로 반품 요청이 쏟아졌고 500만 장 이상이 재고로 남게 된다. 큰 재정적 위기가 닥쳤음에도 아타리는 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증권사와 언론도 지금의 위기를 기우로 치부했다. 모두가 안심하던 그 사이, 아타리는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 문제를 개선할 수 있었던 시기를 놓치게 된다. 데드라인을 넘긴 아타리는 역대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린다.
1982년 8월 후발 주자로 들어온 서드 파티 게임 판매량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기대작으로 손꼽히던 게임들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해 12월 8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아타리의 수익 전망을 매우 낮게 설정하고, 임원 전부를 해임한다. 이 소식은 뉴욕 증권 시장에 직격타를 날렸고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주가 대폭락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워너는 부랴부랴 연말 실적 향상을 위한 게임 개발에 나선다. 아타리 쇼크의 전설로 불린 〈아타리 E.T〉가 이때 등장한다. 400만 개 넘게 물량을 뽑아 놓은 이 게임은 채 50만 장도 팔리지 않았고 그중 70퍼센트 이상이 1983년 상반기를 못 넘기고 반품됐다. 1982년 아타리의 4분기 영업 이익은 고작 120만 달러였다. 수많은 게임이 5달러 이하로 덤핑 판매됐고 개발사들이 줄도산했다.
1983년 아타리는 5억 3600만 달러 손실을 기록한다. 그리고 1984년 2분기는 4억 2500만 달러 손실을 냈다. 워너는 백기를 들고 아타리를 아케이드와 홈 컴퓨터, 비디오와 전화기 사업부로 나눠 분할 매각한다. 이에 따라 아타리는 1985년 ‘남코(現 반다이남코엔터테인먼트)’에 넘어간다. 아타리는 사라졌지만, 쇼크는 이어졌다. 게임 유통 산업부터 카트리지를 비롯해 주변 기기, 패키지 제작업 등 게임과 연관된 여러 분야가 회복이 힘들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북미 게임 산업 자체가 5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후 비디오 게임기 산업의 주도권은 북미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1985년 10월 18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으로 불리는 기기가 북미에 출시됐다. 1983년 출시돼 일본에서 가정용 게임기 열풍을 주도했던 ‘패밀리 컴퓨터(이하 ‘패미컴’)’가 텅 비어버린 북미 게임 산업에 무혈입성한다. 닌텐도는 콘솔이라는 이름 대신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드웨어 록 아웃 칩 반영 및 라이선스 제품 인증 표식을 부여하며 제품과 품질 관리에 힘썼다. 닌텐도는 질 낮은 게임에 지쳤던 이용자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됐다. 이후 ‘세가’의 ‘SG-시리즈’와 ‘마크Ⅲ’, ‘세가 마스터 시스템’,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등 품질을 강조한 일본 게임기가 북미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겨우 버티고 있던 북미 게임기 업체를 모조리 밀어낸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의 ‘엑스박스 Xbox’가 파상공세를 쏟아내기 전까지, 미국 게임 산업은 일본 산업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됐다. 놀런이 떠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아 북미 게임 산업이 멸망하리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아타리 쇼크는 게임뿐 아니라 전자 기기 산업과 영화 산업에도 여파를 남겼다. 이로 인해 디지털 문화가 큰 하나의 방향을 잡게 됐으며, 품질이 소비자를 만든다는 철학이 크게 대두되기 시작한다.
〈슈퍼마리오 〉와 〈팩맨 〉, 자극을 다양화하다
평범한 영웅의 등장
1981년 7월 9일 출시된 〈동키콩〉 게임은 한 남자가 등장해 미녀를 구출하는 플랫폼(platform·발판) 액션 게임이었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멋진 기사도, 시금치 먹은 뽀빠이[5]도 아닌 작업복 차림의 평범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 평범한 남자는 곧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데, 그가 바로 닌텐도의 대표 캐릭터인 ‘마리오’다. 〈동키콩〉 게임은 마리오가 굴러오는 나무통을 점프로 피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연결된 컨베이어 벨트를 끊어내면 동키콩이 추락해 미녀를 구하게 된다는 내용의 게임이었다. 스톱모션 기법과 특수 촬영이 더해진 명작 〈킹콩(King Kong)〉[6]의 영향을 받았다.
이 게임을 개발한 직원은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킹콩〉과 뽀빠이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프로그래밍 외주를 둔 상태로 업무를 시작해 3개월 만에 〈동키콩〉을 만들었고, 〈동키콩〉은 닌텐도를 연 매출 1억 달러의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미야모토는 만족하지 않았다. 모두가 게임에 집중할 때, 그는 캐릭터를 바라봤다. 미야모토는 조금 더 자유로운 스타일을 원했다. 다양한 시도 끝에 두 개의 버튼만으로 다양한 액션을 구사하는 독특한 게임을 출시한다. 그렇게 탄생한 게임이 1985년 9월 13일 출시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다. 패미컴으로 출시된 이 게임은 일본에서만 681만 개, 전 세계적으로는 4000만 개 이상 팔렸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8200만 장의 〈위 스포츠(Wii SPORTS)〉와 7500만 장의 판매량을 올린 크래프톤의 〈배틀그라운드(PUBG: BATTLEGROUNDS)〉 이전까지 가장 많이 팔린 ‘단일 플랫폼 패키지’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
성공 요인에는 미야모토도 있었지만, 이색적인 매력을 뽐내는 마리오의 활약이 컸다. 버섯을 먹으면 성장하는 그는 지극히 평범한 느낌의 배관공이었다. 그런 캐릭터가 공주를 구하고 쿠파라는 악당을 제압하는 장면은 이상하리만큼 쾌감을 안겨 줬다. 이유는 간단했다. 모두가 멋지고 아름다운 캐릭터에 주력할 때 마리오는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마리오라는 캐릭터가 실제로 구현해 냈다.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마리오에 몰입했고, 그가 활약하는 판타지 세계에도 열광할 수 있었다.
그 인기에는 마리오라는 이름도 한몫했다. 이름은 닌텐도 북미 지사에서 탄생했다. 당시 닌텐도 북미 지사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사무실 임대료도 밀린 상황이었다. 연체에 화가 난 건물주가 사무실을 항의 방문했는데 직원들이 태연하게 게임을 하는 상황을 보게 됐다.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단단히 으름장을 놓던 건물주가 인상 깊었는지 북미 지사 직원 중 한 명이 미야모토에게 점프맨의 이름을 건물주 이름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른 체형이었던 캐릭터의 모습도 약간은 통통한 모습으로 바꾸자고 덧붙였다. 설명을 들은 미야모토는 개발 중인 게임과 어울린다고 판단해 즉각 반영했다. 건물주의 이름은 ‘마리오 시갈리’였다. 그는 향후 〈슈퍼마리오 〉가 대성공을 거두자 “저작권료 받으면 좋겠다”라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마리오가 나오는 게임들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한다.
〈슈퍼마리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고 각종 플랫폼으로 확장돼 출시되기 시작했다. 본편 시리즈를 제외해도 약 250편이 제작돼 이용자를 만났으며, 파티나 카트 등의 스핀오프 게임으로 영역을 확장해 지금까지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마리오는 링크와 함께 닌텐도의 얼굴이 됐다. 현재까지 〈슈퍼마리오〉 시리즈는 전 세계 5억 장 이상이 판매됐다. 액션과 난관 극복 등 여러 재미 요소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게임을 즐기는 모두를 대변하는 평범한 캐릭터인 마리오가 있다. 미야모토의 천재성과 그의 게임을 향한 열정과 친근한 ‘이상한 나라의 배관공’ 마리오의 결합은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최고의 만남이었다.
여성을 공략하라
한편 1980년 5월 22일 출시된 남코의 〈팩맨〉은 1979년 10월 출시한 〈갤럭시안(Galaxian)〉과 함께 1980년대 남코의 중흥기를 이끈 대표작이다. 당시 일본 게임 센터에서는 슈팅 게임이 유행이었고, 이전 작인 〈갤럭시안〉의 성공으로 남코는 여유 있는 라인업 확대를 준비 중이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남코는 전혀 다른 장르 개발에 나선다. 바로 이와타니 토오루다. 그는 남성 위주의 게임 노선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뒤에서 구경만 하던 여성 이용자들을 전면에 내세운 게임이 나온다면 시장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 판단했다.
이와타니는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폭력적 요소가 적고, 호기심을 이끌 아이템과 귀여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스테이지 사이에 긴장을 풀 수 있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탄생한 〈팩맨〉은 그간의 게임 시장이 미처 확보하지 못했던, 여성 유저를 위한 게임이었다. 노란색 동그란 얼굴과 웃는 입이 인상적인 스마일 마크[7]가 캐릭터를 개발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다. 익숙한 스마일 마크에 입을 움직이며 먹는 듯한 모습을 더해 이동하는 동작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하나의 행동이 여러 의미를 띄자 색다른 캐릭터가 탄생했다.
캐릭터가 먹는 것도 다양한 요소로 분화했다. 게임을 완료하기 위한 스테이지 구슬부터 보너스 점수 디저트, 그리고 큰 구슬인 ‘파워 펠렛’을 먹으면 도망치기만 해야 했던 적인 ‘유령’을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이 요소는 보너스 점수와 재미로 시작됐지만 향후 많은 게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와타니의 아이디어는 내부 시연에서 호평을 받았고 특징에 맞춰 게임의 이름도 일본어 파쿠파쿠(ぱくぱく・뻐끔뻐끔)에서 착안한 〈퍽맨(PUCK MAN)〉으로 결정됐다. 야심찬 시작이었지만 출시 직후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여전히 게임 센터는 남성 이용자 위주로 구성돼 있었고, 〈퍽맨〉은 유치한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남코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PUCK’이 영어권 나라 비속어와 발음이 흡사하다는 지적에 맞춰 〈팩맨 〉으로 이름을 바꿨다. 내부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입소문은 바다 건너 일본으로 이어졌다. 〈팩맨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오히려 게임기의 판매량도 함께 오르기 시작했다. 이와타니는 〈미즈 팩맨(Ms. PACMAN)〉이라는 새로운 게임도 출시했다. 게임 센터에 온 여성 이용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팩맨 〉을 선택했다. 〈팩맨〉 돌풍이 전 세계를 휩쓸자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기업을 매수하려는 상대 기업을 역으로 매수하는 방식으로 막아내는 전략을 일명 ‘팩맨 방어’라고 불렀다. 〈팩맨 〉은 ‘동전을 넣고 하는 게임기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수많은 아류작을 탄생시켰다. 남코는 〈팩맨〉의 성공을 발판으로 다양한 연령층을 겨냥한 게임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남코는 이후 출시된 〈갤러그 (Galaga)〉로 또 대박을 터뜨렸고 〈제비우스 〉와 캐주얼 퍼즐 게임 〈디그더그〉[8]로 연타석 홈런에 성공하며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팩맨〉의 가치는 여성에 대한 존중이었다. 〈팩맨 〉은 남성 위주의 게임 센터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왔고 이후 게임 산업은 여성과 가족 친화적인 게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 명의 생각은 나비 효과가 돼 게임 산업 전체를 움직였다. 〈팩맨 〉의 성공은 게임이 추구하는 가치를 잘 보여 준 대표적 사례다. 〈팩맨 〉 이후 게임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됐고,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아도 재미있게 빠져들 수 있는 대상이 됐다. 게임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식은 다양한 성공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팩맨〉이 아직까지 사랑받는 이유다.
세가의 얼굴이 된 〈소닉〉
매력적인 캐릭터와 최신 게임기의 결합이 가져온 효과는 이미 닌텐도의 마리오로 증명됐다. 세가는 마리오처럼, 자신들에게도 상징이 될 얼굴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당시 개발 중이던 게임기 ‘메가 드라이브’의 성공을 위해서도 모두를 유혹할 캐릭터가 필요했다. 세가에는 새로운 캐릭터를 개발할 스튜디오 ‘AM8’이 만들어진다. 수장에는 나카 유지가 선발됐다. 임원진의 주문을 확인한 나카는 사내 공모전을 내고 디자인 수집에 들어갔다.
캐릭터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가운데, 게임 개발도 탄력을 받아 나아갔다. 큰 방향성은 〈슈퍼마리오〉를 벤치마킹하면서도 속도감은 높이고, 조작은 더 쉽게 만드는 것이었다. 빠른 속도감은 연출로 구현할 수 있었다. 개발 초기 〈소닉 더 헤지혹〉은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움직이는 식이었다. 때문에 사물이 빨리 지나가는 느낌보다는 캐릭터가 허공에 뜬 느낌이 강했다. 이 지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자들은 실제 레이싱이나 축구 중계 장면에서 카메라가 황급히 자동차와 공을 따라가는 장면을 참고했다. 결과적으로 소닉보다 한 발짝 늦게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가 게임에 반영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테스트를 한 세가 직원들은 소닉이 달리다가 장애물에 충돌하거나 360도 턴을 돌 때 ‘움찔’ 할 정도로 놀랐다. 카메라 연출 하나로 원하던 특징이 명확하게 살아났다. 조작은 한 개의 버튼과 십자 키 조합으로 구성됐다. 나카는 〈슈퍼마리오〉 플레이에서 빠르게 달리기 위해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이 지점을 보완하고자 〈 소닉 더 헤지혹〉에서는 방향키 하나만으로도 천천히 속도가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캐릭터 개발도 게임의 콘셉트에 맞추어 진행됐다. 캐릭터가 충족해야 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빠른 속도감과 생동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고, 점프 동작에 공격 요소가 포함돼야 했다. 그때 나카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동물이 있었다. 아르마딜로와 고슴도치였다. 아르마딜로와 고슴도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둥글게 만다. 나카와 팀원들은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다. 공격과 방어에 적합한 가시를 갖고 있고, 생동감을 표현하기 유리한 고슴도치가 최종 캐릭터로 선정됐다. 이름은 속도감을 표현하는 단어인 ‘슈퍼소닉(Supersonic)’을 줄인 ‘소닉’으로 가닥을 잡았다. 색상도 세가를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정해졌다.
출시가 임박한 시점에 세가 북미지사 직원들이 테스트에 참여했다. AM8 팀이 원한 북미 성향을 구현했는지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다(Not Bad)’였다. 예상치 못한 의견에 당황한 나카는 어떤 점이 문제인지 물었다. 담당자는 “게임이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담당자는 넌지시 목숨을 의미하는 ‘링’이 한 개라도 남아 있으면 죽지 않게 하는 방향을 제안했다. 이는 플랫폼 게임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자 난도를 높이는 요소인 ‘한 방에 게임 오버’ 시스템과 미션 완료 목표를 단순화하자는 제안이었다. 나카는 프로그래머에게 곧바로 지시를 내려 링 시스템을 수정했다. 수정 이후 링의 개수는 높은 점수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일 뿐, 스테이지를 완료하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않게 됐다. 링 시스템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게임은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됐다. 이 변화는 〈소닉 더 헤지혹〉과 16비트 게임기 ‘메가 드라이브’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독특한 파란 초음속 고슴도치는 신선한 느낌을 줬고 속도감과 성취감과 재미를 주는 게임성은 젊은 이용자들을 매료했다.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는 1991년 6월 23일 나온 〈소닉 더 헤지혹〉의 인기에 힘입어 1985년 이후 줄곧 1위를 지키고 있던 닌텐도를 밀어내고 콘솔 게임기 시장의 과반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소닉 더 헤지혹〉의 종합 판매량은 1500만 장으로, 소닉 게임 전체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후 소닉은 세가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한다. 소닉의 등장은 아타리 쇼크로 기울어버린 운동장이 된 북미 콘솔 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사건으로 회자된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닌텐도는 휘청거렸고 북미 공략에 열을 올리기 위한 새로운 타이틀 준비에 매진하게 됐다. 파란 고슴도치를 내세운 세가는 ‘메가 드라이브’와 ‘세가 제네시스’, ‘세가 새턴’, ‘드림캐스트’로 연결되는 콘솔 라인업을 통해 닌텐도와 경쟁한다.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신흥 강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가와 닌텐도는 경쟁을 이어가며 1990년대의 콘솔 게임 시장을 풍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