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와 인내의 레이스
완결

속도와 인내의 레이스

가장 가혹하고, 가장 숭고하며, 가장 추앙받는 자동차 경주. 르망 24시 레이스 100년의 역사에는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Adobe Stock

1. 24시간의 레이스 르망, 100주년을 맞다


비와 바람, 우박과 진창. 그리고 수렁으로 변하지 않은 트랙의 일부는 스케이트장을 닮았다. 어떤 차량도 코스를 완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기 전의 예측이 정말로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출발한 33대의 차량 가운데 무려 30대가 체커 깃발(chequered flag)[1]을 받아냈다.

오는 6월 10~11일 주말이면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자동차 경주가 100주년을 맞는다. 우승 차량이 결승선을 넘기 위해서는 500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야만 한다. 빗물에 흠뻑 젖었던 1923년 첫 대회의 우승 차량의 완주 거리는 230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혹하고, 가장 숭고하며, 가장 추앙받는 자동차 경주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그것이 바로 ‘르망 24시간 레이스(Les Vingt-Quatres Heures du Mans)’의 서막이었다.

도요타, 페라리, 캐딜락, 포르쉐 등 르망에 참가하는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 자동차를 파는 것이다. 이 대회의 부와 명성은 일요일에 우승을 차지하는 세 명의 드라이버 팀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제조사들의 성공 여부는 트랙에서 벌어지는 일로 판단되지 않는다. 향후 12개월 동안 차량 판매가 얼마나 증가하느냐로 결정된다.

물론 자동차 회사들의 목적이 매년 6월 세계 최고의 인듀어런스 레이스(endurance race)[2]를 보기 위해 프랑스 사르트(Sarthe) 지역에 몰려드는 수천 명의 관중들이나 텔레비전으로 경주를 시청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포츠다. 그러나 수백만 유로를 지출하는 제조사들에게 이 대회는 일종의 쇼윈도라고 할 수 있다.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둘러싼 낭만에 견줄 수 있는 것은 포뮬러 원(F1) 모나코 그랑프리(Monaco Grand Prix)의 화려함이나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500(Indianapolis 500)의 우승자에게 제공되는 금전적 보상 정도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레이스라는 주장은 다른 곳에서도 수없이 접할 수 있다. 그런 대회에서 온갖 최첨단 기계 장치들은 등장한다. 하지만 르망의 전설에 맞설 만한 강력한 레이스는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팬들에게는 바로 르망만이 중요할 뿐이다.

 

2. 인내심의 레이스

밤새 지속되는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인듀어런스 레이스(endurance race)라고 불린다. ©Adobe Stock

오늘날 르망 레이스는 전통적으로 하지(夏至)에 가장 가까운 토요일 오후 4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오후 4시에 마무리된다. 이 대회가 인듀어런스 레이스라고 불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양한 속도의 차량과 다양한 실력을 가진 드라이버들이 밤새 달리면서, 직선 주로인 뮬산 스트레이트(Mulsanne Straight) 구간에서는 최대 시속 30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올린다. 드라이버는 헤드라이트로 전방에서 자신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차량을 가려내는데, 레이스를 하다 보면 그런 차량을 무서울 정도로 자주 마주하게 된다. 지나가는 길을 잘못 선택하면 참사가 뒤따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지만, 지난 세기 동안 르망 대회에서는 100명 이상의 목숨이 희생되기도 했다. 1955년 피에르 레베(Pierre Levegh)가 운전하는 메르세데스 차량이 공중으로 치솟아 군중을 덮치면서 희생된 83명의 관중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건은 모터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만약 1923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드라이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빗줄기와도 싸워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면 저는 지구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회를 5회 우승한 프랭크 비엘라(Frank Biela)는 이렇게 말한다. 비가 오든 건조하든, 모든 차량은 45분마다 멈춰 연료를 채워야 하고, 때로는 타이어와 드라이버를 교체해야 한다. 기어를 2만 5000번 변속하고 레이스 코스의 5분의 4를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차량을 정비해야 한다. 레이스가 절반 정도 진행된 새벽녘이 되면 이미 피곤에 지친 드라이버들은 동료들과 교대로 휴식하며 쪽잠을 잔다.


오늘날에는 세 명으로 드라이버가 교대로 출전하는 로스터(roster) 체제를 갖추었지만, 규정이 변경된 1953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떤 팀들은 24시간 내내 단 한 명의 운전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단 한 명, 요크셔 출신의 에드워드 램스턴 홀(Edward Ramsden Hall)만이 여기에 성공했다. 1950년에 그는 자신의 낡은 벤틀리 차량을 끌고 어렵사리 8위에 올랐다. 기자 데니스 젠킨슨(Denis Jenkinson)은 “(생리 현상은) 어떻게 해결했나?”라고 묻자, 홀은 이렇게 대답했다. “녹색 멜빵바지 덕분이죠. 녹색 멜빵바지요.” 마지막으로 1인 완주를 시도한 드라이버는 피에르 레베로, 끔찍한 사고를 겪기 3년 전이었다. 그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불과 50분을 남기고 선두를 달리고 있던 그가 피로에 지친 나머지 기어 변속을 놓치면서, 탤벗 차량의 크랭크축이 부러지고 말았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르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가 되었을 것이다.

 

3. 르망의 시작, 성능 경쟁


물론 모든 전설에는 시작이 있다. 르망의 전설은 프랑스의 서부자동차클럽(ACO)이 가장 내구성이 좋은 차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계 1·2차 대전을 거치며 번창한 자동차 산업의 경쟁사들은 각자의 차량에 대하여 오랫동안 과장된 주장을 해왔다. ACO는 증거를 원했다. 세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그들은 바로 자동차 기자인 샤를 파루(Charles Faroux), ACO의 사무처장인 조르주 듀랑(Georges Durand), 그리고 대회에서 수여되었던 러지-위트워스 트로피(Rudge-Whitworth Trophy)를 기중한 에밀 코퀄(Emiule Coquille)이다.

원래는 승자를 선언하는 대회가 아니었다. 이 ‘레이스’는 단순히 내구성과 신뢰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지-위트워스 트로피는 3년제(triennial) 방식이었는데, 3년 연속 행사에 출전하여 수명과 내구성을 입증한 차량에게만 수여되는 것이었다. 이 복잡한 과정은 나중에 역시나 난해한 방식으로 대체되었는데, 레이스의 순위가 아니라 ‘성능 지수(Index of Performance)’가 결과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대중과 언론은 이 대회의 소식을 접하자 ACO의 고상한 목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결승선을 누가 가장 먼저 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성능 지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923년 5월 26일 처음 출발한 33명은 성능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18개 자동차 회사들을 대표해서 출전했는데, 세 곳을 제외한 모두가 프랑스 회사였으며, 그들 모두 자신의 자동차가 가장 튼튼하다는 것이 입증되기를 바랐다. 코스는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17.4킬로미터 길이의 비포장 도로였다. 현재도 남아 있는 6킬로미터의 뮬산 스트레이트는 오리지널 트랙의 일부였다. 전성기에는 코스의 최고 속도가 400킬로미터를 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한밤중에 드라이버들의 경각심을 유지시키기 위한 시케인(chicane)[3]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뮬산 스트레이트에서는 기어 변속이나 제동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곳을 달리던 운전자들이 그 사이 몇 분 동안 휴식을 취하며 곯아떨어지곤 했던 것이다.

현재 서킷의 대부분은 연중 51주 동안 공공 도로로 사용된다. 일반적인 운전자들에게 뮬산 스트레이트는 투르(Tours)로 향하는 RD338 도로로 알려져 있다. 페인트를 칠한 도로의 경계석이나 가드레일을 제외하고는 매년 6월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1923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1925년까지는 트랙에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았기 때문에, 드라이버들은 앞차로 인해 튀어 오른 자갈을 맞기도 했었다. 피트(pit)[4]는 급하게 텐트로 설치되어서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ACO 회원들은 천막이 덮인 곳에서 50마리의 닭고기와 450병의 샴페인으로 식사를 하고 칵테일 바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여흥을 돋우는 동안, 지붕 없는 스포츠 투어 차량에 탑승한 채로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는 드라이버들은 바람과 우박에 맞서 싸워야 했다.

당시의 규칙은 복잡했다. 각 차량에는 두 명의 드라이버가 배정되었지만, 두 드라이버 모두 경주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디자인과 속도에 따라서 여러 등급으로 구분된 차량에는 최소한 두 개의 좌석이 갖춰져야 했다. 엔진 용량이 큰 차량에는 네 개의 좌석이 필요했다. 모든 차량은 승객 한 명을 의미하는 60킬로그램의 밸러스트(ballast)[5]를 실어야 했고, 트랙 위에서 차량이 고장 나면 오직 드라이버가 차량에 실린 공구만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후자의 규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는 또 하나의 규칙으로는, 모든 차량이 전조등, 거울, 방향 지시등과 같은 도로 주행에 필요한 합법적인 요건을 완전히 충족해야 한다는 것과, 포뮬러 원(F1)에서처럼 레이스 우승만을 위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수량 이상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대회에 참가하는 팀들은 화재 보험에 가입해야 하며, 최근 ACO는 모든 차량과 참가팀들이 ‘레이스 정신’을 준수해야 한다는 기존의 조항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규칙을 엄격히 따르더라도 비신사적인 행위를 할 경우에는 항소할 권리도 없이 쫓겨날 수 있다.

기술적인 어려움과 날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첫 대회는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출발했다. 처음 몇 바퀴 만에 당시의 비좁은 타이어로 인해 경기장 트랙은 바퀴 자국이 깊게 파인 진창이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드라이버들은 안경 유리에 온통 진흙이 튀는 바람에 고글을 벗어던졌다. 차라리 눈을 깜빡여 물보라를 씻어내는 것이 더 쉬웠다.

 

4. 르망의 위대한 레이스


당시의 대회와 관련하여 인내와 용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유일한 영국 팀이었던 벤틀리 차량은 존 더프(John Duff)와 프랭크 클레멘트(Frank Clement)가 운전하여 개별적으로 참가했는데, 헤드라이트 하나는 돌멩이에 맞아 깨졌고, 또 다른 돌멩이는 연료 탱크에 구멍을 냈다. 클레멘트는 차량을 세운 다음 피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료와 구멍을 막을 코르크를 집어 들고는 경찰관에게 자전거를 빌려 다시 고장 난 차량으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벤틀리는 5위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나중에 르네 마리(René Marie)의 부가티 차량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너무 거세게 내리는 비는 차량 헤드라이트의 원시적인 방수 기능을 뚫고 들어오기도 했다. 참가 차량들의 전조등이 하나둘씩 고장 나면서, 아직 헤드라이트가 작동하는 자동차의 뒤로 어두운 차량들이 길게 늘어선 채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길을 찾는 행렬에 형성되었다. 슈나르(Chenard) 팀의 드라이버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사용하라며 지급된 휴대용 아세틸렌 전조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곤자케 레큐럴(Gonzaque Lécureul)의 엑셀시오르(Excelsior) 차량은 어둠 속에서 미끄러져 이탈했다. 배수로에서 차량을 꺼내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날씨가 너무 나쁘고 기온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하트퍼드(Hartford) 완충 장치를 만드는 제조사는 대회장에 휴게 호텔(respite hotel)을 설치해서 고된 임무를 마친 드라이버들에게 양파 수프와 레드와인을 제공했다.
 
벤틀리 차량이 늦어졌다는 것은 앙드레 라가슈(André Lagache)와 르네 레오나르(René Leonard)가 운전하는 슈나르&왈케르(Chenard et Walcker) 차량, 역시나 동일한 차량을 운전하는 라울 바슈만(Raoul Bachmann)과 크리스티앙 도베르뉴(Christian Dauvergne), 그리고 레이몽 드 토르나코(Raymond de Tornaco)와 폴 그로(Paul Gros)가 운전하는 비뇨(Bignan)와 필립 드 마른(Philippe de Marne)과 장 마르탕(Jean Martin)이 운전하는 비뇨가 ‘승리’를 위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주최 측의 바람대로 가장 성능이 좋은 차량에게 승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결승선을 처음으로 넘은 것은 라가슈와 레오나르였으며, 그들은 시속 92킬로미터의 평균 속도로 128바퀴를 돌았다. 참고로 2022년 레이스의 우승자는 세바스티앙 부에미(Sebastien Buemi), 브렌든 하틀리(Brendon Hartley), 히라카와 료(平川亮)로 이루어진 팀이었는데, 이들은 도요타 차량을 타고 시속 219미터로 380바퀴를 돌았다.

물론 1923년에는 공식적으로 우승자가 없었지만, 현대 기록에서는 라가슈와 레오나르를 초대 우승자로 간주하고 있다. 1928년이 되자 ACO는 대중들이 성능 지수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24시간 동안 가장 멀리까지 이동한 차량에게 ‘연계 거리 컵(Annual Distance Cup)’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로 치면 이것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벤틀리 스피드 8 ©Adobe Stock
더욱 위대한 레이스들이 그 뒤를 이었다. 최초의 영국인 우승팀은 월터 오언 벤틀리(Walter Owen Bentley)가 설립한 벤틀리였다. 그는 르망의 첫 대회에 출전하고는 영국의 자동차가 이 대회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붙인 벤틀리 보이스(Bentley Boys)가 운전하는 차량이 1927년부터 1930년까지 4년 연속으로 이 대회에서 우승했던 것이다. 벤틀리 보이스는 부유하고 사교육을 받은 영국인들로 구성된 그룹을 일컫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저녁이 되면 의상을 연회복으로 갈아입고 레이스를 지속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인들의 이 대회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국 차량의 성공은 1950년대 재규어가 벤틀리의 패권을 재현하면서 이어갔다. 재규어는 1988년과 1990년에 두 차례 더 우승했다. 그러는 사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는 최대 7000cc 용량의 엔진을 장착하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는 페라리, 포드, 포르쉐가 최고를 다투는 황금 시대가 찾아왔다. 이 시대에는 사상 최고의 레이스가 탄생했다. 그중에서도 1969년 대회의 마지막 세 시간 동안에는 포드 GT40에 탑승한 벨기에의 재키 이크스(Jacky Ickx)와 포르쉐 908에 올라탄 독일의 한스 헤르만(Hans Herrmann)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서 다투었다. 결국 이크스가 간발의 차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르망 대회 피니시(finish) 역사상 비할 데 없는 가장 근소한 차이의 승리였다. 이 대회를 여섯 차례 우승한 이크스는 ‘미스터 르망(Mr. Le Mans)’라고 불리곤 한다. 그는 당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되돌아보면 그 대회가 저의 가장 위대한 경주였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그저 끝났다는 느낌밖에 없었지만 말이죠. 르망은 이런 겁니다. 어떤 드라이버는 좋아하고 어떤 드라이버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승리른 다른 곳에서와 비교할 수 없는 위업입니다.”

포뮬러 원(F1)과 다르게 르망에서는 여성들도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1947년부터 1971년까지는 ‘너무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서 여성 참가가 금지되었지만 말이다. 오데트 시코(Odette Siko)는 1930년에 르망에 처음 출전하여 1932년 남성 드라이버인 루이 샤라벨(Louis Charavel)과 함께 알파-로메오 차량을 타고 2000cc 등급 우승을 차지했다. 그 이후로는 여성들로만 구성된 팀이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등급 우승을 거두었다.

최근에는 일본의 우수한 자동차 브랜드인 도요타가 지난 다섯 번의 레이스에서 우승하면서 이 대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도요타는 우승하지 못한 레이스에서도 잘 기억되고 있다. 2016년 대회에서 선두를 달리며 우승이 확실시되던 나카지마 카즈키(中嶋一貴)의 도요타는 마지막 바퀴에서 차량이 멈춰 섰다. 그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마크 리브(Marc Lieb), 로맹 뒤마(Romain Dumas), 닐 야니(Neel Jani)의 포르쉐 팀이 결국 승리를 가져갔다.

하지만 이토록 놀라운 레이스조차도 1953년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는 빛이 바랠 것이다. 본격 경주가 시작되기 전날의 연습 레이싱에서 토니 롤트(Tony Rolt)와 던컨 해밀턴(Duncan Hamilton)의 재규어 차량이 규정 위반으로 실격 처리된 것이다. 그들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팀의 감독이었던 로프티 잉글랜드(Lofty Engsland)는 ACO에게 그 모든 것이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며 해명했고, 결국 그들은 대회에 다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 감독은 부랴부랴 드라이버들을 찾아 나섰는데, 그들은 고주망태가 되어 술집 밖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동전을 던져 누가 가장 숙취가 덜한지 결정했고, 잽싸게 브랜디 한 잔을 꺾어 마신 뒤에(오늘날에는 허용되지 않는 행위이다), 레이스를 시작했다. 24시간 후 그들은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작가이자 르망 대회의 역사라인 고(故) 브라이언 레이번(Brian Laban)은 이렇게 적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르망에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분위기, 미묘함, 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결과의 불확실성이 있다. 모두가 우승하고 싶어 하는 대회이지만 그것을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레이스다.”

르망에서 역대 최다 아홉 번을 우승한 덴마크의 톰 크리스텐센(Tom Kristensen)은 비록 오늘날의 드라이버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보호를 받고 있지만 야간 레이싱에 내재된 위험은 결코 누그러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야간 레이싱에서 드라이버들은 자신보다 느린 차량을 지속적으로 추월해야 한다. “그것과 비슷한 상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둠 속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눈을 깜짝이고, 차량이 느리다는 것을 의미하는 파란색 깃발을 자세히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바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반복해야 합니다. 복싱 경기를 뛰면서 동시에 수학 시험에 집중하는 것과 같죠.”

1970년까지는 출발선에 서 있던 드라이버들이 트랙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차량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러나 드라이버들이 빠르게 출발하려다 보니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너무 위험해지면서 이 방식은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는 부정행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1955년 대회를 우승한 마이크 호손(Mike Hawthorn)은 출발 신호 깃발이 내려가기도 전에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스는 정각에 시작되어야 했기 때문에 누구도 다시 출발하지 않았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스털링 모스(Stirling Moss)는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기꾼 자식아”라고 외쳤다. 어느 해에는 호손이 너무 많이 웃다가 가장 늦게 출발하기도 했다.

 

5. 세계인의 축제 르망

2022년 6월 10~11일 개최된 제99회 르망 24시간 레이스 ©Adobe Stock

오늘날 르망은 자동차 성능을 증명하기보다는 종합 우승에 더 큰 의미를 두지만, 성능과 성적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르망 최초 주최자들이 의도한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동차 회사들은 르망 우승이 가져다주는 명성을 충분히 알고 있다. 팬들이 레이스에서 우승할 도로 주행용 스포츠 프로토타입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애스턴 마틴, 포르쉐, 페라리가 도로 주행용 버전 차량으로 더 느린 클래스에 출전하는 이유는 트랙 밖에서의 상업적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르망은 현재 25만 명의 팬들을 끌어 모으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는데, 그중 5분의 1은 영국인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동차 경주는 보지도 않은 채 그저 캠핑장과 유흥 시설에서 식사하고,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하면서 시작을 보낸다. 《르망 24시간 레이스(The Le Mans 24-Hours Race)》의 저자인 마이크 코튼(Mike Cotton)은 이렇게 말한다. “관중들에게 르망은 흥분과 열정의 대회만이 아니라, 관광과 캠프파이어를 줄기고 피로와 추위를 겪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 역시 이 대회가 제공하는 하나의 경험이다.”

한 국가의 박람회에 가까운 행사로 시작된 것이 이제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 그런데 과거에 관심을 가진 현대의 관중들도 미국 인디애나폴리스나 프랑스 사르트 지역의 아르나지(Arnage) 구석에 있는 트랙 구간으로 나가면 초창기 대회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장 비슷하게 느낄 수 있다. 현대식 기계 장치들이 지나가는 걸 무시하고 나무 밑에 앉아서 기다리다 보면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간간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1923년에 그랬던 것처럼, 이 대회가 드라이버와 자동차에게 도전을 거는 아주 특별한 경주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재키 이크스와의 세 차례 승리를 포함하여 통산 다섯 번의 우승을 차지한 영국의 데릭 벨(Derek Bell)은 이렇게 말한다. “연중 내내 레이스를 할 수도 있고, 모든 시즌에 승리할 수도 있지만, 일단 르망에 나가면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이건 간에, 오직 그것만이 신경 쓰입니다.” 맷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포드 V 페라리〉의 실제 주인공인 고(故) 켄 마일스(Ken Miles)는 좀 더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닦아낼 수 없는 신발에 묻은 똥 같은 거죠.”

오는 6월 10일 토요일 오후 4시, 자동차들이 부르릉거리면서 워밍업을 위한 첫 바퀴의 마지막 코너를 잽싸게 돌고 나면, 초록색 불이 커지면서 거친 굉음을 내는 기계 장치들이 관중들의 수다를 뒤로 한 채 첫 번째 코너로 질주하며 사라질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초대 우승자인 라가슈나 레오나르에게도, 이 대회의 선지적인 설립자였던 파루, 듀랑, 코퀼에게도 집중되지 않을 것이다.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24시간이 지난 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열렬한 팬들은 물론이고 평범한 관중들에게도 한 세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이 자동차 경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는지 돌이켜 볼 시간이 있을 것이다.
[1]
결승선에서 레이스를 종료한 차량을 향해 흔드는 흑백의 체크무늬 깃발
[2]
6시간에서 24시간 동안 일반적으로 10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자동차의 내구성과 성능을 시험하는 장거리 레이스
[3]
속도 제한 구조물
[4]
차량 정비 구역
[5]
중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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