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르망 레이스는 전통적으로 하지(夏至)에 가장 가까운 토요일 오후 4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오후 4시에 마무리된다. 이 대회가 인듀어런스 레이스라고 불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양한 속도의 차량과 다양한 실력을 가진 드라이버들이 밤새 달리면서, 직선 주로인 뮬산 스트레이트(Mulsanne Straight) 구간에서는 최대 시속 300킬로미터까지 속도를 올린다. 드라이버는 헤드라이트로 전방에서 자신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차량을 가려내는데, 레이스를 하다 보면 그런 차량을 무서울 정도로 자주 마주하게 된다. 지나가는 길을 잘못 선택하면 참사가 뒤따르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지만, 지난 세기 동안 르망 대회에서는 100명 이상의 목숨이 희생되기도 했다. 1955년 피에르 레베(Pierre Levegh)가 운전하는 메르세데스 차량이 공중으로 치솟아 군중을 덮치면서 희생된 83명의 관중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건은 모터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만약 1923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드라이버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빗줄기와도 싸워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면 저는 지구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회를 5회 우승한 프랭크 비엘라(Frank Biela)는 이렇게 말한다. 비가 오든 건조하든, 모든 차량은 45분마다 멈춰 연료를 채워야 하고, 때로는 타이어와 드라이버를 교체해야 한다. 기어를 2만 5000번 변속하고 레이스 코스의 5분의 4를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차량을 정비해야 한다. 레이스가 절반 정도 진행된 새벽녘이 되면 이미 피곤에 지친 드라이버들은 동료들과 교대로 휴식하며 쪽잠을 잔다.
오늘날에는 세 명으로 드라이버가 교대로 출전하는 로스터(roster) 체제를 갖추었지만, 규정이 변경된 1953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떤 팀들은 24시간 내내 단 한 명의 운전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단 한 명, 요크셔 출신의 에드워드 램스턴 홀(Edward Ramsden Hall)만이 여기에 성공했다. 1950년에 그는 자신의 낡은 벤틀리 차량을 끌고 어렵사리 8위에 올랐다. 기자 데니스 젠킨슨(Denis Jenkinson)은 “(생리 현상은) 어떻게 해결했나?”라고 묻자, 홀은 이렇게 대답했다. “녹색 멜빵바지 덕분이죠. 녹색 멜빵바지요.” 마지막으로 1인 완주를 시도한 드라이버는 피에르 레베로, 끔찍한 사고를 겪기 3년 전이었다. 그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불과 50분을 남기고 선두를 달리고 있던 그가 피로에 지친 나머지 기어 변속을 놓치면서, 탤벗 차량의 크랭크축이 부러지고 말았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르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가 되었을 것이다.
3. 르망의 시작, 성능 경쟁
물론 모든 전설에는 시작이 있다. 르망의 전설은 프랑스의 서부자동차클럽(ACO)이 가장 내구성이 좋은 차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계 1·2차 대전을 거치며 번창한 자동차 산업의 경쟁사들은 각자의 차량에 대하여 오랫동안 과장된 주장을 해왔다. ACO는 증거를 원했다. 세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그들은 바로 자동차 기자인 샤를 파루(Charles Faroux), ACO의 사무처장인 조르주 듀랑(Georges Durand), 그리고 대회에서 수여되었던 러지-위트워스 트로피(Rudge-Whitworth Trophy)를 기중한 에밀 코퀄(Emiule Coquille)이다.
원래는 승자를 선언하는 대회가 아니었다. 이 ‘레이스’는 단순히 내구성과 신뢰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지-위트워스 트로피는 3년제(triennial) 방식이었는데, 3년 연속 행사에 출전하여 수명과 내구성을 입증한 차량에게만 수여되는 것이었다. 이 복잡한 과정은 나중에 역시나 난해한 방식으로 대체되었는데, 레이스의 순위가 아니라 ‘성능 지수(Index of Performance)’가 결과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대중과 언론은 이 대회의 소식을 접하자 ACO의 고상한 목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결승선을 누가 가장 먼저 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성능 지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923년 5월 26일 처음 출발한 33명은 성능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18개 자동차 회사들을 대표해서 출전했는데, 세 곳을 제외한 모두가 프랑스 회사였으며, 그들 모두 자신의 자동차가 가장 튼튼하다는 것이 입증되기를 바랐다. 코스는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17.4킬로미터 길이의 비포장 도로였다. 현재도 남아 있는 6킬로미터의 뮬산 스트레이트는 오리지널 트랙의 일부였다. 전성기에는 코스의 최고 속도가 400킬로미터를 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한밤중에 드라이버들의 경각심을 유지시키기 위한 시케인(chicane)
[3]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뮬산 스트레이트에서는 기어 변속이나 제동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곳을 달리던 운전자들이 그 사이 몇 분 동안 휴식을 취하며 곯아떨어지곤 했던 것이다.
현재 서킷의 대부분은 연중 51주 동안 공공 도로로 사용된다. 일반적인 운전자들에게 뮬산 스트레이트는 투르(Tours)로 향하는 RD338 도로로 알려져 있다. 페인트를 칠한 도로의 경계석이나 가드레일을 제외하고는 매년 6월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1923년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다. 1925년까지는 트랙에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았기 때문에, 드라이버들은 앞차로 인해 튀어 오른 자갈을 맞기도 했었다. 피트(pit)
[4]는 급하게 텐트로 설치되어서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ACO 회원들은 천막이 덮인 곳에서 50마리의 닭고기와 450병의 샴페인으로 식사를 하고 칵테일 바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여흥을 돋우는 동안, 지붕 없는 스포츠 투어 차량에 탑승한 채로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는 드라이버들은 바람과 우박에 맞서 싸워야 했다.
당시의 규칙은 복잡했다. 각 차량에는 두 명의 드라이버가 배정되었지만, 두 드라이버 모두 경주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디자인과 속도에 따라서 여러 등급으로 구분된 차량에는 최소한 두 개의 좌석이 갖춰져야 했다. 엔진 용량이 큰 차량에는 네 개의 좌석이 필요했다. 모든 차량은 승객 한 명을 의미하는 60킬로그램의 밸러스트(ballast)
[5]를 실어야 했고, 트랙 위에서 차량이 고장 나면 오직 드라이버가 차량에 실린 공구만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후자의 규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는 또 하나의 규칙으로는, 모든 차량이 전조등, 거울, 방향 지시등과 같은 도로 주행에 필요한 합법적인 요건을 완전히 충족해야 한다는 것과, 포뮬러 원(F1)에서처럼 레이스 우승만을 위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수량 이상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대회에 참가하는 팀들은 화재 보험에 가입해야 하며, 최근 ACO는 모든 차량과 참가팀들이 ‘레이스 정신’을 준수해야 한다는 기존의 조항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규칙을 엄격히 따르더라도 비신사적인 행위를 할 경우에는 항소할 권리도 없이 쫓겨날 수 있다.
기술적인 어려움과 날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첫 대회는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출발했다. 처음 몇 바퀴 만에 당시의 비좁은 타이어로 인해 경기장 트랙은 바퀴 자국이 깊게 파인 진창이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드라이버들은 안경 유리에 온통 진흙이 튀는 바람에 고글을 벗어던졌다. 차라리 눈을 깜빡여 물보라를 씻어내는 것이 더 쉬웠다.
4. 르망의 위대한 레이스
당시의 대회와 관련하여 인내와 용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유일한 영국 팀이었던 벤틀리 차량은 존 더프(John Duff)와 프랭크 클레멘트(Frank Clement)가 운전하여 개별적으로 참가했는데, 헤드라이트 하나는 돌멩이에 맞아 깨졌고, 또 다른 돌멩이는 연료 탱크에 구멍을 냈다. 클레멘트는 차량을 세운 다음 피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료와 구멍을 막을 코르크를 집어 들고는 경찰관에게 자전거를 빌려 다시 고장 난 차량으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벤틀리는 5위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나중에 르네 마리(René Marie)의 부가티 차량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너무 거세게 내리는 비는 차량 헤드라이트의 원시적인 방수 기능을 뚫고 들어오기도 했다. 참가 차량들의 전조등이 하나둘씩 고장 나면서, 아직 헤드라이트가 작동하는 자동차의 뒤로 어두운 차량들이 길게 늘어선 채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길을 찾는 행렬에 형성되었다. 슈나르(Chenard) 팀의 드라이버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사용하라며 지급된 휴대용 아세틸렌 전조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곤자케 레큐럴(Gonzaque Lécureul)의 엑셀시오르(Excelsior) 차량은 어둠 속에서 미끄러져 이탈했다. 배수로에서 차량을 꺼내는 데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날씨가 너무 나쁘고 기온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하트퍼드(Hartford) 완충 장치를 만드는 제조사는 대회장에 휴게 호텔(respite hotel)을 설치해서 고된 임무를 마친 드라이버들에게 양파 수프와 레드와인을 제공했다.
벤틀리 차량이 늦어졌다는 것은 앙드레 라가슈(André Lagache)와 르네 레오나르(René Leonard)가 운전하는 슈나르&왈케르(Chenard et Walcker) 차량, 역시나 동일한 차량을 운전하는 라울 바슈만(Raoul Bachmann)과 크리스티앙 도베르뉴(Christian Dauvergne), 그리고 레이몽 드 토르나코(Raymond de Tornaco)와 폴 그로(Paul Gros)가 운전하는 비뇨(Bignan)와 필립 드 마른(Philippe de Marne)과 장 마르탕(Jean Martin)이 운전하는 비뇨가 ‘승리’를 위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주최 측의 바람대로 가장 성능이 좋은 차량에게 승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결승선을 처음으로 넘은 것은 라가슈와 레오나르였으며, 그들은 시속 92킬로미터의 평균 속도로 128바퀴를 돌았다. 참고로 2022년 레이스의 우승자는 세바스티앙 부에미(Sebastien Buemi), 브렌든 하틀리(Brendon Hartley), 히라카와 료(平川亮)로 이루어진 팀이었는데, 이들은 도요타 차량을 타고 시속 219미터로 380바퀴를 돌았다.
물론 1923년에는 공식적으로 우승자가 없었지만, 현대 기록에서는 라가슈와 레오나르를 초대 우승자로 간주하고 있다. 1928년이 되자 ACO는 대중들이 성능 지수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24시간 동안 가장 멀리까지 이동한 차량에게 ‘연계 거리 컵(Annual Distance Cup)’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로 치면 이것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