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 라인홀트 메스너
완결

산 사람, 라인홀트 메스너

무모하고 눈부신 산악계의 거장 라인홀트 메스너의 기네스 기록이 박탈당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진실일까, 도전 정신일까? 

ⓒTanya Pro

1. 동생도, 기네스 기록도 잃은 에베레스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는 해질 무렵 동생 귄터(Günther)와 함께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1] 정상에 도달했다. 희열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하산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었다.

해발 8126미터, 파키스탄에 있는 장엄한 루팔사면(Rupal Face)[2] 꼭대기였다. 보충할 산소도 없었던 24세의 귄터는 어둠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희박한 공기 속에서 환각에 빠졌다. 정상 근처에서 매서운 추위를 맞으며 감행한 밤샘 노숙으로 인해 그의 상태는 악화됐다. 이에 라인홀트는 판단해야만 했다. 덜 가파르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지나간 적 없는 서쪽의 디아미르사면(Diamir Face)으로 하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말이다. 귄터는 미로처럼 얽힌 위태로운 얼음 덩어리를 고통스럽게 천천히 헤쳐 나갔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다음 날, 라인홀트가 빙하를 따라 조심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귄터는 눈사태에 휩쓸려 눈과 얼음에 파묻힌 것으로 보였다. 이틀 동안의 필사적이며 정신 없는 수색 끝에 라인홀트는 현지 농부들에 의해 구조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상으로 인해 일곱 개의 발가락을 잃었다. 그리고 그와 별도로 어마어마한 비난에 직면했다.

메스너의 동료 탐험대원들은 그에게 몰려들어 비난했다. 그들은 메스너가 동생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고 아무도 지나간 적 없는 디아미르사면을 가로지르겠다는 야심을 살성하기 위해 귄터를 정상에 버렸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귄터는 혼자 익숙한 루팔사면으로 하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엇갈리는 진술과 법정 소송, 폭풍 같은 언론 보도가 뒤따랐고 메스너는 우울과 절망의 늪에 빠졌다. 그 해는 1970년이었다.
메스너의 동생 귄터(Gunther)가 사망한 파키스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의 풍경 © Saad Naeem
그는 귄터의 사체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낭가파르바트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디아미르사면 아래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2005년, 그 빙하에서 마침내 동생의 유해가 드러난 것이다. 가죽 부츠를 신은 하지 하나와 머리가 없는 부패된 몸통이었다. 이로써 메스너에게 냉소적이었던 대부분의 사람은 입을 다물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동생의 죽음은 메스너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거대한 암벽들(The Big Walls)》[3]에 이렇게 썼다. “이 탐험 코스에서 나는 죽었다. (...) 나의 신체가 아니라 나의 영혼, 나의 의지, 그리고 나의 모든 희망이 죽었다. 나는 홀로 집에 돌아왔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2023년 9월의 마지막 주, 메스너는 또 다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기네스 세계 기록의 심사위원들이 독일 에버하르트 유르갈스키(Eberhard Jurgalski)의 새로운 연구를 채택하여 1985년, 메스너가 안나푸르나 제1봉(Annapurna I)의 “진짜 정상”에 몇 미터 미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이는 사실상 그에게서 두 개의 기네스 기록을 박탈한 셈이다. 하나는 8000미터 이상의 14좌를 모두 완등한 최초의 사람이란 기록이며, 또 하나는 산소통 없이 그 모든 걸 해냈다는 기록이었다. 두 기록 모두 그의 산악 경력과 지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업적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안나푸르나의 복잡한 정상 능성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을 눈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유르갈스키 연구진은 현대 기술을 이용해 정확한 ‘지리학적 진실’을 추구했지만, 그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 연구를 기계적인 객관성에 기반을 둔 탁상머리 학자들의 ‘흠집 내기’ 행위로 여겼다. 등반 역사서에 등재된 특정한 등반과 기록들 옆에 별표(*)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소식은 정확한 지점에 도달하는 게 정말로 중요한 문제인가, 등반 기록의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메스너는 기록에 대해서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연구의 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올해 79세인 그는 논란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평생을 스캔들과 세간의 화제들을 잠재워 왔다. 

 

2. 메스너의 생애

2002년의 라인홀트 메스너 ©GianAngelo Pistoia
메스너는 1944년 이탈리아 북부의 자치도인 사우스티롤(South Tyrol)에서 태어났는데, 참고로 이곳은 1919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일부였다. 그는 돌로미티(Dolomite) 산맥에서 여덟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 그의 엄마 마리아(Maria)는 ‘헌신적인’ 여자 가장으로, 아버지가 비운 집안의 공백을 메웠다. 교사였던 아버지 요제프 메스너(Josef Messner)는 나치의 동조자로, 독일군에 입대하여 히틀러의 동부 전선에서 (소비에트연방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에 투입됐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자주 집을 비웠고, 폭력적으로 굴었다. 메스너는 《벌거벗은 산(The Naked Mountain)》이라는 회고록에서 언젠가 개 사육장의 지저분한 무더기 속에 있는 귄터를 발견했다고 썼다. 아버지가 동생을 채찍으로 때린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조금 좋을 때면 요제프는 아들들ㅇ레게 산이 주는 자유로움을 소개해 주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발판 삼아 메스너는 산악 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첨탑처럼 높이 솟은 돌로미티의 압벽들을 정복했다. 후에 그는 이 시기에 익힌 기술을 유럽의 서알프스(Western Alps)에서 눈과 얼음으로 덮인 루트를 개척하는 데 이용했다. 최소한의 장비만을 사용해서 빠르고 효율적인 등반을 한 것이다. 그런 다음 메스너는 가벼운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을 적용해서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산소통과 고정 로프, 대형 캠프와 지원팀을 버린 방식을 말한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후에 오랫동안 고수되었던 민족주의적 탐험 방식인 ‘포위 스타일(siege style)’을 거부했다. 그리고 또한 낭가파르바트에 함께 올랐던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팀원들과 그의 아버지가 지지한 정치적 견해를 멀리했다. 대신 메스너는 선대의 개척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산악 철학을 주조하는 데 몰두했다.

1971년에 그는 《불가능의 살해(The Murder of the Impossible)》라는 제목의 신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볼트(bolt)와 펙(peg)을 이용해 등반의 난이도를 낮추고 암벽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능성”으로 왜곡시키는 현대 등반가들을 격하게 질타했다. 그는 이렇게 성토했다. “등반이라는 순수한 샘물을 오염시킨 것은 누구인가?”

결코 타협하지 않는 메스너의 이러한 방식이 때로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동생이 묻혀 있는 낭가파르바트에 다시 돌아갔던 1973년, 그는 ‘알파인 스타일’을 시도했지만 결국 6500미터 지점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나는 완전히 길을 잃고 외로웠던 나머지 결국 뒤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벌거벗은 산》에 쓴 내용이다. “그 정도의 환경에 나 혼자 노출되는 것을 견뎌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명확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1978년에 메스너는 오스트리아의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와 함께 의료진을 동반하지 않고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를 처음 등정했다. 그런데 그들이 10년 넘게 로프를 사용하며 알프스와 남아메리카에서 다수의 탐험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벨러가 산악 탐험에 대해 쓴 《고독한 승리(The Lonely Victory)》라는 책을 출간한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극적으로 멀어졌다. 하벨러는 메스너가 등반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력을 과장하여 말하며, 그들이 함께 이룬 성공이라는 주장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메스너는 이런 비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메스너의 확고한 개인주의는 결국 보상을 받았다. 같은 해, 그는 낭가파르바트의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디아미르사면의 새로운 등정 루트와 하산 루트를 통해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곳은 귄터와 함께 고통스럽게 하산했던 곳이며, 결국 동생의 사체가 발견된 지점 아래였다. 8000미터급 봉우리에 대한 최초의 단독 등정이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업적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듯, 메스너는 등반 도중 발생한 지진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가 개척한 루트를 다시 성공한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1980년, 그는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 산을 단독 등반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미국의 전문 산악인 콘래드 앵커(Conrad Anker)는 이 업적이 “다른 모든 것들이 무색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할 만한 것이라며 “달 착륙”에 비유했다. 메스너는 등반 첫날 크레바스에 빠졌고, 그곳을 탈출하려 시도하면서 녹초가 됐다. 그래서 거의 단념할 뻔 했지만 결연하게 일부 새로운 루트를 거치며 사흘 동안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그것도 위험천만한 몬순(monsoon) 시즌에 말이다.

대담한 단독 등정에 대해 메스너는 엄청난 강박이 있었다. 이는 점점 더 만성적인 외로움의 증상이 되어 갔는데, 이는 1977년 첫 이혼 이후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에베레스트를 단독으로 등정한 후 펴낸 《수정처럼 투명한 지평선(The Crystal Horizon)》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바보였다. 사랑과 애정에 대한 갈망으로 차가운 산에 오르는 바보였다.”

메스너의 산악인 선배들은 전인미답의 정상에 오르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는 아무도 정복하지 않은 사면을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루트로 오르는 걸 통해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았다. 산소 없이, 때로는 단독으로 말이다. 1986년에 그는 8000미터 이상의 14좌를 모두 정복한 최초의 사람이 됐다. 그리고 산소 없이 그것을 이뤄낸 최초의 존재가 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등정한 8000미터 이상의 정상은 8526미터의 로체(Lhotse)였다.

 

3. 아이에게는 전설이 필요 없다


1986년, 42세가 된 메스너는 더 이상 가장 높은 산에 오르고 싶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다양하고 수많은 관심사에 손을 댔다. 예를 들면 소 기르기, 야크 목축, 설인 사냥(성공하지 못했고 대신에 그에 대해 글을 썼다), 5년간의 정치 활동(그는 이탈리아 녹색당 소속으로 유럽의회의원(MEP)을 지냈다), 사막 횡단(그는 단독으로 고비 사막을 횡단했다), 빙하 횡단(그린란드와 남극을 가로지금으로써 그곳들을 두 발로 횡단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에베레스트에서 맞이한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의 죽음에 대한 연구(또 다른 책의 주제였다), 그리고 돌로미티 일대에 여섯 개의 산악 유산 박물관을 설립했다. 현재 79세로 사우스티롤에 위치한 두 개의 성 사이에 살고 있는 메스너는 지역에 있는 산들을 두 발로 오르며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등반 업적을 회상하다 보면, 메스너 개인의 인생에 많은 우여곡절이 널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세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다. 그는 낭가파르바트 탐험대원 가운데 한 명의 아내와 외도를 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그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들 가운데 현재 33세의  지몬 메스너(Simon Messner)는 산악인이 되었고, 돌로미티를 비롯하여 파키스탄에 있는 6000미터 이상 봉우리들에 오르면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지몬은 지난해 이탈리아의 한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메스너가 아버지로서는 “엄격”했으며 “부재 중”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말했다. “아버지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싶을 때면, 저는 빌트(Bild) 신문을 읽어야 했습니다. 그는 늘 움직여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대리석처럼 단단했고, 그는 매우 변덕스러웠습니다. 전설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화로 여기지만, 아이에게는 전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는 아빠가 필요하지만, 그는 결코 아빠인 적이 없었습니다.”

지몬은 자신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서 산악인이 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그는 17살에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저는 그와 함께 등산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를 모험에 데려간 적도 없습니다.” 그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함께 메스너산악영화(Messner Mountain Movie)라는 제작사를 만들었고, 그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의하면 지몬 역시 스스로를 “전통적 알피니스트(alpinist)[4]”라고 설명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고안해서 자주 인용하는 표현이다.

2021년, 메스너는 36살 연하인 룩셈부르크 출신의 다이앤 슈마허(Diane Schumacher)와 결혼했다. 지몬은 인정하지 못했다. “그녀의 나이가 제 누이의 나이와 같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라인홀트입니다. 마음에 뭔가를 품으면 그걸 하고야 마는 사람이죠.”
1985년, 파미르 고원에서의 라인할트 메스너 ©Jaan Künnap
이미 오랫동안 기자들이나 사진작가들, 그리고 그의 팬들도 (지몬의 생각과) 비슷하게 그가 알쏭달쏭하며 완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깊게 패인 미간과 산악인의 수염, 거친 머릿결을 가진 그의 음울한 표정과 성미 급한 그의 성품은 위협적으로 보였다. “메스너는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나에게는 필요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산소가 없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인 짐 헤링턴(Jim Herrington)이 클라이머스(The Climbers)에 실린 사진에 대해 쓴 글이다. 헤링턴은 이렇게 빈정거렸다. “라인홀트, 당신은 우리 모두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 비로소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생겼고, 우리는 마침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에베레스트의 북쪽 사면에 함께 있을 때보다 더 나아진 건 없다.”

메스너의 기질은 그의 등산 스타일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매력적이고 눈부시면서도, 동시에 오만하며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왔다. 수수께끼였다. 그는 이중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대규모의 히말라야 상업 원정대를 비판해 왔으면서도, 히말라야의 산악 관광을 지지하며 8000미터 이상의 빠른 등정 기록을 가능하게 만든 물류 체계를 칭송한다.

그는 수많은 정상에 오르고 기록을 수립함으로써 건강한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 이상 그런 정상이나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의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스티븐 베너블스(Stephen Venables)에 따르면, 메스너는 대체로 정상에 오르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한다는 목표를 추구하다보니 “우연히 그런 부차적인 성과들이 따라왔다”고 한다.

 

4. 쓸모없는 것의 정복자


산악 등정의 한 가운데에는 ‘여정’이라는 철학적 개념과 기록 수립, 돈벌이, 정상에 대한 집요한 강박 사이의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최근의 기네스 세계 기록 ‘논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서 찻잔 속의 태풍이 될 수도 있고, 거센 폭풍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산에 대해 기술적, 본질적으로 기준을 재정의할 경우, 이 새로운 기준은 한 산악인 또는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꿀 수 있는가?

2021년에 메스너는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안나푸르나 제1봉에 5미터 못 미치고 그 기다란 능선의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완전히 괜찮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다가와서 ‘당신이 했던 일은 전부 헛수고였지 않아?’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거냐고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반면 지난주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메스너가 보인 반응은 방어적이었으며, 8000미터 이상 봉우리들의 진짜 꼭대기가 어딘지를 재조사하는 연구를 이끈 유르갈스키를 비판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는 그 산을 그저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희는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그의 말이다. “저는 제 이름이 기네스북에 등재되느냐 마느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보유한 적도 없었던 기록을 저에게서 박탈할 수는 없습니다.” 메스너와 함께 안나푸르나 제1봉에 올랐던 이탈리아의 동료 한스 카멀란더(Hans Kammerlander)는 해당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연구를 두고 “탁상머리 이론가들의 흠집 내기”라고 불렀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산악인의 전형인 메스너가 “탁상머리 이론가”로부터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최고의 등반이란 단지 몇 미터의 거리로만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비전도 중요하며, 스타일도 중요하다. 그리고 여정 역시 중요하다.

“전통적인 알파인 등반에는 어떠한 기록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모든 알피니스트를 높이 평가합니다. 이 세계의 빅월(big wall)들을 경험하는 모든 알피니스트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저 역시 여전히 그런 쓸모없는 것의 정복자로 남아 있지만, 저는 제 삶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고 그래서 저는 오늘 제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메스너가 이번 주에 인스타그램에 쓴 글이다. “정상이 아니라 (거기에 가는) 경로가 목표입니다. 저의 알파인 등반은 기록을 모릅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예전에 《한계선의 내 인생(My Life at the Limit)》에서 설명했던 다음의 관점과는 다르다. “내가 어떤 목표를 확실히 한다면, 정상이 모든 것이다.” 그가 쓴 글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걸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다. 나는 그저 목표 지점을 향해 정신적으로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메스너는 정상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등반가였으며, 지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새로운 영역에서 무엇이 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탐험하는 것에 언제나 관심이 있었습니다.” 스티븐 베너블스의 말이다. 그리고 메스너의 등반이 보여주는 예술성과 “무분별한” 정상 정복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메스너가 여론의 법정보다는 높은 산맥과 희박한 공기의 황량한 공간에서 훨씬 더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는 서로 상반되는 수많은 생각들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그 남자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메스너는 종종 “인간과 산이 만나면 위대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언젠가 《인디펜던트》에도 그렇게 말했다. “그건 언젠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쓴 글입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위대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 Martin Jernberg

메스너는 아마도 블레이크 역시 소중한 남동생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그것이 인생에서 깊은 상처로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블레이크의 동생은 1787년에 죽었는데, 당시 귄터와 똑같은 나이였다. 더욱 확실한 것은 이 복잡한 남자가 산에서 위대한 것들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동생과 일곱 개의 발가락을 잃었으며, 그리고 아마도 한 개의 “진짜 꼭대기”를 놓쳤다 하더라도 말이다.

설령 그에게 한 번의 등반이 자격미달이라 하더라도, 다른 모든 등반에서는 기준 이상으로 해냈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커다란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5. 정상이 꼭대기가 아니라면?


마테호른처럼 뚜렷하고 뾰족한 정상을 가진 산은 거의 없다. 마나슬루(Manaslu)나 다울라기리(Dhaulagiri) 제1봉, 안나푸르나 제1봉처럼 어떤 산은 굽이치는 정상 능선을 갖고 있다. 그렇게 “튀어나온 지점(bump)들”의 상대적인 높이 차이는 산악인들이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 특히 피로하고 산소가 부족하며 시야가 좋지 않을 때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곳에 쌓인) 눈과 얼음의 높이도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비교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메스너를 비롯한 초기의 개척자들이 각자 역사적인 등정을 할 당시에, 그들은 GPS나 지도 분석 기술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신이 “꼭대기”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유르갈스키는 8000ers.com이라는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산악인이 아니라 섬세한 기록원이다. 유르갈스키의 연구진은 위성 사진, GPS 좌표, 사진, 동영상, 산악인들의 설명 등을 활용하여 각 산들의 “진짜 정상”이 어디이며 사람들이 그곳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파악하려 시도했다.

정상에 등정했다고 선언했지만 “진짜”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 대다수의 산악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실수를 했을 것이다. 고의로 정상에 오르지 않은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일부는 완료하지 못한 과제를 끝내려고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6. 겨우 몇 미터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것은 메스너에 대한 연구가 아닙니다.” 유르갈스키와 함께 조사를 진행한 산악인 데이미언 길데어(Damien Gildea)의 말이다. “우리의 연구는 산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정상들의 ‘진짜’ 속성에 주로 관심이 있으며, (메스너는 아니지만) 각자의 편의와 상업적인 명분을 이유로 마나슬루에서 수많은 속임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리학적인 진실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런 진실이 중요하다면 왜 중요한지를 조사하고자 했습니다.”

베너블스는 정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등정을 추구함에 있어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고, 또 하나는 어떤 모험을 구성하는 유의미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바라보는 것이다.

유르갈스키는 메스너가 안나푸르나 제1봉의 진짜 정상으로부터 65미터 떨어진 지점에 멈추었으며, 여기는 고도로 환산하면 5미터 아래였다고 결론 내렸다. 메스너는 그가 “정상”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베이스캠프가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르갈스키의 계산에 의하면, 진짜 정상에서는 그곳이 보이지 않았다. 기네스 세계 기록은 그의 연구를 인정했고, 이후에 두 개의 기록을 미국의 에드 비스터스(Ed Viesturs)에게 다시 부여했다. 당시에 기네스 세계 기록 측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결정이 지난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산악인들 가운데 일부가 이뤄낸 놀라운 선구적 업적들을 결코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지식이 향후에는 산악 부문 역사책의 정상 기록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테지만, 역사적 등정에까지 그렇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길 것이다.

비스터스는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진심으로 라인홀트 메스너가 8000미터 이상의 14좌에 모두 오른 최초의 사람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해낸 사람으로 여전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보충용 산소 없이 등정함으로써 방법 면에서만이 아니라 신체적이며 심리적인 면에서도 길을 이끌었습니다. (...) 산을 오르는 것은 개인적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록에 오르거나 기록을 수립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짐 헤링턴(Jim Herrington)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산악인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는데, 그의 작품은 이곳(https://www.instagram.com/jimherrington)에서 볼 수 있다.
[1]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으로 해발 고도는 8126미터이며 등반하기가 극도로 위험하여 킬러마운틴(Killer Mountai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
낭가파르바트의 남동쪽 사면
[3]
빅월(big wall)은 3000피트(약 900미터) 이상의 높은 암벽을 의미한다.
[4]
알파인 방식으로 등산하는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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