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가난한 국가’란 대체로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마땅히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 약자, 혹은 스스로 부와 성공을 일궈 나가지 못하는 나태하고 무능한 존재, 아니면 어떤 사악한 강대국의 ‘피해자’로 그려지곤 한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 은 그와는 다른 관점을 보여 준다. 국가들의 발전과 쇠퇴는 각국이 지구적 정치경제 질서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또 그것들이 어떠한 발전 경로를 따랐느냐에 의해 도출된 역사적 결과물이다. 국가의 역량은 경제와 정치, 사회, 문화 등에 걸친 다양한 요소의 상호 작용을 통해 구성되며, 국가 발전의 경로를 재설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요소를 다시 배치하고 결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은 지난 수십 년간의 빈국·개도국의 발전 전망을 지배해 온 “엄청난 낙관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시작한다. 갖가지 건강 관련 지표의 개선과 극빈층의 현저한 감소로 빛나던 세계 발전의 순항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갖가지 위기로 점철된 2020년대에 들어 발걸음을 멈췄다. 이는 그저 일시적인 비틀거림이 아니며, 지금까지의 세계 발전을 그려온 “승리의 서사”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정량적 지표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보다 “지리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치경제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핵심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빈국에서 부국으로의 국가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반복 가능한 유일한 전략은 고도의 산업화뿐이다. 둘째, 지난 수십 년간 제조업을 바탕으로 한 고도 산업화가 실현된 유일한 지역은 중국과 동아시아뿐이었으며, 다른 지역은 설령 소득 증가를 이뤘다고 해도 원자재 수출에 의존했을 뿐, 실질적으로 부국으로의 전환에 성공한 예가 없다. 즉 “동아시아의 산업화, 발전, 대규모 소득 증가가 거의 모든 다른 지역의 침체를 통계적으로 ‘보상’”했기에 정량 지표에서의 평균값만으로는 빈곤과 개발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저자들은 부국으로의 발전 과정에서 제조업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글이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황금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국가들, 즉 제조업 발달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로다. 한창 성장 궤도에 있던 개도국들은 원자재 가격의 하락과 함께 극심한 경기 침체를 맞이했고, 개중에는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 “충격 요법”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급작스러운 도입), 경제적 원시화, 그리고 내전 및 무력 충돌과 같은 파국적인 결과로 미끄러져 내려간 예도 적지 않았다. 특히 국가 발전주의의 상실은 치명적이었다. 국제기구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강요한 갖가지 “구조 조정”은 정부의 역량을 축소했으며, 그로 인해 국가들은 기초적인 기능조차 인도주의 단체와 원조 산업에 의존하게 되면서 자체적인 발전 역량을 축적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브라질과 같은 일부 국가들은 중국의 도약으로 인해 수요가 증대한 원자재의 수출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자재 수출형 경제 모델은 자체적인 산업 발전 역량의 확보로 이어지지 못했다. 다수의 저숙련 노동자를 흡수할 수 있는 제조업과 달리, 원자재 수출형 모델은 탈산업화·탈농업화와 맞닥트린 개도국의 고용 시장을 구원할 수 없었다. 슬럼화된 대도시는 저숙련 비정규직 서비스 노동자들로 가득 찼으며, 대규모 불완전 고용 상태는 다시 “금융화”와 맞물려 저소득층의 부채 비율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잉여 노동은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만성화된 실업 상태는 범죄·폭력 조직· 반군과 같이 정부의 통치 능력을 약화하는 집단으로 이어진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다른 국가로의 이주 역시 중요한 선택지로, 1980년대 이래 국제 이민자의 규모는 빠른 속도로 증가 중이다.
이와 같은 지구적 스케치를 바탕으로 저자들은 빈국의 발전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공했듯, 오늘날의 빈국들 또한 뒤늦게나마 산업화의 길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과거와 달리 지구적 경쟁은 심화했고, 성장 둔화·인구 구조 변화와 맞물려 (선진 사회의) 소비 수요는 감소했으며, 결정적으로 제조업의 고용 흡수율을 하락시키는 자동화가 본격화하고 있다. 둘째, 현재의 빈국들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유했던 높은 국가 역량을 결여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전통적 지배 세력인 지주층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국가는 폭력을 독점했고, 엘리트 집단은 국가와 기업 사이를 조율했으며,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도 풍부했다. 반면 신흥 개도국들은 고숙련 하이테크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위해 지금까지의 발전주의 정치 연합을 넘어서거나, 아니면 지대 추구에만 골몰하는 엘리트 계층, 혹은 애초에 국가적 발전에 무관심하거나 이를 추진할 유인이 없는 집단의 강고한 지배에 도전해야 하는 난제가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유, 무역, 민주화, ‘포용적 제도’ (…) 등, 지난 수십 년의 진부한 정통 교리”를 되풀이하는 대신 “새로운 발전주의”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패러다임의 핵심은 일종의 ‘근대 국가 재건설’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에서 세 번째 문단이 이를 집약하는데, 그에 따르면 기존의 비(非)발전적 지배층을 “발전 지향적인 엘리트로 구성된 새로운 동맹”으로 대체하고, 토지 개혁·농업 현대화를 통해 식량의 자급을 확보하며, 폭력은 다시금 국가의 독점물이 된다. 교통 인프라를 개선하며, 행정 역량을 제고하고, 대규모의 강건한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교육과 보건 체제를 구축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근대화 프로그램이 한편으로 서방에서 온 기존의 “개발 전문가”를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궁극적으로 저자들은 부국과 빈국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국제적 “엘리트 연합”이 다시 필요하며, 필요하다면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의 대대적인 재편성”도 시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조적 개혁”이 놀랄 만큼 발본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의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법에 머무른다면 무엇도 바뀔 수 없을 것이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 은 지난 수년간 미국의 정치경제적 담론이 변화하는 양상을 잘 드러내는 글이기도 하다. 분기점은 역시 트럼프 정권으로, 이는 북미의 지식인들이 자국과 국제 질서를 바라보는 관점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러스트 벨트”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의 몰락이 부각되고, 시진핑 집권 이래 중국의 도전적인 행보가 무시할 수 없게 되면서 오바마 정권까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스마트 경제”는 지속할 수 없다는 평가가 힘을 얻은 것이다. 네오콘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공화당에서는 ‘중국제조 2025’를 겨냥해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주도한 보고서를 비롯해 정부와 시장, 산업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정타는 2022년 바이든 정권의 등장이었다. “바이드노믹스”에 대한 반감과 별개로, 대규모 정부 지출이 정권의 입장이 되면서 친민주당 지식인들 또한 마찬가지의 노선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이제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미국 담론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 핵심에는 국가·정부의 역할이 있다. 과거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론에서도 국가의 역할이 강조됐으나, 이는 주로 정부가 시장을 보완·견제하는 복지 국가 담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새로운 담론은 정부를 국제적 정치경제 경쟁에서 자국의 생존 및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하는 전략적 행위자로 간주한다. 국가가 시장과 기업을 방관하느냐, 통제하느냐의 대립은 낡고 무용한 도식이다. 시장과 기업은 국가의 발전과 번영이라는 더 큰 범주의 세부 요소가 되며, 그것들의 효율적인 작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활동이 정부의 핵심적인 책무다. 이때 국가의 전략적 이해관계라는 차원에서 모든 산업·기업이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반도체와 에너지 전환 관련 산업 등의 첨단 제조업에는 특권적인 중요성이 부여된다. 특히 중국과의 경쟁을 강하게 의식하는 논자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무역 정책이 사실상 미국의 첨단 제조업 역량을 무너트렸다고 비판하며, 미국이 해당 산업의 인력과 기업을 자국의 영향권에 두고 나아가 직접 그러한 역량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산업을 진흥하고, 이를 위한 기반 시설을 설치하며, 인력과 자본, 자재의 공급망을 확보하고, 국내외 규제를 조정하는 등의 복잡하고 섬세한 과업은 가장 효율적인 정부 조직에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국가·정부의 능력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이는 단순히 인력·예산의 규모와 관련 부처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으로만 갈음할 수 없다. 환경의 ‘설계’는 그에 필요한 기획력과 지식을 전제한다. 반드시 전문적 의사 결정의 영역이 아니라 해도, 고급 인력의 인건비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의 역량을 어떤 식으로 제고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지구적 발전의 길고도 느린 죽음》 은 과거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강력히 비판하고,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에 주목하며, 무엇보다 국가 발전과 제조업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국가의 능력을 육성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상당 부분 위의 담론적 변화와 공명하고 있다. 이 글을 출발점으로 한국의 독자들이 북미의 담론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논의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한국의 과거와 미래를 지구적-역사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점차 익숙해지기를 기대해 본다.[1]
이우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