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떼, 생태학적 위기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가난한 국가가 처한 구조적 환경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혼란이 있기 전에도,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덜 행복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생태학적, 그리고 인구통계학적인 두 개의 역풍이 세계 발전의 전망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기후와 관련된 혼란이 가난한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그중에서도 특히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소말리아 반도)에 있었던 고난을 생각해 보라. 2010년대 후반, 인도양의 서쪽과 동쪽 수역 사이의 수면 온도가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현상인 ‘인도양 다이폴(Indian Ocean Dipole)’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2019년 상반기에는 1870년 이후 가장 강한 양성 국면(positive phase)
[1]에 접어들기도 했다.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는 우기와 홍수를 장기간 겪었다. 그 결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쪽 사막에 방대한 양의 물이 축적되면서 이집트 땅메뚜기(desert locust)의
거대한 번식지가 형성됐다. 이러한 번식지에서 거대한 메뚜기 떼가 발생해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남쪽의 동아프리카로, 그리고 북쪽의 남아시아로 퍼져나갔다. 메뚜기 떼가 엄청난 양의 작물을 먹어 치우면서 이들 모든 지역의 농업을 사정없이 파괴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예멘 등의 나라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이들 지역은 전쟁으로 인해 그 피해를 복구하기도 어려웠다. 수백만 헥타르의 땅에 메뚜기가 창궐했다. 케냐에서 발생한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메뚜기 떼는 900제곱마일 이상의 면적을 차지했는데, 이는 뉴욕시보다 약 세 배나 더 큰 규모다. 2021년과 2022년에 메뚜기의 위기가 잦아들자 동태평양의 라니냐(La Niña)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이 지역에 심각한 가뭄을 초래했다. 일부 지역은 수십 년 만에 가장 건조한 우기를 맞았다. 기근 경보가 발령됐고, 인도주의 단체들은 15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후 재난의 강도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뿔은 어느 해에는 지나치게 많은 비가 내리고 그다음 해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 않는 현상이 반복될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다른 가난한 지역들도 악화하는 생태학적 위기에 의해 비슷하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벵골만 연안, 서아프리카 해변, 또는 동남아시아 해역 등의 해안 지역들은 쉽게 물에 잠길 수 있다. 주로 저지대와 강변으로 이뤄진 방글라데시 영토의 상당 부분은 앞으로 수십 년 이내에 바스라, 방콕, 뭄바이와 같은 대도시의 주요 부분과 함께 물에 잠길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홍수가 더욱 빈번하고 극심해질 것이다. 2022년에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수백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던 심각한 홍수는 앞으로 다가올 일의 징후다. 또 다른 지역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열기에 직면할 것이다. 2022년 봄에 화씨 100도(섭씨 38도)가 넘는 날이 무려 78일이나 이어졌던 델리처럼, 수많은 지역은 사실상 인간이 거주하기에 부적합한 지역으로 바뀔 것이다. 인도의 극심한 폭염 횟수는 21세기 말이 되면 30배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간 수준의 온실가스 배출량 시나리오조차도 2100년에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의 대규모 지역이 어쩌면 매년 350일 이상의 치명적인 폭염을 마주할 것이라 예측한다. 사실상 인도와 나이지리아는 사실상 전역에서 100일이 넘는 끔찍한 폭염을 경험할 것이다.
[2]
이러한 생태학적 혼란은 가난한 세계의 상당 지역에 엄청나게 파괴적일 것이다. 점점 더 흔해지는 가뭄, 홍수, 흉작은 국가의 농업 체계를 위태롭게 하면서 탈농업화를 심화시키고 사회적 불안정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와 같은 일부 국가들은 거대하고,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인구를 먹여 살리는 일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며, 따라서 외국의 원조에 영구적으로 의존하게 될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생태학적 혼란이 기존의 폭력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가뭄과 토지의 침식은 이미 수단과 동아프리카에서 인종 갈등을 심화시켰다. 나이지리아와 사헬에서는 농부와 목축업자들 사이의 갈등이 치명적인 양상으로 번지고 있으며, 이는 점차 더 부족해지는 토지와 수자원을 둘러싼 유목민과 정착 생활을 하는 농업인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비록 이곳의 정치적 중요성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서방에서는 자주 경시되곤 하지만 말이다. 2018년에는 이러한 농부와 목축업자들의 충돌로 인해 보코하람 반란 당시보다도 무려 여섯 배나 많은 나이지리아인이 죽었다.
저출생과 인구 폭발의 공존
세계 발전이 직면할 또 다른 중요한 역풍은 인구통계학적인 것으로, 부유한 나라 및 중진국의 인구 감소와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서의 인구 폭증이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다. 거의 모든 부유한 국가들이 낮은 사망률과 낮은 출산율의 평형 상태로 진입해 장년층의 인구가 지배적인 상황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들은 이미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대규모의 이주를 통해서 인구 감소를 막고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동일한 인구통계학적 전환이 훨씬 덜 개발된 국가들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통계학적 감소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에 “너무 일찍” 영향을 준 현상의 목록에 추가될 수 있다. 브라질의 출산율은 2004년에 인구 대체 수준(replacement level)
[3] 미만으로 떨어졌다. 레바논은 2005년, 콜롬비아는 2009년, 말레이시아는 2016년, 엘살바도르는 2018년, 튀르키예는 2020년에 그 미만으로 떨어졌다. 1970년대 초에 여성 1인당 출산율이 6.9명이었던 방글라데시는 2018년에 대체 수준 미만으로 떨어졌으며, 멕시코와 페루, 아르헨티나, 인도도 조만간 그 뒤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4]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전환의 결과는 충격적일 것이다. 2055년이 되면 브라질의 중위 연령(median age)은 현재 독일의 수준과 동등할 것으로 보이며, 태국은 현재의 일본 및 이탈리아보다 몇 년이나 연령이 높은 연금 수령자 사회가 될 것이다.
인구 고령화 및 저출생으로 인해, 이런 나라들의 상당수는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태국은 2020년대 말에 감소가 시작될 것이며, 브라질은 2040년대, 튀르키예와 인도네시아는 2050년대부터 시작될 것이다. 한편, 중국은 그토록 엄청난 인구가 오히려 그 쇠퇴에 놀라운 가속도를 더할 것이다. 중국의 인구는 2030년대 초에 감소하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21세기 중반 이후로는 급격한 위축을 경험할 것이다. 2070년대가 되면 10억 명 이하로 떨어질 중국의 인구는 그 이후로 감소세가 더욱 가속화돼서 2080년대가 되면 사망 수가 출생 수보다 1억 명이 더 많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이러한 인구통계학적 감소가 덜 두드러지는 곳은 개발이 가장 덜 된 지역이기도 하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사망률이 상당히 감소했고 출생률은 미미한 수준으로 감소했다. 아프리카의 사망률은 아직 매우 높긴 하지만,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예를 들어서, 시에라리온에서는 평균 사망 연령이 1960년의 32세에서 2020년에는 55세로 증가했다. 오직 에이즈 풍토병 문제를 겪는 레소토만 1980년보다 현재의 기대 수명이 더욱 낮을 뿐이다.
[5] 그러나 출생률의 감소는 좀 더 느리게 따라왔다. 니제르는 1980년에 여성 1인당 7.8명에서 현재 6.7명으로, 나이지리아는 6.8명에서 5.2명으로, 말리는 7.2명에서 5.7명으로, 앙골라는 7.5명에서 5.4명으로, 우간다는 7.1명에서 4.7명으로, 수단은 6.8명에서 4.3명으로 감소했다.
[6] 이런 극심한 불균형 때문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가파른 수준의 인구 증가율을 기록했다. 1950년에 겨우 250만 명이었던 니제르의 인구는 2020년이 되자 무려 열 배로 늘어나서 2430만 명이 됐다.
[7] 이는 영국이 1640년부터 2000년까지 기록한 인구보다 훨씬 더 큰 비율로 증가한 것이다.
[8]
다가오는 수십 년 동안, 이런 빈곤한 지역의 인구는 더욱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를 들어서, 니제르는 2070년에 1억 700만 명의 인구에 달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니제르는 지난 120년 동안 대략 4100퍼센트의 인구 증가를 기록하게 될 텐데, 이는 서기 1000년대 전체 기간에 걸친 영국의 인구 증가세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1980년에 700만 명이었던 말리의 인구는 약 6500만 명이 될 것이다. 우간다는 1억 1000만 명 이상, 소말리아는 5000만 명이 조금 넘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들인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콩고민주공화국, 탄자니아는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이 될 것이다. 2070년에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약 4억 7500만 명, 콩고민주공화국은 3억 1500만 명, (현재 미국보다 연간 출생아 수가 많은) 에티오피아는 거의 2억 7500만 명, 그리고 탄자니아는 약 1억 8000만 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아프리카는 전염병, 노예 제도, 식민지화로 인해 오랫동안 과소 인구였다. 예를 들어 1950년 아프리카 전체의 인구 밀도는 현재의 러시아보다도 낮을 정도였다. 그랬던 아프리카의 전체 인구는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0년대 말에 10억 명을 돌파했다. 2070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30억 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9]
이러한 급속한 인구 증가는 아프리카 국가의 주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바로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을 부추기는 수많은 청년 실업자, 특히 남성 실업자의 문제다. 물론 젊은 인구가 많은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중국이나 한국처럼 급속도로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에서는 젊은 인구가 요긴하게 작용했는데, 그들을 고용하는 것은 젊은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싱가포르는 1965년의 중위 연령이 2020년의 모잠비크보다 낮았지만, 그런 역경을 불안하지 않게 견뎌냈다.
[10] 그러나 실현 가능한 발전 방향이 없는 나라에 이처럼 역전된 연령의 피라미드는 저주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실질적인 발전이 거의 없었던 경제권의 대규모 청년 실업자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정치사회적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최악의 경우, 점점 불어나는 하야틴의 수는 보코하람이나 알-샤바브와 같은 폭력 단체의 매력을 더해줄 것이다. 이미 취약한 나라의 내부 갈등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아프리카를 제외한 전 세계 인구가 장기간의 둔화 또는 감소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고, 아프리카의 인구는 장기간의 놀라운 폭증세를 보이는 가운데, 세계의 발전과 빈곤 감소의 미래는 아프리카의 미래에 달려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동아시아 경제의 이례적으로 강력한 성과가 다른 지역의 덜 인상적인 결과를,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의 저조한 성적을 통계적으로 보완해 줬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상당수는 비록 보건 수준이 개선되긴 했지만, 1980년대보다 지금이 실질적으로 부유하다거나 경제적으로 더욱 발전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빈곤 통계의 대륙 간 보상 효과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실질적인 경제 발전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급속한 인구 증가는 “빈곤의 감소”와 전반적인 세계 발전에 있어서 앞으로 암울한 수십 년이 펼쳐짐을 의미할 것이다.
위기를 직면하기
빈곤국 대부분의 발전 정체, 생태학적 위기, 선진국의 인구 감소, 그리고 최빈국의 인구 증가까지, 이들의 폭발적인 조합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미국과 유럽의 인구가 고령화되고, 중국의 경제가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가난한 경제를 구원할 또 한 번의 글로벌 원자재 호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멀어 보인다. 지금의 상황은 2005년이나 1965년의 세계와는 다르다. 2010년대 벌어진 다양한 이민 위기, 그리고 그에 따른 정치적 반발로 인해 계속해 증가하는 대량 이주 현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전조 현상일 뿐이다. 신기술은 이동을 더욱 편리하며 매력적으로 만들었고, 사회경제적 변화는 전통적인 공동체에 묶여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경제적 출세를 위한 실질적인 기회가 없는 (나이지리아의) 이바단이나 (앙골라의) 루안다와 같은 도시에 사는 사실상 세계화 된 젊은이들에게는, 설령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이주를 하는 것이 아주 논리적인 계산이다. (이들 국가의 극빈층은 국내 이주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일부 지역의 홍수나 다른 곳의 가뭄과 같은 기후 관련 재해는 이러한 암울한 계산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 “기후 난민”과 “경제적 이주”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결국엔 주관적인 의미 차이다.
이에 대응하여 단지 유럽만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와 같은 부유한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부유한 지역 정부는 이주 가능성을 줄이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미래의 모습은 철조망, 국경의 장벽, 이민자 구금 시설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대중의 여론을 의식하는 서방의 정권들은 유럽연합이 모로코 및 니제르와 함께 진행했던 것처럼 이러한 프로그램을 덜 양심적인 “파트너들”에게 점점 더 아웃소싱 할 것이다.
[11]
가난한 세계의 사람들이 이주할 기회를 줄이려는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세계 발전으로의 복귀 없이는 이주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줄일 방법은 없을 것이다. 만약 20세기의 문제가 듀 보이스(Du Bois)의 말처럼 색상선(color line· 흑백 차별)이었다면, 21세기의 문제는 국경선(border line)의 문제일 것이다.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부유한 국가에는 젊은 노동자가 너무 적고, 가난한 나라에는 너무 많다는) 대량 이주에 대한 순수한 경제적 논리가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 및 그것이 조장하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과 비견될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이동이 (어떤 식으로든) 성공적으로 이뤄지더라도,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세계의 최빈국을 의미 있게 발전시키지 못한 것의 일부만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세계에서,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산업화에 대한 필요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서구의 엘리트는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글로벌 탈산업화의 이후에 그들이 가난한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발전주의(developmentalism)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새로운 무작위 대조 시험을 하거나 가끔씩 발전 전문가와 함께 세미나를 진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맹인이 맹인을 이끌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엘리트 “발전 공동체”의 지적 고갈은 가늠하기 어렵다. 자유 무역, 민주화,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라고 불리는 모호한 것에 대한 가치 부여 등, 지난 수십 년의 진부한 정통 교리를 여전히 신봉하는 상위 계층은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답이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조금 더 겸손한 유형의 사람들과 불안하게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야심 차면서도 미래 지향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에 기반을 둔, 새로운 개발 프레임 워크가 절실히 필요하며 그 범위는 가난한 세계와 부유한 세계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난한 국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소한, 발전 지향적인 엘리트로 구성된 새로운 동맹으로 수탈적인 지대 추구 세력을 대체해야 할 것이다. 국가의 역량을 재건하려는 노력, 외국 기관에 대한 거버넌스의 아웃소싱을 줄이려는 의식적인 시도가 있어야 한다.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토지 개혁과 농업의 현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손상된 사회 구조를 개선하고 폭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을 회복하는 등, 질서의 재구축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아마도 상징적인 재건국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지리적 장애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교통 인프라 역시 상당히 개선될 필요가 있다. 공직 역량이 개선되는 것 역시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조직의 개혁만이 아닌 신중한 문화적 개혁도 필요하다. 산업화 초기의 중국이 노동력 풀을 강력하게 만들었던 것과 유사하게 대규모의 공중 보건 및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희토류 금속에 대한 일종의 OPEC과 같은 형태의) 다자간 협력에서부터 모든 니켈 수출은 자국 내에서 처리돼야 한다는 인도네시아의 협약처럼, 자원의 잠재력을 활용해 가치 사슬을 산업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접근법을 개선하려는 의식적이며 집중적인 산업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확실히 이러한 의제는 야심 차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수많은 서방의 개발 전문가들을 내쫓아야 할 것이고, 어쩌면 심지어 글로벌 시스템의 일부에서 전략적으로 철수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은 굉장히 까다로워 보이지만,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무하마드 알리 파샤(Muhammad Ali Pasha)나 독일의 비스마르크(Bismarck)부터 20세기 튀르키예의 아타튀르크(Atatürk)나 덩샤오핑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위대한 근대화주의자가 추구했던 프로그램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도 현재의 세계 질서 내에서 일어난다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주변부만이 아니라, 반드시 중심부가 변해야 한다. 가난한 세계의 발전주의자들은 부유한 국가도 발전시키겠다는 새로운 책무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도적인 경제권에서도 새로운 엘리트 연합이 필요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침체와 산업적 쇠퇴를 역전시키기 위해 미국이 추진하는 내수 생산 혁명이나, 중국의 가계 소비를 늘리기 위한 노력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의 대대적인 재편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가장 분명한 것은, 과거에 성공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한 이들이 실행했던 전략들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TRIPs
[12] 및 TRIMs
[13]와 같은 WTO의 협정처럼, 국가 산업 정책의 범위를 제한해 왔던 글로벌 자유 무역의 인프라가 조정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수많은 신흥 시장에 피해를 줬던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을 방지하고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의 자율성을 가난한 세계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IMF의 글로벌 준비금 제도 reserve system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특별인출권SDR 할당을 재편해야 한다. 또한, 국제적 통화의 흐름을 규제하기 위해 새롭고 신뢰성 있는 브레턴 우즈 체제의 프레임 워크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위기에 위기를 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 발전의 황금기는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인다. 국내외적으로 필요한 구조적 개혁은 어쩌면 기존의 협정을 무너뜨릴 정도로 구부릴 것이다. 위기에서 위기로 옮겨 다니며,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기적인 치료제를 뿌리는 데 익숙한 분열된 지구의 수호자에게는 (이러한 제안이) 설득력이 없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제안이 뭔가 공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러니까 문제의 말미에 제멋대로의 희망을 덧붙여서 세계의 상황에 대한 암울한 평가를 만회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런 조언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만 취한다면, 메두사의 두 눈을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저 돌로 변할 것이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