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비버튼 캠퍼스로의 여정은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화면 속에는 짙은 녹음과 적색 트랙이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침엽수림이 400미터 경기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적막감과 역동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곳에 가면 누구든 레인에서 스타트 자세를 취할 것 같았다. 나이키 바우어만 트랙 클럽 인스타그램에는 눈 덮인 트랙을 가로지르는 엘리트 러너들이 보였다. 한겨울에 쇼트 팬츠를 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파와 적설, 그 어떤 기상 조건에도 훈련을 멈출 수 없다는 결연함과 완고함이 느껴졌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곳을 ‘궁극의 조깅 코스’로 꼽았다.
실제 밟아 본 나이키 본사의 마이클 존슨 트랙은 사진으로 본 것 이상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운동장 자체보다 평일 낮 도처에 보이는 러너였다. 조깅 트레일을 따라 오솔길과 빌딩 숲 사이를 자유롭게 달리고 있었다. 그들의 등을 보며 우드 칩이 쫙 깔린 길을 따라 걷고 뛰었다. 본사 곳곳을 둘러본 경험은 인구가 9만 명밖에 안 되는 미국 서부 소도시에 올 충분한 이유가 됐다.
오리건주 비버튼의 나이키 본사는 캠퍼스로 불린다. 대학 생활처럼 즐기는 일터가 되길 바라는 창업자의 뜻을 반영했다. 내가 방문한 캠퍼스 미아 햄 빌딩 1층에는 샐러드 바가 있었다. 직원들이 모여드는 점심 시간대였다. 바로 옆 카페에 앉아 있던 그때, 익숙한 복장의 남성이 계단을 올랐다. 검은색 정장과 검은색 운동화 차림의 필 나이트(Phil Knight)였다.
위층으로 향하는 그는 점심이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인사를 건네는 데 3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나이키 러닝화의 빅 팬입니다.”
직접 본 그는 180센티미터가 조금 안 되는 다소 마른 체격이었다. 80대의 나이트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연륜이 있었다. 잠깐의 만남 동안 그의 자서전 《슈독(Shoe Dog)》을 흥미롭게 읽은 점도 덧붙였다. 그는 사진 요청에도 흔쾌히 응했다.
나이트는 자신을 ‘일평생 신발에 헌신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의 책은 ‘달리기에 미친 사람들’의 분투기이자 연대기다. 미국 오리건대학교 육상 선수 출신인 나이트는 레전드 코치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과 나이키를 공동 창업했다. 러너에게 더 나은 운동화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1964년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나이키는 엘리트 러너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러너도 아낌없이 지원한다. 기량 향상을 위한 러닝화 개발, 지역 러닝 클럽 후원, 인프라 지원 등을 이어 오고 있다. ‘트랙 수도(Track Capital)’라 불리는 오리건의 러닝 문화는 두 로컬 러너의 레거시를 바탕으로 한다.
그들이 일군 ‘러너스 월드’에서 나는 ‘오리건 러닝’에 빠져들었다. 비버튼과 포틀랜드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러너를 볼 수 있는 도시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 방수천이 덮인 유모차를 밀며 달리는 커플도 봤다. 과장을 보태면 오리건에선 모두가 달린다.
왜 오리건 러너는 끊임없이 달릴까. 현지 러닝 커뮤니티와 교류하며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참여한 그룹런의 리더 클로이 핼리버튼은 오리건 고유의 러닝 문화, 인프라, 자연환경, 기후, 역사를 이야기하며 나의 이해를 도왔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삶이자, 생활과 일의 동력이다.
이후 다양한 기회로 일본 교토, 미국 샌안토니오, 우리나라 서울 등에서 활동하는 세계 각지의 러너와 연이 닿았다. 각 도시 고유의 로드와 트레일, 라이프스타일, 러닝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러닝을 통한 일과 생활의 밸런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러닝, 왜 달리는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매료됐다. 그렇게 국내외 러너를 인터뷰했다.
내게도 달리기는 리추얼이 됐다. 낯선 곳에 가면 더욱 그렇다. 어느 지점 어느 상황에서나 선을 그리듯 잇고 싶은 나만의 의식이다. ‘뛰고 싶다’는 생각은, 나만의 리듬을 되찾기 위한 자연스러운 몸의 신호다. 익숙지 않은 타지에서, 또는 격무에 쫓긴 날, 나는 뛰고 나서 되레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걸 자주 경험한다. 일종의 러너스 하이다. 일을 마치고서 뛰고, 달리기로 키운 체력과 멘털로 일을 한다. 그렇게 나의 몸도 일도 ‘성장’한다.
이 책은 일과 달리기를 병행하는 아마추어 러너들에 관한 기록이자, 달리기에 대한 생각의 아카이브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서울 러닝 클럽 PRRC의 공동 설립자인 메이크원, 러닝 비즈니스를 선도하는 굿러너컴퍼니의 이윤주 대표, 김재희 매니저, 송무경 매니저, 트레일 러닝 인플루언서 히맨, 러너를 돕기 위해 물리 치료사가 된 오리건 육상 선수 출신 핼리버튼, 교토 러닝 클럽 리더인 사업가 토마스 부쉬, 미국 샌안토니오의 ‘울트라 러닝 맘’ 라이자 하워드, 세계 네 개 대륙 월드런을 완주한 프랑스의 마리 레오테까지, 인터뷰이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 덕분에 책을 발간할 수 있었다. 도움 주신 한 분 한 분께 감사를 표한다.
우리는 눈 쌓인 한강변과 비에 젖은 트레일, 해 질 녘 도심을 달렸다. 러닝에 대한 생각을 공유했고 서로의 달리기를 지지했다. 모든 여정을 함께 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천천히 천변을 달리듯 읽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