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에 미친 사람들
프리를 보며 전력을 다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 대학 시절 읽은 인텔 전 CEO 앤디 그로브의 자서전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Only the Paranoid Survive)》는 표지를 뒤덮은 제목과 큼직한 사진이 눈에 띄는, 다소 기괴한 책이었다. 그의 ‘편집광적’ 태도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본문에는 저자가 1980년대 회사 주력 사업을 메모리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과감히 재편하고 인텔을 세계 7위 기업으로 만든 일화가 소개된다. 그는 사업 구조, 사업 방식, 경쟁 방식이 바뀌면서 힘의 균형이 이동하는 이른바 ‘전략적 변곡점’을 인지하고 깊이 천착할 것을 강조한다. 시종일관 한 가지 일에 몰두할 것을 주문하는 그로브의 집념을 보며, 당시 나는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은 기업 하는 사람들의 전유물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처럼 진정 미쳐 있는 사람들을 만난 곳은 일터보다 강변, 산길, 가끔은 도로변인 경우가 많았다. 매달 500~600킬로미터를 뛰는 직장인 러너, 한겨울 북한산의 트레일 러너, 그들은 달리기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물론 기업에서 말하는 ‘사력을 다하는 것’과 러닝 영역에서의 그것은 다를 수 있다. 엘리트 러너가 아닌 아마추어 러너라면 더욱 그렇다. 업무는 효율과 비용을 기본 전제로 하며 이는 어느 분야 어느 기업에나 통용되는 공식이다. 하지만 러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하철로 20분이면 당도할 거리를 두 시간 넘게 뛰어가는 등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윤과 실익에 근거하지 않고 하루 수 킬로미터에서 수십 킬로미터를, 온전히 자발적으로 뛰고 또 뛰는 러너들이야말로 진짜 ‘미친 사람들’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많은 러너가 꾸준히 달리는 이유로 향상심(向上心)을 꼽는다. 글자 그대로 현재보다 나아지려는, 발전하려는 마음을 뜻한다. 나는 체중 감량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킬로미터 기록을 분당 6분 30초대에서 5분대로 앞당겼을 때, 걷기와 뛰기를 반복하던 고개를 단숨에 넘었을 때, 3킬로미터도 벅차던 내가 30킬로미터 이상을 소화했을 때다.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꾸준히 달리며 성장한 나를 발견하고 러닝에 온전히 매료됐다. 향상심과 성장, 빠져듦의 선순환이다.
보스턴 마라톤과 뉴욕 마라톤을 각 4회씩 우승한 마라톤 레전드 빌 로저스 Bill Rogers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달리는 걸음, 당신이 달리는 거리가 당신의 몸뿐만 아니라 당신의 운명을 바꾼다.” 그 역시 같은 이유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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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러닝의 또 다른 동력은 ‘리듬’이다. 달리기 리듬은 더 가볍고 편안하게, 더 나은 지구력으로, 덜 피곤하게, 자신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급, 중급 아마추어 러너뿐만 아니라 준엘리트 급인 마스터스, 엘리트 선수도 더 나은 리듬을 꾸준히 익힌다. 안정적인 호흡 패턴, 일정한 보폭, 과하지 않은 팔 스윙 등 내 몸에 맞는 리듬을 찾을 때 나만의 러닝이 시작된다. 이를 통해 달리기는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행위가 돼버린다.
신문사에서 일할 당시 새벽 출근이 잦았다. 편집국에 들어서면 오전 5시 40분, 얼음물과 커피로 잠을 쫓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수년 전 어느 가을 출근길, 광화문 네거리에 형광 싱글렛을 입은 러너가 보였다. 어깨를 활짝 젖힌 채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며 ‘덕수궁 한 바퀴 거리는 달렸겠네’ 하고 짐작했다. 그날 내내 광화문 러너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달리기를 놓다시피 하고 있었다. 일이 많았고 뛰는 건 뒤로 미뤘다. 달리는 거리와 횟수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러던 차에 ‘광화문 러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달렸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길로 나는 다시 달렸다. 주 3회 이상 뛰었고 그해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네 시간 안에 완주하는 ‘서브 4’를 달성했다. 일에 지칠수록 더 뛰었다.
퇴근 후의 러닝을 위해 업무에 집중했고, 주말에는 길게 뛰며 다음 한 주의 일을 구상했다. 도무지 풀 수 없는 업무상 난제를 만날 때면 허벅지 경련에도 마라톤을 완주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일에서의 체력과 맷집을 키우기 위해 달렸다. 악착같이 뛰다 보니 일의 지구력도 늘었다. 그렇게 내게, 일은 러닝을 닮아 갔다.
엘리트 러너를 보며 일의 방식을 배운다. 몸 관리, 리커버리(회복) 방법을 익히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선수라면 누구나 철저한 체중 조절, 식단 관리를 유지한다. 그들의 습관 하나하나를 내 것으로 만든다. 부상 방지를 위해 운동 후 폼 롤러 마사지, 얼음찜질도 한다. 충분한 스트레칭과 회복을 위한 수면도 필수다. 선수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작은 요소까지 개선한다. 문제를 정의하고 방법을 찾고 해결한다.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리스트 멥 케플레지기(Meb Keflezighi)는 달리기에서의 성공 요소로 세 가지를 꼽는다. 좋은 목표(good goals), 헌신(commitment), 근면(hard work)이다. 그는 특히 좋은 목표를 강조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의 목표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아닌 온전히 나의 목표, 스스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좋은 목표는 일관성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 한결같음은 러너로서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목표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성취 과정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목표를 좇는 것은 동기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만든다.”
[4] 그가 꼽는 성공 요소를 일에 대입해도 어색함이 없다. 달리기와 일 모두 목표가 중요하다.
동틀 녘 침대를 빠져나와 길 위에 서는 것, 혼자만의 레이스를 이어가는 건 쉽지 않다. 달리기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는 ‘불편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한 발씩 내딛다 보면 그것은 ‘즐거운 불편함’이 된다. 혹한에 정강이가 저리고, 장대비에 흠뻑 젖어도, 러너라면 늘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도, 뛰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