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포크가 주목하는 러닝 클럽
“운동화 고무바닥이 딱딱한 아스팔트를 박찼다. 그 감촉을 맛보면서 구라하라 가케루는 소리 없이 웃었다. 발끝에 전해지는 충격을 온몸의 근육이 유연하게 받아서 흘려버렸다. 귓가에서 바람이 울렸다. 살갗 바로 밑이 뜨거웠다. 아무 생각 없이도 가케루의 심장은 온몸에 피가 돌게 하고 폐는 막힘없이 산소를 빨아들인다. 몸이 점점 가벼워졌다. 어디까지든 달려갈 것 같았다.”
일본 소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1] 는 하코네 역전 마라톤에 도전하는 칸세이대학교 육상부의 이야기다. 천부적인 육상 선수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서툰 사회학부 가케루, 아프리카에서 왔지만 달리기는 난생처음인 교환 학생 이공학부 무사, 육상계에 잠시 몸담았으나 지금은 헤비 스모커가 된 이공학부 니코짱, 사법 시험을 패스한 철저한 분석파 법학부 유키까지. 속도와 주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들은 한곳을 향해 함께 달린다.
서울의 러닝 클럽 PRRC 멤버들도 마찬가지다. 페이스, 레이스 경력, 하는 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타타타타’ 발소리와 호흡을 맞춰 가며 매주 달린다. 정동길, 잠수교, 한강 남단 등 서울 곳곳을 가로지른다. PRRC의 서브 러닝 클럽 서울비너스(SLVNS), 프라이빗 트랙(Private Track) 등의 정규런까지 하면 주 2~3회 발을 맞추는 셈이다.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그리스 코린토스 양식 투구’ 등 PRRC 심볼 로고 유니폼을 입고서 그날의 결승선을 함께 딛는다.
클럽의 풀네임 ‘PRRC1936’은 ‘Private Road Running Club’의 약자에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베를린 올림픽 연도 1936을 더한 이름이다. 한국인 첫 올림픽 우승이란 업적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Private Road’는 ‘혼자 달리든, 함께 달리든 각자가 달리는 그 길은 자신만의, 그리고 혼자만의 길이 된다’는 뜻이다. 클럽의 대표 슬로건 ‘내가 가면 길이 된다’에는 이런 의미가 담겼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점심시간 또는 퇴근 후, 여행지, 출장지, 대회장에서 달리는 멤버의 모습이 속속 올라온다. 국내외 대회에 참가한 러너들은 수요일 그룹런을 마친 후 코스 난이도, 대회 분위기를 리뷰한다. 완주 메달을 메고서 각 도시의 레이스를 브리프하고, 현지 러너와의 조깅, 파티 에피소드를 나눌 때면 사뭇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세계 메이저 대회 때 유니폼의 PRRC 로고를 보고 인사해 오는 러너가 많다는 게 출전 멤버의 설명이다.
2023년 3월에는 각국의 러너가 PRRC와 한강변을 달렸다. 글로벌 러닝 이벤트 BTG가 서울에서 열린 것이다. 자체 제작한 PRRC BDU(Battle Dress Uniform)를 전시 및 판매한 팝업 스토어도 운영했다. BTG는 ‘Bridge The Gap’의 약자다. ‘간극을 줄이자’는 의미로 전 세계 도시의 러닝 크루를 하나로 모으기 위한 무브먼트다. 뉴욕 NYC Bridge Runners, 런던 Run Dem Crew 멤버가 러닝 문화, 라이프스타일, 음악, 예술 분야의 교류를 위해 시작했다. BTG의 다른 러닝 클럽에는 파리 Paris Run Club, 암스테르담 Patta Running Team, 뉴욕 Black Roses, 베를린 Berlin Braves, 홍콩 Harbour Runners, 코펜하겐 NBRO 등이 있다.
PRRC와 해외 러너는 이벤트가 아니어도 수시로 교류한다. 한국에 온 외국 러너가 그룹런에 참가하고 PRRC 멤버도 게스트로 각국을 달린다. 서울 올림픽의 표어처럼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를 만들어 내는 PRRC를 두고, 글로벌 러닝 매거진 《템포(Tempo)》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러닝 크루”라고 소개했다.
PRRC는 2013년 3월 DJ, 프로듀서 기반의 크리에이터 그룹 360사운즈 멤버 등 10여 명이 모인 게 시작이었다. 2023년 8월 기준 약 370명이 클럽에 속해 있다. 대표이자 주축 멤버는 정바울, 제임스 리 맥퀀(James Lee McQuown), 그리고 메이크원(Make-1・이진복)이다.
메이크원 인터뷰 ; “전 세계 러닝 크루를 서울로”
클럽의 공동 설립자 메이크원은 뮤지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디자이너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 오며 PRRC 정규런과 각종 이벤트를 리드하고 있다. 달리기와 PRRC 활동이 동력이 돼 ‘멀티’가 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PRRC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난 머천다이즈의 기획 및 제작, 나이키 등 브랜드와의 협업도 메이크원의 손을 거쳤다. 힙합 그룹 씨비매스(CB Mass), 일 스킬즈(Ill Skillz)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360사운즈의 멤버다. 360사운즈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아주 신선한 문화를 제공한다’라는 슬로건 아래 디제잉 파티에서 레이블, 레코드 스토어, 디자인 스튜디오, 이벤트 기획, 굿즈 제작 등으로 영역을 확대해 온 크리에이터 그룹이다. 이 모든 것이 PRRC에 영향을 끼쳤다. 트렌드와 메인 스트림에 얽매이지 않는 라이프스타일, ‘멋’으로서의 러닝을 추구하는 메이크원을 만났다. 그는 PRRC 활동 10년, 러너가 서로 주고받는 영향에 대해 말했다.
국내 대표 러닝 클럽 중 하나다. 어떻게 결성했나.
PRRC를 시작하기 이전부터 모두가 친구였다. 러닝 클럽으로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부분은 정바울 대표와 함께 구상했다. 2013년 3월 그룹런을 시작하기 전에는 각자 동네를 달렸다. 수소문해서 마라톤 클럽에 참여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동호회의 성격과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직접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CNN, 킨포크 등 해외 미디어도 주목한다.
해외 마라톤 대회를 나가면 전 세계 모든 러닝 클럽이 PRRC를 가족처럼 환대한다. 매번 감동과 감사를 느낀다. ‘우리도 그들에게 같은 경험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BTG 등 이벤트를 열었다. 외국 러너와의 활발한 교류 덕에 해외 미디어의 관심을 끄는 것 같다.
해외 러닝 클럽과의 교류가 활발하겠다.
해외의 다양한 그룹런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여전히 일본 AFE(Athletics Far East), 미국 KRC(Koreatown Run Club) 등 세계 곳곳의 러닝 클럽과 교류하면서 많은 점을 배운다. 이를 통해 PRRC가 성장하고, 러닝 클럽 문화가 발전하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PRRC가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경험해 본 바로는 국내 동호회 중에 지나친 친밀함과 소속감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로 인한 문제점도 있는 것 같다. PRRC는 그런 요소를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길 원한다. 배려하고 응원하며 생기는 에너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커뮤니티가 되길 바라고 있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 중이다. 놓치지 않으려는 또 하나는 ‘멋’이다. 멋의 기준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PRRC는 러닝 클럽으로서의 멋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설립한 지 10년이 됐다. 기억에 남는 행사가 있나.
2017년 BTGSEL(Bridge The Gap Seoul) 첫 이벤트를 꼽고 싶다. ‘해외 러너들이 우리의 이벤트에 참여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 기획, 운영, 진행 등 모든 과정에 PRRC 멤버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웰컴 파티, 대회 전날 가볍게 뛰며 컨디션을 체크하는 쉐이크 아웃 런(Shake Out Run), 레이스, 응원, 애프터 파티 등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3월 서울 마라톤 전후에 열린다. 대회를 위해 방한한 각국의 러너가 서울의 문화를 더 느낄 수 있도록 이벤트를 진행한다.
달리기는 혼자 하는 스포츠지만, 함께 달리며 얻을 수 있는 게 많다. 지칠 때 함께 구호를 외치며 힘을 더 끌어낸다. 그룹런 주자들과 페이스를 맞춤으로써 내 몸의 힘을 조절하는 법도 익힌다. 클럽 러너들의 건강한 에너지를 통해 러닝 외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배우고 있다.
엘리트 선수도 초대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비정기적으로 엘리트 선수 초빙을 진행한다. 아마추어 러너라면 대부분 경험하지 못한 엘리트 러닝 문화에 관심이 있다. 물론 PRRC의 목적이 엘리트 러너 육성은 아니지만, 잠깐이라도 선수들과의 훈련을 체험하면 동기 부여가 된다. 기록을 위해서 뛰던 선수들도 즐기는 러너와 함께하며 많은 영감을 받는다고 말한다.
언제 러닝을 시작했나.
나를 비롯해 199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는 달리기를 체벌로 접하곤 했다. 어릴 적부터 러닝이 즐거움이 아닌, 좋지 않은 경험이 된 것이다. 그러다 입대 후 2년 넘게 거의 매일 구보를 했다. 이때 괴롭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달리기가 그 어떤 운동보다 간단하면서 직관적이라 생각했고 제대 후에도 가끔 달렸다. 러닝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 계기는 운동화다. 평소 관심이 많았는데 매 시즌 진보된 기술이 적용된 나이키 제품을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까지 꾸준히 달리는 동력은 무엇인가.
당연히 나 자신을 위해서다. 건강을 위한 이유도 있지만 뛰는 동안 생각도 정리한다. 한때 더 잘 달리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다가 부상으로 몇 달간 뛰지 못했다. 즐겁게 오랫동안 달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년째 같은 코스를 달리고 있지만, 전혀 지겹지 않다. 달릴 때마다 몸의 컨디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온전히 느끼며 겸손해지곤 한다. 체계적인 달리기를 이어온 것은 PRRC 멤버의 영향이 크다.
함께 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의 루틴 중 하나는 러닝을 기록하는 것이다. 주로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다. 귀찮을 때도 있지만, 가끔 달리기가 지루해질 때 주변 친구의 러닝 포스팅을 보고 힘을 얻은 경험을 떠올린다. 뛰고 싶다는 자극을 나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꾸준히 기록한다. 러닝 앱은 러너들과 교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가민 GPS 시계를 나이키 러닝 앱 NRC와 스트라바 앱을 연동해 사용한다. 한때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내 몸을 느끼며 달리기도 했는데, 발전된 기술을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사용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대회가 있나.
첫 국내 마라톤과 첫 해외 마라톤은 잊을 수가 없다. 안산 바닷길 마라톤은 PRRC를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태원 클럽 Cakeshop에서 360사운즈의 파티를 마치고 술이 덜 깬 상태로 달렸다. 기록보다는 마라톤 대회를 경험해 보자는 취지로 참가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 마라토너 대부분이 우리 부모님 세대였다. 참가자 연령대에 놀랐다. 젊은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온몸에 바셀린을 찍어 바르는 어르신의 낯선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충분한 훈련 없이 참가한 터라, 막상 시작하니 할머니들에게 추월당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대회였다.
첫 해외 마라톤은 어땠나.
도쿄 마라톤이었다. 호스트를 맡은 AFE, 전 세계에서 모인 러닝 클럽 멤버와 교류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됐다. 주로의 시작부터 끝까지 도쿄 시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멈추지 않는 전율을 느꼈다. 그 순간을 위해 각자의 이유로 참가한 러너들을 보면서 크게 감동했다.
디제잉 등 여러 활동을 한다. 러닝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나.
내가 하는 여러 일은 모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데일리로 하는 일은 AP(Ark Project) 팀에서 팀원들과 함께 다양한 제품을 기획하고 생산하는 것이다. 프로젝트 클라이언트는 아티스트, 디자이너, 브랜드와 스토어 관계자 등 다양하다. 360사운즈는 DJ들을 주축으로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머천다이즈를 주로 기획한다. PRRC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다. PRRC와 360사운즈 활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스스로 어떤 러너라고 생각하나.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주변의 PRRC와 해외 러닝 클럽의 멤버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동기 부여가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