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홍콩 시내의 유리로 뒤덮인 고층 빌딩 숲의 그늘에 서 있는 시위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경찰은 그들을 해산시키기 위해서 최루 가스를 살포하고, 고무탄을 쏘고, 물대포를 발사하고, 곤봉을 휘두른다. 시위대는 홍콩 입법회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이 논의되는 것을 막기 위해 6월 11일 집결한 이들이다. 만약 법안이 통과되면, 홍콩의 범죄 용의자가 중국 본토로 이송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중국의 사법부는 공산당의 절대 권력에 철저하게 복무하고 있다.
6월 12일이 되자 시위의 규모가 더 커졌고, 법안에 대한 논의는 연기되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해산을 거부했고, 입법회 건물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선 경찰 저지선과 충돌했다.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병원 관계자들은 72명이 부상을 입었고, 두 명이 중태라고 밝혔다. 다음 날 수십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경찰 역시 현장에 나섰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가 발간되는 시점(13일)에 도시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많은 눈물을 보인 것은 홍콩의 행정 장관인 캐리 람이었다. 진심인 것 같아서 더 오싹한 눈물이었다. 6월 9일의 무더웠던 오후, 이 도시에서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거대한 시위가 일어났다. 최대 백만 명이 집결한 이 시위는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이양된 이후 최대 규모로 추정된다. 홍콩의 한 방송사는 람 행정 장관에게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범죄인 인도 법안을 철회할 생각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러지 않겠다고 답했다.[1] “저 역시도 한 명의 어머니입니다.”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만약 제 아들이 공부하기 싫다는 핑계로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그냥 내버려 둔다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잠깐은 괜찮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고집을 그대로 두면 아들은 어른이 되고 나서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독선적이면서도 무정한 부모와 같은 그녀의 어조는 홍콩 지배층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시위를 용인할 수 없고, 용인하지도 않을 어린 아이들의 반항이라고 여기고 있다.
베이징의 공산당 권력에 충성하는 정치인과 재벌들이 장악한 위원회에서 선출된 람 행정 장관은 신규 법안이 ‘새는 구멍’을 막아 줄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전임 행정 장관들이 공산당 휘하의 중국의 법원으로 용의자를 보내는 법안을 깜빡하고 놓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법안을 반대하면 홍콩이 도망자들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홍콩 당국은 이 법안이 정치 사범을 제외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 내의 체제 비판자들이 기소당하는 죄목은 정치 활동이 아닌 뇌물과 협박죄라고 반박한다. 앞서 공산당 지도부의 추문을 담은 책들을 발간한 홍콩의 출판업자인 구이민하이(桂敏海)가 태국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이후 중국의 구치소에 수감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10년도 더 지난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쁜 정부가 나쁜 법을 만든다[2]
람 행정 장관이 최소한의 토론만 거친 이 법안의 상정을 밀어붙였던 이유 혹은 구실이 된 것은 판샤오잉(潘曉穎)이라는 홍콩 여성이 대만에서 살해된 사건이었다. 유력한 용의자인 남자 친구 찬퉁카이(陳同佳)는 홍콩에서 살인이 아닌 자금 세탁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홍콩 정부는 찬퉁카이가 해당 형기를 마친 후에 대만 법정에 설 수 있게 하려면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은 곳으로 범죄자들을 넘겨줄 수 있는 권한이 행정 장관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법원의 감독하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법의 적용 대상 지역은 중국의 모든 영토를 아우르는데, 홍콩과 베이징 양쪽 정부가 생각하는 중국 영토의 범위 안에는 대만도 포함되어 있다.[3]
그렇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만은 중국의 영토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해당 법안을 적용한 결과로 찬퉁카이를 넘겨받을 생각이 없다. 홍콩의 야당 의원들과 학자들은 새로운 법안이 아닌 일시적 합의를 통해서 찬퉁카이를 대만으로 보내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람 행정 장관이 말한 ‘새는 구멍’에 대해 변호사인 마거릿 웡(吳靄儀)은 ‘버그(bug)가 아니라 숨겨진 기능’[4]이라고 강조한다. 현재의 범죄인 인도에 관한 법률은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기 불과 몇 달 전에 발효된 것이다. 1995년부터 2012년까지 입법 의원을 지낸 웡 변호사는 법안이 애초부터 중국 본토와 홍콩의 사법 체계 사이에 방화벽(firewall)을 세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신뢰할 수 없는 중국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의 허브로서의 홍콩이라는 자부심과 홍콩의 법치주의를 지켜 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라는 중국의 공언이 사실이라면, 홍콩의 이런 법률도 중국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할 것이다.
안손 찬(陳方安生)은 영국령 홍콩의 마지막 정무 사장[5]이자 중국령 홍콩에서도 초기 4년 동안 정무 사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녀는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986년까지만 해도 홍콩인이 중국 본토에서 저지른 심각한 범죄를 다루기 위한 치외 법권을 홍콩 법원에 부여하는 방안을 고려했었다고 전한다. 중국의 법원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시진핑 체제의 중국에 대해서 “예전보다도 신뢰도가 더 떨어진다”고 말한다.
6월 9일에 거대 군중을 길거리로 이끌어 낸 것은 바로 그 방화벽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주최 측의 추산이 정확하다면 홍콩 인구의 7분의 1이 시위에 참가했다. 많은 이들이 애도를 의미하는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번이 처음 참가하는 정치 집회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시위대의 규모에 놀라고 있다. 홍콩 사람들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 지친 것 같다는 세간의 평가는 거짓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전개
6월 11일 시위의 시작은 작았다. 의회에서 법안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려 하자 수만 명의 시위대가 정부 기관들이 모여 있는 중심가로 집결했다. 이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시위대의 다수는 여름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었다. 나머지는 동맹 휴업 중인 수백 개 기업의 직장인들이었다. 대부분이 젊었다. 하지만 이들은 미숙하지 않다. 이 자리에 선 많은 이들은 2014년 몇 주 동안이나 거리를 뒤흔들었던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 민주화 시위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경찰의 페퍼 스프레이를 막기 위해 우산을 꺼내 든 시위대의 모습에서 붙은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시위다. 6월 12일에 거리로 나온 이들은 우산뿐 아니라 마스크, 스카프, 안전모를 썼고, 맨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비닐 랩을 둘렀다. 몇 사람은 벽돌을 들고 나와 무력 진압을 시도하는 경찰을 향해 던졌다.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이번 시위는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도 놀랄 만한 규모다. 홍콩대학교의 법학 교수인 주름진 얼굴의 베니 타이(戴耀廷)는 ‘센트럴을 점령하라’ 시위의 지도부 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해 인터뷰에서 그는 이만큼 거대한 규모의 시위를 다시 보게 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걱정합니다. 특히나 경제 중심 구역에서라면 말이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민주주의가 요동치기를 기다리면서 “적절한 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베니 타이 교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월 ‘센트럴을 점령하라’ 시위를 주도했던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현재의 시위대 중 일부가 그들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번 시위의 지도부가 받을 형량은 베니 타이 교수의 16개월 징역형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람 행정 장관은 이번 시위를 가리켜 “조직적으로 선동된 폭동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폭동’이라는 의미를 법률적으로 엄밀히 해석한다면, 이번 시위의 참가자들은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베이징의 관료들 역시 법안에 대한 저항이 이렇게 거세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홍콩이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 이후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국의 통치자들은 홍콩의 시민들이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해 왔다.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사육되는,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운명 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홍콩 반환 당시 강조했던 자치권 보장을 훼손하는 제안들이 잇따르면서 홍콩은 가장 부유하고 국제적일 뿐인 중국의 도시 중 하나로 전락했다. 중국에게 홍콩은 여전히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의 국내 총생산(GDP) 합계에서 홍콩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7년 반환 당시 15퍼센트 이상에서 2018년 3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한편 홍콩의 저항으로 인한 비용은 증가하고 있다. 2003년의 시위로 홍콩 당국은 베이징이 도입하려 했던 반체제법을 보류해야 했다.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행정 장관 둥젠화(董建華)는 사임했다. 그 이후, 특히 2012년에 시진핑이 당의 지도자가 된 이후로 중앙 정부의 인내심은 점점 더 바닥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범죄인 인도 법안 정국에서 가장 놀라우면서도 신경 쓰이는 지점은 베이징의 정치국 상무 위원들이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례가 없는 이런 간섭은 중국 중앙 정부의 초조함을 보여 주고 있다.
중국 내의 언론 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검열되고 있지만, 중국 관영 매체들의 대외용 논평은 “외세”가 홍콩을 “대혼란”에 빠뜨리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 이번 시위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자연 발생적인 운동으로 지역 변호사와 사제, 학자들, 그리고 정치적이지 않은 이익 단체들이다. 안손 찬 전 정무 사장은 6월 9일 시위에 네 시간 반 동안 참석했다. 그녀는 말했다. “시위대는 홍콩 정부가 계획을 수정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이들은 저항하기를 원했고, 시위대의 일원이 되고자 했습니다.”
홍콩 시민들은 이미 선거에 출마할 자유를 제한당하고 있다. 선거 출마자는 중국의 통치를 인정하고 홍콩의 독립을 포기한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활동가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목격해 왔다. 범죄인 인도 법안이 없는 상황에서도, 공산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코 안전했던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납치를 당했다가 중국 본토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서는 자신의 죄를 억지로 고백하곤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는 일은 홍콩 사람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양심이 깨끗한 홍콩 사람이라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겁니다.” 안손 찬의 말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중국으로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제 편안함은 위기를 맞고 있다.
안손 찬은 람 행정 장관이 생각을 바꾸고 중국으로부터 도망쳐 온 범죄자의 신병 처리에 대해 충분한 숙의를 거친 후에 “실효성 있는 방안”을 제안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낙관적인 바람이다. 홍콩침례대학교의 장-피에르 카베스탕(Jean-Pierre Cabestan) 교수는 미국과의 무역 전쟁으로 중국 지배층 내에서 압력을 받고 있는 시진핑으로서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상실감이 주는 엄청난 힘과 자유를 포기하게 만드는 일의 한계를 보여 주는 교훈적 사례들도 많다. 왜곡된 중국식 법치에 노출되는 일은 많은 홍콩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상실감을 주고 있다. 급성장하는 본토와 통합을 하고 그로 인해서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범죄인 인도 법안이 어떻게든 강행 처리된다면, 그것은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공포와 체념이 거둔 승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