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이유
완결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이유

우리는 종종 집단의 믿음을 나의 신념으로 착각한다. 그게 편해서 그렇다.

나는 정치 분석을 꽤 즐기는 편이지만[1],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만큼이나 꺼려 한다. 이런 원칙은 수년간 반복해서 관찰한 세 가지 패턴에서 비롯되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부족(tribe)에 속해 있다.
  • 부족을 벗어나 진짜 정치적 견해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고 능력을 기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족에서 벗어나 진짜 견해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한테 투표했어?”라고 묻는 사람은 당신이 그들과 같은 집단 문화에 속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마치 교회에서 “당신도 신을 믿죠?”라고 큰소리로 물으며 같은 신앙을 확인하려는 교인처럼 말이다.

이 질문은 참 교묘하다. 마치 진지하고 지적인 담론인 것처럼 포장되기 떄문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 중 대부분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들은 금새 종교 경찰과 다름없는 의도를 드러내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적으로 정직하지만 사회적 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희생된다. 선의를 갖고 대화에 참여하지만, 곧이어 닥칠 사회적 함정을 인지하지 못한 채 휘말려 버리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 이유가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첫 번째는, 정보를 바탕으로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 자체가 워낙 지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부족주의에 빠진다.
 

통찰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정보에 근거한 견해를 가지려면 다음과 같은 능력이 필요하다.
 
  • 경제학, 게임 이론, 철학, 세일즈, 비즈니스, 군사 전략, 지정학, 사회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이해해야 한다.
  • 그 주제에 관련된 다양한 집단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나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무엇보다도 자신의 편향을 인식하고, 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공리주의와 의무론[2]에 대한 이해 없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한정된 자원의 우선 순위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 독재에 대한 두려움과 침략의 위협, 그리고 컴퓨터 칩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지 않고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군사력은 현실을 어떻게 좌우할까? 경제가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터무니없는 소송이 어떻게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기업은 어떻게 설립되고, 선거에서 어떻게 승리하며, 핵가족과 30년 고정 모기지는 미국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게다가 모든 지식을 갖췄다 해도, 우리가 늘 부딪히는 사회 문제에 있어 양쪽 입장 모두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가난한 세입자와 빚더미에 오른 집주인, 지친 노동자와 고군분투하는 자영업자, 부자와 빈자, 이민자와 토착민, 부모와 자식 등과 같은 대립군이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가해자도, 피해자도 존재한다. 집주인이든 세입자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그들 중 누구도 무고한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노동자도, 사업주도 착취당할 수 있으며 도둑맞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경험했거나 연관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에만 공감하게 된다. 자신의 편견을 정직하게 감지하면서 관련된 지식을 습득하고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것을 제대로 해내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3]

그러니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써먹어 온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바로, 자신의 부족을 찾고, 부족의 신념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이다.[4]
이 그래프는 중도 성향만이 독립적 사고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폴 그레이엄(Paul Graham)의 ‘두 가지 종류의 중도(The Two Kinds of Moderate)’ 개념을 시각화한 것이다. 각 점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의 평균값을 나타낸다(실제로는 그 의견들은 넓게 흩어져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분포의 중심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옮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완전히 ‘좌파’나 ‘우파’의 모든 입장에 독립적으로 동의할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각 진영의 일부 입장은 본질적으로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책을 읽고 공부하는 대신, 그냥 부족에게 지식 습득을 ‘외주 맡기면’ 된다. 친구들, 교회, 혹은 우리가 즐겨 보는 뉴스 채널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진화해 왔다. 다른 사람이 웃으면 함께 웃고, 누군가 뛰기 시작하면 같이 뛰며, 다른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원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부족주의이다. 우리 안에 깊이 새겨져 있는 인간 본성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의견을 일종의 ‘패키지’로 받아들이게 되면, 어느 순간 인간은 이성적 견해가 아닌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게 된다. 성(sex)에 대한 관점만 봐도 세금 제도에 대한 입장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5] 이렇게 되면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학습은 (부족에 대한) 응원이 되고, 발견은 (다른 부족과의) 승패로 대체된다.

그럼에도 부족주의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고를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진실과 조우한다. 더욱 어두운 현실이다.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족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족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계다. 그리고 관계는 진실에 충실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종종 그 반대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상사의 질책이 정당하든 아니든, 직원들은 공통의 적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며 유대감을 형성한다. 어떤 집단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신념을 바탕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바로 ‘종교’다.

조직화된 종교에의 참여율은 줄어들고 있지만, 종교적인 행동 양식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다만 세속적인 세계에 맞게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건강, 운동, 정치, 일, 자기 계발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 모든 영역에서 친구들이 그들의 ‘종교적 근육’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좌우 진영을 불문하고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세속적’이라고 믿었던 친구들조차도 그런 행동 양식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6]

이런 종교적 양식에는 늘 공통된 요소들이 존재한다.
 
  • 믿음의 선언
  • 순환 논리
  • 악의 세력(오바마, 일론 머스크, 거대 제약 회사, 식품 산업, 대기업, 이민자 등)

이런 종교적 패턴은 다양한 대상에 적용될 수 있다. 단, 모두 공동체와 정체성을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 공동체, 정체성, 공유된 가치를 제공하는 단순한 세계
  • 대다수 사람에게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복잡한 세계

나는 종종 ‘당신의 믿음과 정반대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알고 싶어 할지’ 질문하곤 한다. 놀랍게도, 정치 토론을 즐기는 친구들조차 이 질문에 분명히 “아니”라고 답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그렇다”고 대답했던 이들도, 결국엔 솔직히 “아니”라고 인정한다.

관계와 세계관의 기반이 되는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진실을 마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차라리 B 정당은 악하다고 계속 믿으면서, A 정당을 지지하는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유지하는 편이 훨씬 더 단순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7] 즉,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연구와 확률이 아니다. 그들은 스포츠 팀[8] 같은 소속감과 단순한 종교적 규범을 원한다.

처음엔 이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알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공동체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와 공동체의 정체성이 거짓된 믿음 위에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거품을 스스로 깨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옹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9]

영화 〈매트릭스〉는 이 점을 가장 잘 묘사했다. 위안이 되는 환상과 가혹한 현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를 택한다.

아래 그림처럼 말이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내가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다.

반대 의견이 두렵거나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10]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품 안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욕망’을 너무도 흔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 누군가가 거품 안에 머물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의식적으로 인정할 만큼 자각하고 있다면,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전통적인 종교를 선택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그런 선택을 마치 지적으로 숙고된 판단인 양 포장할 때다.

진실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대화는 가장 형편없는 형태의 토론이 되어 버린다. 논리적 오류와 그럴듯한 말장난만 가득한, 아무 의미 없는 수사적 말싸움 말이다. 그 대화는 발견을 추구하기보다 설득을 목적으로 하며, 과학자보다 변호사에 가까운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런 논의는 좀처럼 만족스러운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사회적 도박


그렇다면 이런 대화 요청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아예 대화를 피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대화는 사회적 함정인 경우가 많다. 또,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현실보다는 거짓된 이미지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시도해 볼 만한 이유도 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1퍼센트의 사람들, 다시 말해 부족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찾기 위한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주제를 꺼내는 일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성공할 경우, 깊은 이해와 연결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친구를 만나는 커다란 보상이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남는 것은 분노와 소외감뿐이다.
언제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나 역시 많은 친구들과 시도해 봤고, 어떤 경우에는 함께 깨달음의 순간에 도달했지만, 그 친구가 거품 속에 머무르길 원한다는 교조적 신념의 신호를 감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11][12]

의문을 갖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대안을 고려하지 않는 교조주의의 핵심 신호 중 하나는, 대화 상대의 말투가 설득하려는 변호사처럼 변할 때다. 논쟁적으로 변하거나 수사적 기교나 오류를 이용한다. 한 전략이 실패하면 다른 각도에서 밀어붙이며 실패의 원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생산적인 대화는 두 명의 고고학자가 함께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과정에 가깝다. 진지한 참여자들은 정확성을 위해 기꺼이 자기 논리의 약점을 스스로 짚어내기도 한다. 변호사식 논쟁에서는 틀리는 것이 패배지만, 고고학적 대화에서는 틀림이 곧 발견이다. 그 순간 우리는 전에 몰랐던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주의에 맞서기


친구들이 나를 정치적 대화에 끌어들일 때, 그 대화에는 대개 부족주의적 색채가 묻어 있다. 그래서 나는 정파적 함정에 빠지기보다는, 그들의 부족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나는 그들이 내린 결론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 결론에 이르게 된 방식, 즉 그들이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왜 그것을 믿는가이다. 마치 풀이 과정을 보여 주면 부분 점수를 주는 교사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접근은 보통 예측 가능한 결말로 귀결된다. 폴 그레이엄이 〈두 가지 유형의 중도〉에서 말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자신들의 부족과 반대되는 부족의 사람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래서 나는 보수적인 친구들에겐 ‘깨어 있는(woke)’ 진보 진영으로, 진보적인 친구들에겐 우익 성향의 보수주의자로 인식된다. 폴 그레이엄의 설명대로, 이런 입장은 너무나 난처하다. 정통 집단의 일원으로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하나는, 이 에세이를 직접 보여 주는 것이다.

청중 앞에서 말로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허세나 오류 없이, 이 글처럼 명료하게 정리된 형태를 직접 보여 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13]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이미 지적 정직함을 이해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로 돌아온 이유


샌디에이고에서 7년을 보낸 후, 아내와 나는 가족 전체의 삶의 터전을 베이 지역(Bay Area)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기회나 가족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찾고자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진실 추구가 우정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삶도 우스운 일이다. 적은 숫자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사람들이 꾸준히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

물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부족주의적인 성향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현실에서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사람들의 밀집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자신의 편향을 주기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환경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필터 없이 바라보려 애쓰는 사람들을 다른 어떤 곳보다 많이 만나게 되었다. 비록 20대 내내 나는 여기서 벗어나려 늘 애썼지만 말이다.[14]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방법


그렇다면, 사고력을 향상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주제는 매우 방대하다. 나 역시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여기서는 내 생각을 간단히 말하고, 아래에 더 깊이 있는 자료들을 따로 링크해 두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네 가지 핵심 단계는 다음과 같다.
 
  •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 갖기
  • 사고 체계를 개발하기
  • 확률적으로 사고하기(think in bets)
  • 자신의 주장을 흔들어 보기(oscillate your argument)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의지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이기도 하지만, 그 의지야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결여된 부분이기도 하다.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스로의 부족주의적 충동을 인식하고 저항하는 법을 익히는 것, 또는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 등이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누구든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다음 단계는, 탄탄한 사고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나는 2020년에 친구들과 가족을 위해  치트시트(요약 정리표)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꽤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기본서’로 여겨지는 자료는 엘리에저 유드코스키(Eliezer Yudkowsky)의 《The Sequences》라고 한다. 나는 아직 그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현재까지는 ‘해리 포터와 합리성의 방법(Harry Potter and The Methods of Rationality’만 읽었는데, 그래도 이 책은 합리적 사고를 시작하기에 아주 훌륭한 입문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세 번째 항목, ‘확률적으로 사고하기’[15]는 기술적으로 사고 체계의 일부로 분류될 수 있지만, 내가 부족주의와 구별되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 핵심적인 전환점이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하고자 한다.
 

확률적 사고


인간은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고자 한다. ‘A로 인해 B가 발생했고, 그것이 C로 이어졌다’는 식의 서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든 일의 원인이 한 가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생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라 포커에 더 가깝다. 다음 서술처럼 말이다.

‘이 일이 성공할 확률은 A 때문일 가능성이 40퍼센트, B 때문일 가능성이 25퍼센트, 우리가 아직 생각하지 못한 다른 원인이 10퍼센트 ,그리고 애초에 우리가 갖고 있는 모델이 완전히 틀렸을 확률이 25퍼센트쯤 된다.’

설상가상으로 올바른 접근법도 실패할 수 있고, 잘못된 접근법도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둘 중 무엇이 옳았는지를 사후에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게다가 미래 시나리오를 상상하려 들면, 결정 지점마다 타임라인이 두 배로 증가한다. 우리는 머릿속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를 떠안게 된다.

‘만약 A가 사실이라면 B도 사실이고, 하지만 A가 사실이 아니라면 C가 사실이고, 그리고 B가 사실이라면 또…….’
우리는 이 세계의 모델을 그리려 할 때, 금세 인지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단순한 모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이 복잡성에서 도망쳐선 안 된다. 바로 이 미묘한 차이와 복잡성 속에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6][17]
 

자신의 주장을 흔들어 보자.


이제 우리가 진실을 추구하고, 탄탄한 사고 체계를 갖추고, 확률적 사고를 시작했다면, 다음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편향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 편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자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을 찾는 것이 유일한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했다. 자신의 주장을 앞뒤로 흔들어 보는 것이다.[18]

예를 들어, 당신이 ‘염소는 지각이 있는 존재다’라고 믿고 있다면, 염소가 지각이 없다는 주장을 위해 가장 강력한 논리를 찾아 그것을 진심으로 옹호해 보는 것이다. 즉, 그 반대 입장을 최대한 정교하게 다듬은 뒤 반박해 보는 방법이다. 이를 ‘스틸맨(강철 인간 만들기, steelman)’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면 실제로 자신의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 그렇게 뒤바뀐 입장을 다시 한 번 정반대로 스틸맨 해본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한다. 마치 스프링이 가진 잠재력을 다 소진할 때까지 흔들리듯, 그 끝에서 비로소 철저하게 검증된 하나의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진실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내 견해와 반대되는 상대방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향상된다. 그들의 사고 과정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도, 당신 자신의 주장도 어디에서 설득력을 잃는지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무쪼록, 이 이야기가 잘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는 친구가 있다면, 내가 문제 삼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왜 그것을 믿느냐라는 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입장은 정당하고 섬세한 이유로 지지될 수 있지만, 정작 내가 듣게 되는 건 늘 허술하고 부족주의적인 주장뿐이다.

혹시 친구가 아니더라도 이 글에 공감했다면, 언제든 연락해 달라. 솔직히 말하면, 지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우주 암석 위에 사는 원숭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회색빛이다. 당신도 동의한다면, 여기 내 트위터(x.com), 링크드인을 클릭해 달라.
[1]
나는 스스로를 정치에 ‘적당히’ 관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사고력에는 조금 더 관심이 있다. 다만 형식적인 관점보다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2]
이를테면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 같은 것이다. 윤리학과 도덕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생각 실험(thought experiment) 중 하나로, 사람이 도덕적으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전차(trolley)가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그 앞에는 다섯 명이 묶여 있습니다. 당신은 선로를 전환시킬 수 있는 레버 앞에 서 있습니다. 레버를 당기면 전차는 다른 선로로 옮겨가지만, 그곳에는 한 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당신은 레버를 당길 것인가요?”

전형적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의무론(deontology)의 충돌을 보여 준다.
[3]
보통 이런 능력은 사업이나 깊이 있는 학문적 경험을 통해 생기지만, 그런 경험 없이도 이 능력을 갖춘 친구들을 보며 놀랄 때가 있었다.
[4]
어떤 독자는 “그럼 너의 부족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주의에 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속할 부족 자체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미국인에 가깝지만 민족적으로는 인도인이라, 세상 어디에서도 완전히 소속될 수 있는 곳이 없다. 인도에서는 미국인으로, 미국에서는 인도인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이처럼 뿌리내릴 부족이 없다는 사실이 나의 관점에 영향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5]
폴 그레이엄의 〈두 가지 중도(The Two Kinds of Moderate)〉에 나오는 또 다른 문장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다.
[6]
이에 대한 내 이론 중 하나는 비판적 사고의 훈련 부족이다. 나이가 들면서 직업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거나 업계를 자주 바꾸지 않는 이상, 많은 일들은 그저 패턴 반복에 불과해진다. 또 다른 설명은 내가 나중에 다룬 공동체/정체성의 역할이다.
[7]
사람들이 부족주의를 고수하는 이유에는 지위 경쟁(status game) 같은 것도 있지만, 이것 역시 공동체와 정체성이라는 더 근본적인 원인의 파생형처럼 보인다.
[8]
흥미롭게도, 정치적으로 부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대개 스포츠 팬이기도 하다. 이 역시 부족주의를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9]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믿음을 선택하는 것은 무지를 하나의 가치로 삼는 일이라는 점이다. 나는 그 심리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10]
내가 가장 기뻐하는 일 중 하나는 총명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 실제로는 틀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때, 그 기쁨은 배가된다. 진심으로 말하지만, 누군가가 내 핵심 신념 중 하나가 틀렸음을 증명해 준다면, 그 주간을 통째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
[11]
물론 나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정말로 올바른 설명을 해줄 경우, 보통 그들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갖추고 있다. 내 주장을 이해하고 있고, 순환 논리나 수사적 기교 없이 선의로 반박하며, 내 논점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12]
나는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편향을 감지할 능력이 부족해서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이 그런 사람들에게 배움의 동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그런 사람들을 수많은 부족주의자들 속에서 구별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13]
일반적으로 나는 글쓰기가 말로 하는 토론보다 훨씬 더 지적으로 정직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두 토론자가 모두 고도의 능력을 갖추고, 정직한 논쟁을 의도적으로 수행하려는 경우가 아니라면, 구두 토론은 곧잘 ‘그사람이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식의 기록 없는 감정 싸움과 논리 오류로 전락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공한다. 아이디어를 온전히 펼쳐 쓸 수 있고, 방해받지 않으며, 다시 인용하거나 곱씹을 수 있는 형식이다. 사실 글쓰기는 가스라이팅과 이념 투사의 천적이며,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최후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14]
나는 23살 때 베이 에리어에 지쳐 일을 그만두고 호주행 편도 티켓을 샀다.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다시 돌아왔고, 또 한 번 샌디에이고에서 일자리를 선택함으로써 다시금 베이를 떠나려 했다.
[15]
참고로 이건 어떤 책 제목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일 뿐이다.
[16]
나는 모두가 포커를 일정 수준까지 배워 보기를 권하고 싶다. 확률을 할당하는 사고 방식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체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족주의자들은 흔히 절대적인 표현을 쓴다. “쟤는 100퍼센트 망할 거야”, “그녀는 악해서 저러는 거야”, “부동산은 항상 오른다” 같은 식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말에 돈을 걸지는 않는다.
[17]
많은 사람들은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을 펼친다. 나는 이에 강하게 반대한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객관적 진실에 기반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살아 있는 이유도, 조상들이 객관적 진실을 찾아내 음식을 구하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는 매우 편향된 정보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어떤 행동이 있었고, 어떤 의도가 있었으며 비록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규명할 수 없더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확률적 추론을 통해 접근하려는 태도가 ‘모두가 옳다’ 혹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쪽을 고르면 된다’는 식의 태도보다 훨씬 더 정직한 자세다.
[18]
이 방법은 내가 스포츠에서 실수를 고치는 가장 좋아하는 방식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하게 반대 방향으로 교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골프 스윙이 왼쪽으로 너무 치우친다면, 일부러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시도해 보는 식이다. 그다음엔 그 둘 사이에서 조율해 나가면 된다. 내 경험상 이 방식은 사고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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