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혁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
게이츠는 기후 문제 해결의 열쇠로 기술 혁신을 제시합니다. “향후 10년 안에 값싼 무탄소 기술들이 대거 상용화될 수 있는데, 이 기술이 인류의 번영을 지속시킬 것”이라는 낙관론입니다. 실제로 지난 10~20년간 태양광·풍력 에너지 가격이 급락하고 전기차가 보급되는 등 기술 진보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이츠의 주장은 기술만 있으면 된다는, 일종의 기술 만능주의에 치우쳐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기술 개발보다 보급이 더 어렵습니다. 기술 개발은 실험실에서 이뤄질 수 있지만, 그 기술을 보급하려면 제도와 구조를 바꾸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니까요. 기술 혁신과 그 기술의 사회적 확산은 별개의 도전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제시한 2050 넷제로 시나리오에 따르면, 현재 상용화된 기술을 총동원해도 2050년 탄소 감축 목표의 65퍼센트밖에 달성하지 못합니다. 나머지 35퍼센트 감축은 아직 개발 단계에 있어 상업적 규모로 시장에 출시되지 않은 기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예컨대 탄소 포집 및 저장, 그린 수소, 차세대 원전, 무탄소 시멘트, 합성 연료 등은 하나같이 비용이 너무 높거나 규제 장벽, 사회적 수용성 문제 등에 막혀 있습니다. 기술은 나왔지만, 경제성이 없거나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아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기술 혁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사회의 의도적 지원 없이는 시기 내 상용화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청정 에너지 혁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딘 여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태양광 발전 효과는 1830년대 후반에 이미 발견되었지만, 최초의 태양광 전지 시제품은 50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기술 발전은 1950년대 이르러 가속화되었고요. 그리고 마침내 2015년이 되어서야 전 세계 전력 생산량의 1퍼센트에
도달했습니다.
결국 청정 에너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높이려면,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연구 개발 및 실증 사업 투자가 추가로 이뤄져야 합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기업에만 맡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투자금이 회수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자금을 국가가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정책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근거 혹은 동력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과 시급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겠죠. 그런데 게이츠의 주장은 이 심각성과 시급성을 과소평가합니다.
게이츠가 즐겨 쓰는 개념인 ‘그린 프리미엄(친환경 기술에 들어가는 추가 비용) 제로’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재생 에너지나 전기차가 지금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까지, 세계 각국의 정책 개입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재생 에너지 발전차액지원제도(FIT)와 엄청난 보조금, 송전망 투자, 탄소 배출권 거래제 등을 결합해, 태양광·풍력 산업의 성장을 의도적으로
견인했습니다.
그 덕분에 생산 규모가 확대되었고 학습 곡선 효과로 단가가 급락했습니다. 미국 역시 2022년 바이든 정부 때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향후 10년간 3690억 달러에 이르는 기후 기술 보조금을 풀기로 했었습니다. 경제성이 낮았던 그린 수소 같은 친환경 연료가 세액 공제 지원에 힘입어 화석 연료와 가격 격차를 빠르게 좁혔죠. “IRA의 보조금이 여러 청정 기술의 경제성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는 프린스턴대의 분석도
있습니다.
즉, 혁신 기술의 확산은 시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정책의 지렛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게이츠가 그리는 깨끗한 기술의 미래 역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올바른 정책 설계와 제도적 혁신이 따라줘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정책의 지렛대를 움직이는 힘은 지구 기온 상승을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인식과 국제 사회의 공감대입니다. 기후 위기를 후순위로 미뤄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구조적 문제도 살펴봐야 합니다. 신기술이 나와도 기존 인프라와 시장 구조를 바꾸는 데에는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게이츠가 꽂혀 있는 차세대 원자로가 상용화된다 해도, 이 시설을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와 산업 현장에 배치하려면 입지 허가부터 주민 수용성, 안전 규제 등 풀어야 할 사회적·정치적 과제가 많습니다. 전기차를 더 늘리려면 충전 인프라 구축과 전력망 강화가 병행되어야 하고요. 또한 기술 보급 초기에는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부 보조와 민간 금융의 역할도 필요합니다.
요악하면, 기술은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도 혁신, 자금 동원, 사회적 합의라는 구조적 병목을 함께 해결해야 비로소 기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게이츠의 낙관론이 놓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