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크션랩 조의준 CEO - 트럼프의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온다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온다
생크션랩 조의준 CEO


트럼프 2기의 정책 방향을 분석하는 책과 기사, 논평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드물다. 조의준은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2016년 1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트럼프 1기의 처음과 끝을 워싱턴에서 지켜봤다. “트럼프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라”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조언을 듣고 트럼프의 말폭탄 뒤에 숨겨진 미국의 새로운 패권 전략을 들여다봤다. 그 속에는 제재와 수출 통제를 통해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미국이 있었다. 《제재 전쟁: 트럼프의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온다》의 저자이자 생크션랩(SanctionLab) CEO인 조의준을 인터뷰했다.
트럼프 2기에 ‘제재 전쟁’이 한층 강력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 제재와 수출 통제로 바뀌었다. 초강대국 미국이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피 흘리지 않는 전쟁, 바로 제재다. 2016년 트럼프 1기의 등장 역시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트럼프는 미국의 군사 개입을 줄이고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통해 자원과 인력을 국내에 집중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8년간 2350건의 제재를 했는데, 트럼프 1기는 4년간 3900건의 제재를 했다. 그런데 바이든 행정부도 6000건이 넘는 제재를 했다. 정권을 떠나 제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트럼프 2기에서는 제재라는 거대한 조류가 더 빨라질 것이다.

미국이 군사적 충돌을 피하게 된 이유가 뭔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끊임없이 전쟁을 이어 왔다. 이 전쟁들은 막대한 경제적 비용과 인명 피해를 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군사 작전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1년)의 총비용은 2조 3000억 달러에 달한다. 끝없이 들어가는 비용과 미국인들의 전쟁 피로감은 미국이 군사적 개입 대신 경제 제재와 같은 외교적 수단으로 정책을 전환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셰일 오일의 발견으로 미국은 에너지 독립국이 되면서 해외에 의존할 이유도 사실상 사라졌다.

제재라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국제기구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 아닌가?

2000년대까지는 그랬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독자 제재는 쿠바와 중남미 마약 카르텔에 국한됐다. 안보리 제재를 보완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나면서 상황이 크게 변했다. 일단 안보리 체제가 무너졌다. 중국과 러시아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상임 이사국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간의 이견 조율이 어려워졌다. 상임 이사국은 안보리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갖고 있다. 5개국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보리에서 결의를 채택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안보리가 제재를 하려 해도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제재 범위와 수위가 악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안보리의 기능을 사실상 정지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안보리가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상정했는데, 상임 이사국인 러시아가 셀프 거부권을 행사해 부결됐다. 이제 안보리를 통한 국제 사회의 단합된 제재는 20세기의 추억으로 남게 됐다.

미국의 독자 제재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

미국은 제재를 위해 주로 네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바로 1차 제재, 2차 제재, 수출 통제, 금융 제재다. 1차 제재는 미국 시민, 미국 내 거주자, 미국 법인에 적용되는 제재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게 특정 국가, 인물, 단체와의 거래를 금지한다. 2차 제재는 외국인 또는 외국 법인이 제재 대상 국가, 인물과 거래할 때 처벌하는 것이다. 수출 통제는 미국산 물품 또는 미국 기술이 포함된 제품이 제재 대상국에 수출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금융 제재는 제재 대상 국가나 개인, 기업을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서 퇴출하는 것이다. 이 모든 제재는 서로 연결돼 있다.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지만, 외국인의 거래까지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나?

미국이 글로벌 제재를 시행할 수 있는 근거는 ‘미국인’의 개념이 전 세계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제재 규정에서 말하는 ‘미국인’은 단순히 미국 시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과 경제적, 법적으로 연결되는 모든 사람과 기업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한국 회사가 미국에서 만든 기술을 이용해 뭔가를 만든다면, 그것이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도 미국의 수출 통제 규정을 따라야 한다. 또 한국인이라도 미국 달러로 거래하면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달러가 사용되면 미국의 관할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제재 대상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

예를 들어 미국 정부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회사를 제재 대상에 올리고, 이 회사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달러 거래를 막아 버릴 수 있다. 달러 거래가 막히면 사실상 수출입이 불가능해져 회사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거래는 중국의 국내법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 법을 적용해 ‘달러’를 무기로 삼아 교역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제재가 강력한 건 알겠는데, 이란과 북한 같은 극소수의 국가에나 적용되는 것 아닌가?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들보다 3배 많은 제재를 가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제재 대상이 있는 국가가 전 세계 3분의 1에 달한다. 제재가 폭증하면서 워싱턴에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제재 산업’까지 생겨났다. 외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은 제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고, 로펌과 로비 업체들은 제재 담당 정부 관리들을 속속 고용하고 있다.
《제재 전쟁: 트럼프의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온다》는 트럼프 시대에 더 치열해질 글로벌 제재 전쟁의 다양한 전선을 분석하고 기업의 대응 방안을 제시한다.

제재를 남용해 공급망을 옥죄는 것은 미국에도 문제가 될 것 같은데.

과거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서라도 중동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은 원유를 생산하고, 천연가스는 너무 많이 나와서 불태우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미국은 나 홀로 있어도 부족하지 않은 국가가 됐다. 여기에 AI와 바이오 등에서 후발 주자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제재와 수출 통제는 미국 입장에서 최상의 선택이다. 미국의 수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고부가 가치 상품이 대부분이라 제재 대상 국가로 직접 수출되는 경우는 적다. 또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수입국이라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진영이 충돌하고 있다. 전 세계가 미국과 서방, 중국과 러시아로 쪼개지며 블록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제재와 수출 통제만으로 국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나?

미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달러’다. 세계 무역에서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40~50퍼센트에 달한다. 나머지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유로화 결제도 미국 금융망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미국이 가운데서 돈줄을 잡고 있으면 누구도 마음대로 거래할 수 없다. 미국은 자기 피를 흘리지 않고도 상대를 말려 죽이는 전법을 쓸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텐데.

서방이 전방위 압박을 가하자 중국과 러시아는 물물 교환 방식의 무역도 검토하고 있다. 금융 기관을 이용하면서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국경에서의 물물 교환을 통한 물자 공급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전략이다. 2021년에는 한 중국 기업이 200만 달러 상당의 자동차 전기 부품을 이란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피스타치오를 받기도 했다. 또한 중국 역시 제재를 외교 정책 수단으로 활용한다. 반외국제재법을 제정해 중국을 제재하는 국가에 보복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적으로 명확히 했다. 러시아는 금융 거래가 막히니까 달러와 유로 현금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또 법까지 만들어 암호화폐를 장려하고 있다.

책에서 제재 전쟁에 유럽까지 참전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1기부터 본격화한 제재 전쟁에서 유럽은 한 발 떨어져 지켜보는 쪽이었다. 유럽의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과 날을 세워서 좋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 구도를 180도 바꿔 놓았다. 이제 유럽은 미국보다 적극적으로 제재 위반을 단속하고 있고, 러시아에 물품 대부분을 공급하는 중국과도 확실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동안 경제적 이익 뒤에 숨겨져 있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체제 사이에 갈등이 격화하면서 경제를 넘어선 가치의 싸움으로 확장된 것이다. 유럽 27개국에서 2022년 2월 이후부터 현재까지 제재 관련 수사가 3800건이 이뤄졌다. 이 수치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집계한 것이라 실제 수사 건수는 훨씬 많을 수 있다.

‘글로벌 제재 전쟁’ 속에서도 한국에서는 아직 제재 관련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

한국이 조용한 것은 제재 위반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제대로 이슈가 되지 않고 있어서다. 제재 대상과의 거래로 계좌가 동결되거나 물품 대금을 못 받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외교관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제재를 받을 뻔한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동맹’을 고려해 미국이 ‘봐준’ 경우도 많았다. 한국 정부와 여론은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이 줄타기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줄타기를 통한 이익 극대화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아닌 척’, ‘모르는 척’, ‘순진한 척’하는 전략이 언제까지 작동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방금 얘기한 대로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기 때문에 계속 ‘봐줄’ 수도 있지 않나?

미국은 의혹이 있어도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압류와 제재 카드를 꺼내는 전략을 구사한다. 제재 위반 공소 시효를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한 이유도 시간을 미국의 편으로 두고 기업과 외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한 미국 관료는 나에게 “제재 리스트는 언제나 우리 손에 있다. 이걸 언제 어떻게 쓰느냐는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자국의 글로벌 전략에 따라 동맹국에도 제재라는 채찍을 들 수 있다. 만약 한미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상황이 생기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 기업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이 실제로 제재를 받은 사례가 있나?

올해 2월에 미국 상무부가 경남 김해의 대성국제무역을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이 업체는 2023년부터 2024년까지 군사용 무기 제조에 쓰일 수 있는 ‘금속 가공 CNC 밀링 머신’을 조립되지 않은 상태로 5차례에 걸쳐 러시아로 수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업체가 제재당한 것은 한국에 대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미국은 제재하기 전에 대성국제무역 측에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본인들의 정보만을 가지고 전격적으로 제재한 것이다.

한국의 줄타기에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 신호로 읽힌다.

국제 정세나 미국과 유럽의 정서가 한국을 계속 봐줄 수는 없게 만들고 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은 지난 10월에 텍사스주에 있는 퍼스트콜 인터내셔널(First Call International)에 44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수출 문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군용 부품을 허가 없이 한국과 말레이시아에 수출한 혐의다. 퍼스트콜은 2019년 7월에 한국 내 헬리콥터 정비 시설에 한국 해군의 헬리콥터 부품인 1603달러짜리 브라켓 1개를 발송했다. 미국은 우방국인 한국에 200만 원짜리 헬리콥터 부품을 하나 보냈다고 자국 기업을 제재한 것이다.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도 한국에 수출 통제와 관련한 경고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미 관계가 틀어지면 언제든 제재의 칼날이 한국을 겨냥할 수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제재 전쟁에 충분히 대비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재 전쟁》을 집필한 이유다. 미국의 규정은 점점 더 빡빡해지고 보이지 않는 무역 장벽은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반도체 수출이 잘되느냐 마느냐, 자동차 수출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느냐 마느냐 숫자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워싱턴 특파원을 할 때부터 7년간 틈틈이 모은 제재 관련 자료를 정리하니 2000페이지가 넘었다. 미 백악관과 법무부, 재무부 등의 자료와 제재와 컴플라이언스 관련한 전문 매체 정보도 긁어모았다. 책을 쓰기 위해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몇 달을 매달렸다. 이 책에 있는 사례들은 반도체와 중국 부분을 제외하곤 한국에 거의 보도되지 않은 사례들이다.

이 책을 어떤 독자에게 추천하나?

기업인만큼이나 공무원들이 많이 읽어 주면 좋겠다. ‘제재 전쟁’ 시대엔 협상력 있고 뛰어난 공무원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엘리트 공무원들이 미국, 중국과 치열하게 밀고 당긴 협상의 ‘한 줄’이 국내 산업을 살리고 죽이는 결정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공무원들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재 전쟁 시대에 살아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연대 에디터

* 2024년 11월 19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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