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은 실제로 미국 햄버거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서, 미국에 대외 무역부 장관을 보내 현지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미코얀(Mikoyan) 커틀릿은 수십 년 동안 소련 사람들의 주식이 됐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의 고기를 빼앗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거나 “우리들의 총을 빼앗고 있다”는 등의 구호와 비슷하다. 개인의 권리가 외부의 힘에 위협받고 타고난 권리가 공격받고 있다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Ted Cruz)는 (부당하게) 자신의 민주당 경쟁자인 베토 오로크(Beto O’Rourke)가 (부당하게) 상원 의원직을 차지하면 텍사스 바비큐를 금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고발했다. 고기는 마치 개인의 총기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압력으로부터 얻어 낸 것, 진보주의의 공세에 저항하는 이들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남성 권리 옹호자인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의 식단은 소고기와 소금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패스트푸드와 케첩을 곁들인 웰던 스테이크를 즐겨 먹기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비트코인 육식 동물(Bitcoin carnivores)’이라고 부르는 자유주의 암호 화폐 마니아들이 구성한 소그룹도 있다.
인터넷 시대에 육류 소비는 눈에 띄게 보수적인 알파-남성성과 연결되어 있다. 게티스 라그즈딘스는 날고기를 먹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기 전에 인종 차별주의 이데올로기와 일루미나티(illuminatus)
[4]에 기반한 우익 음모를 퍼뜨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온라인상에서 대안 우파
[5]와 연계된 집단들은 소위 ‘사회 정의의 전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정력 부족을 의미하는 ‘컥(cuck,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라는 속어)’, ‘베타(beta)’와 함께 ‘소이 보이(soy boy, 여자 같은 남자를 뜻하는 속어)’라는 경멸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이런 현실은 전통적인 성 가치를 지키려는 우파 성향의 응답자들이 칠면조보다 두부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체제 전복적인 위험인물이라고 보고, 이들을 조롱해도 된다고 여긴다는 맥기니스와 허드슨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음식과 관련된 욕설에는 양면성이 있다. 영국에서, ‘개몬(gammon, 돼지 뒷다리 살이나 옆구리 살을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한 것을 뜻하는 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이라는 용어는 분노한 중년 영국인들의 암갈색 피부 톤에서 영감을 받은 경멸적인 표현으로서 2010년대 초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음식은 항상 개인의 정체성에 묶여 있었고, 따라서 정치와 분리될 수 없었다. 음식과 관련된 용어의 어원을 보면 ‘식사(diet, 그리스어로는 삶의 방식)’와 ‘정권(regime, 라틴어로는 규칙)’과 같은 용어는 삶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한 투쟁을 함의한다. 해롭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식단에서 강박적으로 제외하느라 고통받는 건강 유해 식품 기피증 환자의 사고방식은 ‘올바른(correct)’ 먹기에 대한 왜곡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식습관이 상징하는 사람들의 결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식습관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브리야사바랭(Brillat-Savarin,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먹을지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것과 같다.
비건에 대한 대화는 훨씬 더 큰 담론을 내포하고 있다. 비거니즘을 말하는 것은 환경적,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텍사스 바비큐, 일요일 만찬용 구이 요리, 소시지 롤과 같은 전통을 말살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음식을 선택하는 과정이 스스로와 주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오래전부터 해온 고민도 거론해야 한다. 플렉시테리언과 같은 개념이 나오면서 비거니즘의 인기가 커진 만큼 비거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연간 1인당 동물 제품 소비량이 정확히 제로인 세계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과열 양상을 보이는지 알 것도 같다.
육식에 등을 돌리는 것은 돼지고기를 끊고 퀀을 대신 먹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우리 안에 고착화된 가치를 뒤집는 일이다.
음식은 우리의 불안을 자극하는 강력한 통로다. 반세기 전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중국 음식에 흔히 쓰이는 글루탐산소다(혹은 MSG)가 두통, 발한, 심장 두근거림 등의 증상을 보이는 신규 질환과 연관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향미 증진 첨가제는 악으로 취급되면서 미국의 일부 도시에서 금지되기도 했다. MSG의 부정적인 영향을 반증하는 여러 연구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식당 증후군’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MSG는 이제 아시아권 이외의 요리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요리사들만 MSG 사용을 정당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음식과 관련된 도시 괴담을 뒤집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주는 사례다. MSG 괴담이 확산된 배경에 인종 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괴담을 유포한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새로운 사상이 인기를 얻으면서 생긴 두려움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육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이 스테이크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은 반드시 불안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불안 중 최고는 그렉스의 퀀 소시지 롤과 같은 비건 요리가 대안이 아니라 대체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종교와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예외 상황을 제외하고 육류는 전 세계 문화에서 최고의 지위를 유지했다. 육류가 항상 야채보다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생긴 지위였다.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에는 작은 동물도 잡기 어려웠다. 도망치는 동물을 잡다가 상처라도 입으면 치명적이었다. 사회 계층이 형성된 이후로는 고기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능력보다 높은 지위를 보여 주는 징표는 없었다. 2016년에 출판된 마르타 자라스카(Marta Zaraska)의 저서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Meathooked)》에서는 파라오가 사후 세계를 위해 방부 처리된 소고기 및 가금류 바구니인 ‘고기 미라’와 나란히 매장되어 있는 이집트 무덤을 발견한 기록이 나온다. 육류를 향한 인류의 집착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향후 10년 동안 개발 도상국의 육류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단백질의 주공급원인 고기는 가장 큰 열망의 대상이며 번영의 확실한 증거로 남아 있다.
캐롤 애덤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육식으로 인한 도덕적 문제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우리는 소가 아니라 소고기를 먹고, 돼지가 아닌 돼지고기를 먹는다. 하지만 양배추는 일생 어떤 형태이든 양배추로 불린다. 우리는 언어로 채소의 가치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고기의 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근육질의 힘센 사람들을 ‘비피(beefy, 우람함)’라고 부르면서 게으른 사람들은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es, 소파에 앉아 TV만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라고 하고, 반응이 없는 조용한 사람들은 ‘베지터블(vegetables, 단조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육식에 등을 돌리는 것은 돼지고기를 끊고 퀀을 대신 먹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우리 안에 고착화된 가치를 뒤집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이동은 이미 진행 중인 듯하다. 영국 대학에 음식을 공급하는 기업 투코(Tuco)는 최근에 수많은 구내식당에서 육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보고하면서, 비건이나 채식주의 식단이 학생과 직원들 사이에서 ‘메가 트렌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시내 중심가에서도 비건 식품은 잠깐의 기회를 틈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늘고 있다. 그렉스의 비건 소시지 롤이 성공하자 테스코는 수요에 발맞추기 위해 식물성 제품의 범위를 거의 50퍼센트까지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건 식품의 판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1조 7000억 달러(2038조 원) 규모를 자랑하는 전 세계 육류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문화의 변화는 정부, 산업 및 과학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목격했듯, 변화는 싸움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갈등은 불행에 가깝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절제하면서 정서적으로 플렉시테리언을 지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건을 둘러싼 가장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온라인에서는 타협점을 찾을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 인터넷은 사람들을 격앙시키고 양극화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목소리를 낼 유일한 방법은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우리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련의 증거는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여름 유엔 보고서는 기후 위기를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드는 주요인으로 삼림 파괴와 소를 비롯한 집약적인 축산업에서 나오는 배출물을 꼽았다.
비건 나우(Vegan Now) 캠페인 출범 당시, 영국 왕실 변호사 마이클 맨스필드(Michael Mansfield)가 육식 행위를 불법화할 것을 주장한 연설처럼 일부에서는 긴급 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육류 소비를 ‘흡연’에 빗대어 육류(특히 붉은 고기)가 새로운 담배가 되면, 육류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다수의 인식 아래 소수의 사람만이 즐기는 나쁜 버릇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맨스필드는 ‘에코사이드(ecocide, 자연환경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행위)’를 반인륜 범죄로 분류하면서 논쟁을 새로운 틀에서 다뤘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현실은 벼랑 끝이고 식물성 식단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안전한 길로 돌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건과의 전쟁은 유해한 삶의 방식을 지키려고 싸우는 불운한 다수의 행동이다. 비건들은 시끄럽고 성가시고 고결한 척하며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건의 확산세가 일정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그렇게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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