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1화

프롤로그; 오셔서, 경청하고, 즐기세요

정치는 친해지기 쉬운 단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는 나와 상관없는 일, 정치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정치를 돈이 있고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이권을 챙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정치적인 사람’, ‘사내 정치’ 같은 표현에서도 나타나듯, 정치는 실력으로 승부하지 않는 야비한 술책쯤으로 해석되곤 한다.

스웨덴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접하는 낯선 풍경이 있다. 바로 TV에서 정치 토론이 나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채널을 돌려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치적 관심이 생길 리 없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할 때 한 표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할까 싶다.

북유럽의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북유럽에서 정치는 일상의 토론이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여당과 야당 정치인들이 방송에 나와 토론을 한다. 거의 매일같이 TV 뉴스에서 장관과 야당 대표, 원내 대표, 의원들이 짝을 지어 상반된 입장을 이야기한다. 논쟁은 대개 답이 없다. 그렇다고 토론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토론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도록,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토론 방식은 특별할 것이 없다. 서로의 입장과 원칙, 그리고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되면 끝낸다. 논쟁은 치열하다. 사회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열띤 토론을 이끈다. 하지만 토론자들은 열을 올리거나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토론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더라도 정치인은 수시로 미디어를 통해 국민과 소통한다. 큰 사고가 발생하거나 문제가 있으면 바로 그날 저녁 관련 부처 장관이 뉴스에 나와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히 오해가 줄고 정치에 관심이 생긴다. 국민은 정부의 입장과 생각을 기다리는 시간이 짧을수록 정부를 신뢰한다. 책임 있는 사람이 직접 나와 설명하니 소설 같은 예측 기사를 읽을 필요가 없다. 루머가 확대·재생산되는 일은 아예 없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정부의 최고 정책 담당자가 국민 앞에 나와 설명하는 경우가 드물다. 방송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도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정책에 대한 식견이 모자란 것인지, 정책 자체가 국민에게 해를 줄 만한 것인지, TV에서 책임 있는 담당자의 정책 이야기를 듣기가 어렵다.

스웨덴에서 정치의 일상화는 TV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18년 3월 스웨덴 최대 일간지 《DN》은 열흘 동안 모든 정당의 대표들을 중앙역 광장에 매일 1시간씩 데려다 놓고 정치 현안에 대해 매서운 질문을 던졌다. 여행객들은 기차에 오르기 전에 정당 대표가 설명하는 국가 현안에 귀를 기울였다. 이 행사는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고, 다음 날엔 신문 지면을 통해 보도되었다.

주요 일간 신문의 토론 코너에는 각 정당의 대표, 정책 책임자, 이익 단체, 연구 기관 등 다양한 정책 생산자들이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 각자의 입장과 정책 개선 방향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한번 논의 대상이 되면 반박하는 글이 잇따라 나온다.

스웨덴 공영 라디오는 아침 뉴스 시간에 장관들과 야당 정책 담당자들의 토론을 수시로 방송한다. 아침 뉴스를 들으며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전날 저녁 TV로 보지 못한 내용을 라디오로 듣는다.

이렇게 TV, 신문, 라디오는 정치인들을 수시로 불러낸다. 정치에 관심이 없어도 눈길을 돌리고 발길을 옮기다 보면 내 눈 앞에 정치인이 서 있다. 그러다 보니 별도의 시사 프로그램이 필요 없을 정도다.

정책을 더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정당의 다양한 모임에 가입한다. 예를 들어 청년들은 정당 소속의 청년회, 여성들은 여성회, 기독교인들은 기독교회, 연금생활자들은 퇴직자회에 가입해 정책을 공부할 수 있다. 모든 정당이 정치 학교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정책 심화 학습이 가능하다.

정치색이 뚜렷한 정당과 관계없이 순전히 정책만을 공부하고 싶을 때는 학습 동아리에 가입하면 된다. 노동자 학습 동아리(ABF), 자영업자 학습 동아리(Vuxenskolan),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학습 동아리(Medborgarskolan), 마약 퇴치 학습 동아리(MBV) 등 자발적 평생 교육 학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정책 토론 프로그램에 등록해 공부할 수 있다. 정치인뿐 아니라 사회 저명인사와의 만남이 수시로 열리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정책과 사회 현안을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다.

전문적인 정치 토론을 보고 싶다면 국회 방청석에서 대정부 질문, 정당 대표 토론 등을 골라서 보면 된다. 의회가 시내 중심가에 있어 접근성도 좋다. 의회 토론에서 정치인들이 호통을 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한 토론이 이어지기 때문에 다소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조금만 내용에 귀를 기울이면 금세 정책 토론의 재미에 빠지게 된다. 각 당 대표 정책 토론에서는 한 번씩 돌아가면서 정책을 방어하는 방식도 도입하고 있다. 정부와 야당이 함께 정책을 검증받는 것이다.

의회 자체가 정책 경연장이고 정책 토론장인 스웨덴에서 국회 대정부 질문과 정당 대표 정책 대결은 국민이 정책을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정치권의 정책 토론과 정책 생산 능력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책 토론이 활성화되어 있는 정치가 곧 국민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스웨덴의 선거 투표율은 85퍼센트 수준에 이른다. 1980년대까지는 90퍼센트의 투표율을 보였다. 최근 인구의 20퍼센트까지 늘어난 이민자들의 평균 투표율이 65퍼센트 수준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민자를 제외한 스웨덴 유권자들의 투표율에는 큰 변화가 없는 셈이다. 물론 의무 투표 제도는 아니다. 높은 투표율은 일상의 정치가 만든 결과다.

스웨덴에서 정치는 일상이고, 축제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알고 싶어 하는 분야인 동시에 가장 자주 접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스웨덴 국민이 정치를 얼마나 가깝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알메달렌 주간(Almedalsveckan·The Almedal Week)이다. 국회의원들이 여름 휴가철 고틀란드(Gotland)섬의 작은 마을 알메달렌에 모여서 국민과 직접 만나 정책을 소개한다. 정치인과 국민이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춤을 추면서 소통하는 축제이기도 하다. 2017년 알메달렌 조직 위원회의 구호는 “오셔서, 경청하고, 즐기세요”였다. 다양한 정책 이슈가 마치 박람회에 나온 전시 상품 같다는 의미에서 알메달렌 정책 박람회, 혹은 정치 박람회로 불린다. 일상에서 정치를 접하는 국민은 알메달렌에서 정책을 공부하고 정치를 배운다.

이방인인 나에게 알메달렌은 그저 하나의 연례 정치 행사로 보였다. 20년 이상 현지 대학의 강단에 있었지만 알메달렌을 정치인만의 축제로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스웨덴 사람들이 알메달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기에 온 국민이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알메달렌에 처음 참가한 2011년,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나의 고정관념은 산산조각이 되어 부서져 버렸다. 딱딱한 정치인들만의 축제로만 여겼던 그 행사에서 반바지와 민소매 차림의 시민들은 거리 세미나와 토론, 정치인과 만나는 카페 토론, 거리에 설치된 부스, 언론인과의 거리 토론 등 수많은 행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린 학생부터 연금생활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온 도시를 구석구석 걸어 다니며 뷔페식당에서 산해진미를 골라 먹는 것처럼 정책을 즐기고 있는 스웨덴 시민들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첫해의 충격은 이후 7년 동안 나를 알메달렌으로 이끌었다. 매년 한국에서 온 정치인, 교수, 지방 자치 단체장, 학생 들과 함께 체험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스웨덴 정치인, 전문가와 함께 토론하는 세미나도 직접 운영했다. 2016년에는 도로 한쪽에서 부스를 열고, 스웨덴 시민들을 만나며 스웨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지, 그리고 스웨덴의 복지 모델을 뒷받침하는 저력은 무엇인지 거리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1년부터 매년 알메달렌을 체험하고 배우면서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알메달렌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직접 체험한 행사를 스케치하는 형식으로 생생하게 풀어내려 한다. 이 책에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최근 5년간 알메달렌 현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세계 유일의 정책 박람회, 알메달렌은 이제 이웃 북유럽 국가들에까지 퍼져 나가 독특한 정치 행사로 자리 잡았다.

알메달렌은 정치도 축제로 승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행사다. 모두가 즐기면서 정치를 배우고, 정치인과 격의 없이 만날 수 있는 곳, 그리고 정치인들이 권위를 내려놓고 오로지 정책과 비전으로만 대결하는 신선한 정책 경쟁의 장이다. 그곳에서 국민은 정책을 배우고 정치를 배운다. 시민 교육과 평생 교육을 위한 21세기 판 그리스 아고라 정치인 셈이다.

우리나라 정치 발전을 위한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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