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위에서 열리는 양성 평등 세미나
알메달렌 항구에 정박해 있는 구축함으로 발길을 옮긴다. 국방부가 마련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스웨덴 국방부는 매년 칼스크로나(Carlskrona) 전함을 알메달렌에 보내 행사 기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테러에 대비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함정 일부 시설을 개방해 국방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함정 위에서 열리는 다양한 세미나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2017년에는 어떻게 하면 사회 각 분야에 더 많은 여성들이 진출할 수 있을지, 여성 롤모델의 존재가 여성 지도자 육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주제였다. 각 분야의 여성 지도자들이 세미나에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선상에 흰 텐트를 둘러치고 만든 세미나장에는 60여 명의 관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참석자들의 명단을 보니, 미카엘 비덴(Mikael Bydén) 군 참모총장, 에리카 스벤손(Erika Svensson) 중소기업 리더십 협회장, 아만다 룬데텍(Amanda Lundeteg) 올브라이트(AlBright) 여성 경영인 재단 이사장, 쉐스틴 룬데베리(Kerstin Lundeberg) 아카데미스카 후스(Akademiska Hus) 대학 캠퍼스 개발원장
[2], 한나 레이드홀트(Hanna Leidholdt) 스웨덴을 위한 교육 협의회 이사의 이름이 보인다.
국방부가 앞장서서 여성 지도자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한 전문가 토론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군대는 전통적으로 남성 지배적 세계가 아니던가. 그래서 군은 성 평등의 사각지대이기도 하다. 세미나에서는 여군의 인권 문제가 취약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사회자는 군이 능력 있는 여성 장교를 더 많이 필요로 하는데도 중도에 탈락하는 여성 지원자가 많다고 설명하면서, 여성 장교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유능한 인재로 길러 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알아보기 위한 세미나라고 전한다.
매년 상장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을 발표해 관심을 받고 있는 올브라이트 여성 경영인 재단의 룬데텍 이사장은 여성 지도자 비율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적 문화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여성 경제인들의 대기업 이사회 참여 비율, 여성 경영인들의 기업별, 산업별 임금 수준 및 근무 조건 등을 다루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올브라이트 재단의 결론은 남성 중심의 관행과 기존의 가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기득권과 맞서야 한다는 룬데텍 이사장은 당장의 불이익과 심리적 부담으로 충돌을 회피한다면 변화는 요원하다고 말한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가 하부에서 중간으로, 그리고 중간에서 최상위층으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중도 탈락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여성 이사, 여성 최고 경영자가 많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능력 있는 여성이 중도에 탈락하는 비율이 남성에 비해 높아서다. 여성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위층의 시스템을 아직도 남성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더불어 이 장벽을 깨려는 여성 스스로의 노력과 능력의 부재도 원인의 하나로 지적한다.
비덴 참모총장은 군대 내 성 소수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평등권의 기초 위에서 사병과 장교에게 인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소수자의 목소리와 요구 사항을 수시로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으면 군대는 인권 사각지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권 보호를 위해서는 최고 결정권자의 열린 자세가 중요하다면서 지도자층의 다양성 차원에서 여성 지도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자살, 총기 사고, 부대 이탈 등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별적 구조의 방치라는 원인이 있다. 걸출한 여성 장교들을 더 많이 배출해 군 내 성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튼튼하고 안전한 국방으로 이어진다는 비덴 참모총장의 말에 공감했다.
스웨덴은 전함이라는 특별한 세미나장에서, 가장 남성적 조직이라는 군대의 평등과 인권 문제를 논하는 나라다. 물론 성 평등 지수 면에서 세계 각국 가운데 가장 앞서 있다는 스웨덴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장벽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은 사회 복지와 가족 정책 지원 제도를 통해 많이 해소됐다. 무상 교육과 학업 수당을 통한 남녀 기회의 평등, 직장 민주화를 통한 임금 평준화, 경력의 단절과 육아로 인한 직장 내 차별의 해소, 노동 환경에 따른 건강 문제, 특히 산모와 중년 여성, 장애인 여성의 건강 문제 해결, 남녀 연금생활자의 연금 격차 해소 등이 복지와 가족 정책으로 인한 성과다.
그중에서도 정치 분야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스웨덴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45퍼센트 수준에 이른다. 지방 정치에서도 남녀 간 비율에 큰 차이가 없다. 내각의 장관직도 남녀가 반반씩 나눠 갖고 있다. 스웨덴 정치권의 남녀평등을 살피는 것은 경제계 등 다른 분야에 여전히 남아 있는 성차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우선 스웨덴에서는 정계에 진입하는 문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다. 여성 정치 지망생의 수가 남성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 지방 정치는 봉사직이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여가 시간을 활용해 정치를 택한다. 자녀의 교육, 학교 문제, 장바구니 경제, 탁아소, 노인 복지 등과 같은 생활 이슈에 비교적 관심도가 높은 여성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여성의 참여가 많다 보니 상임 위원 및 상임 위원장 선출에서도 남녀가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는다.
인재 수급 단계에서부터 능력 있는 여성이 많이 포함되고, 중간 관리자 수준에서도 많은 여성이 후보로 선택된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명부 역시 권역별 후보자를 당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구조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순위에 여성 후보가 많이 들어가고, 피라미드의 상층부로 올라가더라도 여성이 탈락하지 않는 이유다. 결국 최상위층에도 여성 인재가 넘친다. 여성 장관, 여성 당 대표가 쉽게 나올 수 있다. 권력은 자연스럽게 분점된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각 분야에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스럽게 성차별적 요소는 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핵심은 당원이 실질적 권한을 갖는 후보 공천과 투표 제도라 할 수 있다. 즉 정당 민주화다. 사회 전 분야에서 성별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분위기가 되기 위해서는 분야별 민주주의(democracy by sector)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는 각 분야의 민주화를 제대로 이뤄지게 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MeToo) 운동도 결국은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해 왔던 남성의 우월적 권력하에서 생존을 위해 고통을 감내했던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변화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수 있었다. 권위에 눌려, 상하관계의 구조 속 에서 밝혀지지 않은 고통스런 이야기가 여전히 많을 것이다.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 없이는 미투 운동의 확산이 쉽지 않다. 사회가 변해야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