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대표들의 스탠딩 코미디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저녁 7시. 알메달렌 주간의 꽃이라 불리는 정당 대표들의 노상 연설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오후 3시쯤 되면 알메달렌 호숫가의 무대 주변 잔디 위에 담요를 깔아 놓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 낮잠을 즐기는 사람, 책을 펼치고 독서하는 사람이 늘기 시작한다. 주변에는 정당 로고가 찍힌 책자를 나눠 주는 당 관계자들이 보인다. 어린이들을 위해 즉석에서 설탕 과자를 만들어 나눠 주고, 얼굴에 그림을 그려 주는 이벤트도 열린다. 연설장 주변에는 전국에 중계하는 TV 카메라가 설치되고 각지에서 온 기자들이 분주하게 현장 스케치를 하고 있다.
8개 정당의 대표들이 매일 한 차례씩 돌아가며 연설을 하는 이 행사는 1968년 여름 처음으로 알메달렌 간담회를 시작한 울로프 팔메가 화물 트럭 위에 올라가 연설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알메달렌의 연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연설과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복장이 자유롭다. 당 대표들의 의상은 휴가지에 어울리는 캐주얼한 옷차림이고 방청객들의 모습도 반바지, 반소매 셔츠 등 자유롭다. 청중의 모습 역시 각양각색이다. 누워서 연설을 듣는 사람,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연설 소리만 들으면서 음식을 먹는 사람,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산책하는 사람.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타난 사람들은 총리를 호위하는 경호원들뿐이다.
1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연설은 말이 연설이지 개그맨들의 스탠딩 코미디와 비슷하다. 이야기하듯 자연스러운 톤으로 재미와 웃음을 준다. 여름휴가를 시작하는 시점에 열리는 정당 대표 연설이기 때문에 상반기 의회의 논란거리를 정리하고, 하반기 정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형식이 없어 보이는 연설이지만 국내뿐 아니라 국제 이슈까지 모두 다루기 때문에 국민의 정치적 지식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8명의 연설을 모두 경청할 기회가 있었는데, 스웨덴과 유럽의 정치, 그리고 세계 현안이 각 당의 시각에서 명료하게 정리됐다. 스웨덴이 세계 속에서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지, 국내의 주요 갈등과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대안들을 제시해 준다.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이 메시지는 2014년 보수당 대표이자 총리였던 라인펠트의 연설 중 일부다. ‘아랍의 봄’
[1] 이후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온 정치 난민을 스웨덴 국민이 마음의 문을 열고 맞아 달라는 내용이다. 명료한 수사에 많은 방청객이 박수와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메시지는 극우파의 정치적 공세에 직면했다. 라인펠트가 스웨덴의 현실을 읽지 못하고 이상적인 주장을 폈다는 비판이 일었다. 스웨덴의 경제가 악화하는 가운데 외국인 이민자들이 스웨덴의 복지 예산을 축내고 있다고 반격한 극우 정당이 선거에서 지지율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 연설은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스웨덴 국민의 책임 의식을 보여 주는 대명사로 인용되고 있다.
이렇게 지난 50년 동안 이 자리에 섰던 각 당 대표들의 연설은 스웨덴 안팎에 각인되어 있다. 의회에서 하는 연설과는 달리 여름 휴가지의 분위기 그대로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정치인들의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정치인의 연설과 정책 토론도 내용과 재미가 적절하게 섞이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스웨덴의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정제된 수사법은 언어의 감칠맛을 돋우는 양념과도 같다. 함께 웃고 박수를 보내다 보면 정치는 더 이상 어렵거나 무미건조한 메시지가 아니다. 거리에서 쉽게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듯, 쉽게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게 되고 귀담아듣게 된다.
휴가지의 여름밤이라는 조건도 큰 역할을 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연설과 갑갑한 실내의 딱딱한 회의실에서 하는 연설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태도와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정치 연설은 어디에서, 어떤 형식으로 하는가에 따라 인기 TV 프로그램 못지않은 파급력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자유, 평등, 정의, 성장, 분배, 갈등, 타협, 전쟁, 평화, 법치, 책임성, 연대 의식…….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수많은 정치적 개념들을 고민한다. 때로는 불편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도 한다. 얼굴을 붉히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만큼 상대방의 가치도 중요하다. 모든 가치가 같은 기준으로 존중되어야 정치가 비로소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 된다. 정치는 약점을 파헤쳐 상대를 파멸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철학과 그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밝히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통치하는 행위다.
스웨덴 정당 대표들의 연설은 정치를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계속해서 터지는 박수 세례와 지지자들의 환호는 록 페스티벌의 뜨거운 열기와 다르지 않다.
정치적 갈등은 축제로서의 요소가 없는 정치 문화에서 창궐하는 질병과도 같다. 서로 상처를 내고 싸우면서 경쟁만 하는 정치는 국민이 정치를 혐오하게 만든다. 알메달렌에서 정치는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것, 편안한 것, 신나는 것, 배려하는 것이다.
춤추는 정치인들
카페에서는 요즘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스웨덴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사라 라손(Zara Larsson)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하루 종일 이어진 정당들의 정책 대결이 끝난 알메달렌의 골목들은 말 그대로 파티 분위기다. 골목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목청을 높여 야시장 같은 느낌도 난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DJ 바에서 들리는 강한 비트의 음악이 해안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공연장을 찾은 것처럼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알메달렌 주간의 수요일 밤 하이라이트, ‘정치인 댄스 배틀’이 열리는 곳이다. 낮에는 정책으로 경쟁했던 정치인들이 밤에는 댄스로 맞붙는다.
문화부 장관, 사회복지부 장관, 국토안전부 장관이 여당 쪽의 선수들이다. 야당 쪽에서는 전직 외교부 장관, 법무부 장관, 어린이노인복지부 장관이 출전 선수 명단에 올라 있다.
꽉 찬 1300석의 객석이 비트에 따라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떼창’을 하는 이 광경은 세계적 가수가 관객과 호흡하며 인기곡을 함께 부르는 콘서트 이상의 열기를 내뿜고 있다. 아비치(Avicii)라는 세계적 DJ를 배출한 나라답게 주최 측에서는 유명 DJ 세 명을 섭외했다.
누가 사민당 사람들을 재미없는 사람들이라 했던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당 사민당 대표인 사회복지부 장관은 몸에 달라붙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우아한 자태로 춤을 췄다. 그 옆에 있는 국토안전부 장관의 로봇 춤은 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댄스 배틀의 디바는 문화부 장관이었다. 알리세 바 쿤케(Alice Bah Kuhnke) 장관은 압도적인 춤 실력으로 1300명의 환호와 탄식을 이끌어 냈다.
매년 양쪽에서 출전하는 댄스 팀이 바뀌는데, 여당과 야당의 숨은 춤꾼들이 워낙 많아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정부의 전직 장관들이 한 번씩은 댄스 팀에 합류한다.
알메달렌은 서로 다른 생각과 접근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장이다. 논리와 레토릭으로 무장한 정치인들의 치열한 정책 대결은 국민의 선택을 돕는다. 하지만 이런 정치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정책을 알리기 위해 국민과 소통하듯 정치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 역시 정치인과 국민 사이의 벽을 부수는 효과적 소통 수단일 수 있다.
정치인들의 댄스 배틀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정치는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임이 분명한데, 스웨덴 사람들은 정치를 내가 생활하는 공간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댄스 배틀은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잠시 내려놓고 정치인과 함께 호흡하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정치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그런 상상과 비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지루한 논쟁의 과정에서 잠시 쉬어 가는 것도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많다는 스웨덴 정치인들도 춤추고 쉬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열심히 일하는 정치인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끼고, 가끔은 그들과 어울려 휴식하기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내가 꿈꾸는 세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