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메달렌 주간을 시작한 울로프 팔메 총리는 1985년 스톡홀름 시내에서 저격당했다. 이후 정부를 이어받아 정치적 공백 없이 위기를 극복해 낸 정치인, 잉바르 칼손(Ingvar Carlsson) 전 총리. 그는 지도자 부재의 국가 위난 상황에서 국민을 통합하고 사회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한 정치인으로 국민에게 각인되어 있다. 한국 정치의 오랜 과제인 국민 통합에 대한 해법을 듣기 위해 칼손 전 총리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일을 하면서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다. 정치 입문 계기가 궁금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보로스(Borås)라는 작은 섬유 산업 도시에서 자라서 공장 일자리가 많았다. 집 근처에 있는 모직 공장에 일자리를 얻어서 학교가 끝나면 하루 8시간씩 일했다. 중노동이었지만 노동의 가치와 보람, 그리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장학생이 되어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공장에서 일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정치적 동지들을 많이 만났다. 정치학을 공부했고, 지역 사민당 청년회에서 활동했다. 그때 타게 에르란데르(Tage Erlander) 당시 총리가 내가 청년회장으로 일했던 룬드 지역 청년회에 오셨다. 기차역에 가서 총리를 모시고 오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것이 내 운명을 바꿔 놓았다. 토론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드셨는지 스톡홀름으로 와서 정책 보조를 해보라고 제안하셨다. 한 학기 남은 공부를 마치고 올라가 총리 정책 보좌관으로 채용되었다.
총리에게 발탁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총리께서 젊은 보좌관을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룬드에 있는 내가 정책 능력과 리더십이 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우리 청년회에 오셔서 강연회를 연 것이었다. 기대에 벗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당 비서 같은 분들은 전국에 있는 지역 청년회 정책 세미나에 수시로 참여한다. 그래서 능력 있는 청년들을 쉽게 발굴할 수 있다.
팔메 전 총리를 에르란데르 총리의 개인 비서로 직접 발탁했다고 들었다.
총리 정책 보좌관으로 일하는데 손이 많이 모자랐다. 당시 정책 분석을 위한 보좌관이 필요했는데,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사민당 학생회를 이끌던 팔메가 유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개인적으로 당 관계 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전국 사민당 학생회 국제 담당관으로 유럽 학생회에 참여할 정도로 분석력, 친화력, 리더십이 뛰어났다.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 영어 실력도 훌륭했다. 총리께 추천을 했고, 총리께서 직접 만나신 후 바로 발탁하셨다.
팔메와 칼손은 에르란데르 총리를 보좌해 1960년대에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사민당이 승리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대학생회, 청년회를 이끌었던 두 사람은 청년 조직을 활성화해 젊은 표를 끌어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먼저 성공한 사람은 후임이었던 팔메였다.
1968년 에르란데르 총리 후임으로 팔메가 지명됐다.
팔메는 뛰어났다. 총리를 모시고 소련 모스크바에 갔을 때 독감에 걸려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던 총리를 대신해 30대 비서인 팔메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 앞에서 정책 브리핑을 했다. 총리를 대신해서 비서가 브리핑하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칼손은 팔메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주택부 장관, 환경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당대 최고의 사민당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팔메 전 총리가 1986년 저격을 당해 갑자기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당내 의견은 칼손을 후임으로 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당 비상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됐을 때, 부인과 상의를 해서 결정하겠다고 한 이유가 뭔가.
장관과 총리의 역할은 완전히 다르다. 장관에게는 퇴근 시간이 있지만 총리는 불규칙한 퇴근 정도가 아니라 개인 생활이 아예 없다. 외국 출타가 많아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가 많다. 총리 부인은 국내외 출장 시 함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었던 아내가 휴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정에서도 양육과 가사 노동을 나눠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총리가 되면 아내가 전담해야 했다. 아내의 동의 없이 총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혼당했을 거다.
1986년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 가장 시급한 과제가 평화적 노사 관계의 복원이었다. 노사 갈등 문제에 어떻게 접근했나.
무엇보다도 기업의 노조 불신이 가장 큰 문제였다. 노조의 양보를 얻어 친기업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유가 파동으로 물가 안정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파업 금지와 임금 동결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노동 생산성을 높여 기업이 수출 채산성을 맞출 수 있도록 친기업 정책을 폈다. 노조가 먼저 허리띠를 졸라매고 책임을 다하면 기업들도 본사를 다시 국내로 옮기지 않을까 하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노조가 반발했다. 대화를 좀 더 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선거에서 노동자들이 등을 돌렸다. 선거에서 패배해 정권을 우파 연합에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재정 위기가 왔고 복지 축소, 임금 동결, 파업 금지 같은 노동자의 반감을 살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우파 정권은 사민당에 동참을 요청했다. 국가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파 정권의 공동 구제안에 참여했다.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정신을 보였기 때문에 경제가 빠르게 회복될 여건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3년 후 선거에서 다시 사민당이 정권을 가져올 수 있었던 요인이다.
한국의 노사 화합을 위해 제언을 한다면.
한국의 정치와 경제 상황을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큰 문제를 앞에 놓고 만나면 절대로 타협을 보지 못한다. 작은 문제부터 정기적으로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정부는 너무 성급하게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안 된다. 양자가 해결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대화의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스웨덴에서 노사 갈등이 가장 심했던 1930년 중반 2년 동안 노사가 꾸준하게 정례 만남을 이어 간 결과가 바로 살트쉐바덴 협약Saltsjöbadsavtal[1]이다. 이 협약은 스웨덴 경제가 새롭게 비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살트쉐바덴 협약은 국가를 개조하는 새로운 기틀을 마련했다는 의미에서 ‘살트쉐바덴 정신’이라는 표현으로 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다. 한국의 살트쉐바덴 조약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