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메달렌 주간에 개최된 경제 포럼에서 레나트 에릭손(Lennart Erixon) 교수를 만났다. 에릭손 교수는 스톡홀름 대학 사회 연구소(SOFI)에서 월터 코르피(Walter Korpi), 요아킴 팔메(Joakim Palme) 교수와 함께 스웨덴의 복지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스웨덴 재정 모델의 독보적 전문가다. 에릭손 교수의 지적은 우리가 한국적 복지를 지향할 때 무엇을 고민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스웨덴 노동 모델은 전국 노동조합 총연맹 수석 경제 연구원이던 요스타 렌(Gösta Rehn)과 루돌프 마이드너(Rudolf Meidner)가 연대 임금제와 임노동 기금 등의 개념을 노동 운동에 이식시켜 완성했다. 이들의 연구는 연대 임금제라는 실천적 이론을 제시해 노동 운동의 방향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대 임금제에 기초를 둔 렌-마이드너 모델은 노동자 간의 평등, 임금 격차 줄이기를 통한 산업 생산성 제고와 기업의 매출 증가, 수출 증가, 고용 증가 효과를 골자로 한다. 이 모델은 산업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를 10년 동안 빠르게 좁혀 노동 갈등과 노사 갈등을 해소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결과적으로 1960~1970년대 스웨덴 경제에 날개를 달아 준 모델이었다. 동일 노동-동일 임금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도 렌과 마이드너다.
렌-마이드너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노조의 단합된 힘과 지원이 있었다. 노조 조직률이 이미 80퍼센트를 넘었던 전국 노총 지도부에서 반대를 했거나, 금속 노조와 전기 노조와 같은 고임금 노조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수출에 기반을 둔 볼보, 사브, 에릭손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2~3배에 달하는 높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임금 격차가 큰 노동 구조였다. 고임금 노동자들의 대승적 차원의 양보가 없었다면 이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성공 요인은 스웨덴만의 노사 협의 기구인 임금 단체 협상 구조가 1938년 살트쉐바덴 조약 이후 잘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국 노총이 일사불란하게 연대 임금제를 적용하자고 제안하니 대기업 측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스스로 임금 인상을 억제하겠다는데 싫어할 기업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중소기업이 문제였다. 중소기업체는 임금 체불, 임금 인상 억제 등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하니 생존할 수 없는 게임을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노총에서 강력하게 밀고 나오고 대기업이 찬성을 하니, 중소기업도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 임금 단체 협상 기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세 번째는 에르란데르 총리의 정책이다. 이 부분도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총리가 정책화하지 않았다면 노동 경제 모델로 끝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에르란데르 총리는 렌-마이드너 모델이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긴 실질적 주인공이다.
지속적 복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업과 노동, 재정과 금융 등의 조화가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자세히 설명해 달라.
기업은 고용을 창출해 내는 곳이다. 친기업 정책은 아니더라도 고용을 확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기업의 투자를 늘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자금 조달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주면 여유 자금이 늘고 주택 값이 상승해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 이것을 잡아 주기 위한 방법은 긴축 재정밖에 없다. 대신 저축을 늘려 자금이 다시 기업으로 순환될 수 있도록 금융과 재정 정책을 펼쳐야 기업의 자금에 숨통이 트이고 투자에 나설 수가 있다.
정부의 노동 정책, 임금 정책, 실업 교육 정책은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연대 임금제를 통해 채산성이 좋아진 기업은 문제가 없지만 급격한 임금 인상으로 경영 위기가 찾아온 중소기업들은 시장 논리에 따라 파산할 수도 있다. 실업자의 재교육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해 다른 기업에 취업할 수 있도록 노동 교육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중소기업들은 인건비 인상이라는 환경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술력 향상, 공장 자동화,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다. 이렇게 다져진 힘은 국제 무대에서도 살아남는 원동력이 된다. 대기업은 여유 자금으로 공장 확장, 고용 확대에 나설 수 있다.
세계 재정 위기, 실업률 증가, 사회 복지 약화로 스웨덴 노동 모델이 점차 힘을 잃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미래를 전망한다면.
스웨덴 모델은 지금과 같이 진행된다면 사멸되고 말 것이다. 사민당이 약화되어 30퍼센트 지지율 정당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복지 제도를 지탱해 나갈 힘이 없다. 우파 정당들의 집권으로 민영화와 세금 축소를 통해 시장 경쟁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공공복지는 점차 축소되어 갈 것이다.
스웨덴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복지 제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가 높은 상태에서 정부가 복지 제도를 갑작스럽게 해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금 부담률은 아직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다. 복지를 유지하려면 필수적인 것이 복지 재정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함수를 제대로 조합해야 스웨덴 모델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이 한국적 복지 모델을 갖추려면 우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복지 재정을 확보한 후 그 수준에 맞추어 복지를 확장해나가야 한다. 복지는 신뢰를 기초로 한다. 정부의 신뢰, 그리고 시장의 신뢰다. 조세 제도가 투명해야 하고, 공평해야 한다. 투명 제도, 공평 조세에 대한 이론적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면 국민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인기 영합주의나 갈등 유발형 모델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