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단계에 돌입한 넷플릭스
넷플릭스는 전 세계 1억 80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대표적인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다. 인터넷(net)과 영화(flick)의 합성어인 넷플릭스는 DVD 유통으로 시작해 전 세계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스트리밍 플랫폼 서비스로 성장했다. 넷플릭스는 데이터 기반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테크 기업인 동시에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콘텐츠 기업이다.
넷플릭스는 자사의 역사를 총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1] 첫 단계는 1997~2001년이다. 넷플릭스가 온라인에서 DVD 렌털 서비스를 시작한 시기다. DVD조차 생소했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DVD를 온라인으로 유통한다는 발상은 기발한 만큼 위험한 시도였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사업의 안정성보다 소비자 편의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미국의 비디오 대여 시장을 지배했던 블록버스터는 소비자가 직접 매장을 찾아 대여하고 반납하는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는 기존 서비스의 불편함에 착안해 세계 최초의 온라인 영화 렌털 사업을 도입했다. 2000년에는 소비자의 구매 데이터를 바탕으로 영화를 추천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추천 시스템은 넷플릭스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2002~2006년, 넷플릭스는 스타트업을 넘어 규모를 갖춘 사업자로 자리매김했다. 2002년 나스닥에 상장했고, 2005년에는 가입자 수 400만 명을 돌파했다. 블록버스터를 비롯한 영화 유통 사업체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에게 인수를 제안하기도 했다.[2]
2007년 넷플릭스는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하고 2011년까지 스트리밍 디바이스 기업들과 제휴를 맺는 일에 주력했다. 넷플릭스를 이용할 수 있는 디바이스의 범위를 확장하고 제공할 콘텐츠를 수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시기다. 이 단계에서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다. 2010년 캐나다를 시작으로 이듬해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추천 시스템은 스트리밍 론칭 과정에서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작용했다.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월 정액제는 이용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발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용자의 취향에 맞춰 콘텐츠를 추천해 주는 기술은 필수가 됐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이용자들이 본 콘텐츠의 80퍼센트가 추천 시스템을 거치고 있다.[3]
2012년은 넷플릭스가 첫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한 해다. 그동안 구축된 빅데이터를 분석해 콘텐츠를 만든 것이다. 실리콘밸리 출신의 헤이스팅스는 창업 초기 데이터 기반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넷플릭스는 영화를 유통하는 회사였지만, 콘텐츠 회사보다는 기술 회사에 더 가까웠다.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계기로 기술을 통해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로 도약했다.
오리지널 콘텐츠는 넷플릭스의 핵심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데이터 분석 기업 패럿 애널리틱스(Parrot Analytics)가 분기별로 발표하는 글로벌 콘텐츠 수요 조사에 따르면 2019년 3분기 디지털 오리지널 콘텐츠 수요 가운데 넷플릭스의 비중은 61.3퍼센트로 압도적이었다. 2위는 아마존 프라임으로 12.4퍼센트에 그쳤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보는 디지털 오리지널 콘텐츠 20개 중 10개 이상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다. 1위부터 3위를 모두 넷플릭스 콘텐츠가 차지했다.[4]
2012년은 글로벌 진출을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는 해외 사업자와 제휴해 현지 이용자의 니즈를 파악해 해외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5] 2016년까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190여 개국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2017년 1분기 이후 유럽 지역 가입자 수는 14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가입자는 세 배 이상 증가했다.[6] 2019년 12월에 처음으로 지역별 성과를 발표한 넷플릭스는 현재까지 190여 개국에 1억 8000만 명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가 2017년 이후부터 현재다. 넷플릭스의 전략 자체는 변한 것이 없다. 오리지널 콘텐츠의 수가 늘고 진출한 국가가 많아진 것 외에는 큰 변곡점이 될 만한 사건은 없어 보인다. 2017년과 2018년 실적에도 2017년 글로벌 회원 수가 1억 명을 돌파한 것 외에는 모두 아카데미와 에미상 같은 수상 경력만 적혀 있다. 2017년을 성장의 변곡점으로 삼은 것은 넷플릭스가 기술 기업에서 콘텐츠 기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핵심은 넷플릭스가 기술 스타트업을 넘어 평단의 지지를 받는 콘텐츠 제작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이다. 상업적인 경쟁력뿐 아니라 비평적 가치가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제작하고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ón) 감독이 연출한 영화 〈로마(Roma)〉는 2018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15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감독상, 외국어영화상, 촬영상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한 작품상 후보였던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아이리시맨(Irishman)〉 역시 넷플릭스가 제작한 오리지널 콘텐츠다.
넷플릭스의 위기와 기회
2019년 미국의 넷플릭스 유료 가입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했다. 6030만 명을 기록하던 총 가입자 수는 2019년 1분기에 12만 명 이상 이탈하며 약 6010만 명으로 떨어졌다.[7] 3분기에는 신규 가입자 수가 50만 명 이상 증가하며 다시 상승 곡선을 탔지만 가입자 수 감소는 넷플릭스에게 분명한 위기의 신호였다.
넷플릭스의 위기는 OTT 스트리밍 시장의 활성화와 맞물려 있다. 디즈니, 애플, AT&T, NBC유니버설 같은 레거시 미디어들이 OTT 스트리밍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애플과 디즈니는 디즈니플러스와 애플TV플러스라는 브랜드로 월정액 스트리밍 서비스를 론칭했다. 2020년에는 워너미디어의 HBO Max, NBC 유니버설의 피콕(Peacock), 드림웍스 CEO 출신 제프리 카젠버그(Jeffrey Katzenberg)의 퀴비(Quibi) 등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미국 소비자 기술 협회(CTA·Consumer Technology Association)는 2020년 미국 소비자들의 스트리밍 서비스 지출이 전년 대비 29퍼센트 증가한 241억 달러(29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8]
레거시 미디어들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면서 자사 콘텐츠를 넷플릭스 등에 제한적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콘텐츠 제작 비용으로 부채가 늘고 있지만, 넷플릭스는 당분간 공격적인 콘텐츠 투자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의 대표적인 혁신 기술인 데이터 기반 맞춤형 서비스도 독보적인 경쟁력이 되기는 어렵다. 패럿 애널리틱스는 월정액 플랫폼 간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기존 가입자의 선호도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다. 넷플릭스가 현재 보유한 가입자 데이터로는 새롭게 유치해야 할 가입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9]
결국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요금을 인상하거나 새로운 광고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2019년 12년 만에 요금을 인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꼽는 디즈니플러스로 인해 더 이상의 요금 인상도 쉽지 않아 보인다. 디즈니는 막대한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월 이용료가 6.99달러(연간 결제 시 69.99달러)로 8.99달러인 넷플릭스보다 저렴하다. 12.99달러만 내면 디즈니플러스, 훌루(Hulu), ESPN플러스 결합 상품도 이용할 수 있다. 2019년 11월 12일에 출시된 디즈니플러스는 한 달 만에 24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했고 디즈니플러스의 약진은 넷플릭스 위기론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스트리밍의 상징이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넷플릭스 효과(Netflix effect)라고도 불리는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소비자의 편의성을 고려한 개인화된 동영상 추천 기능을 강조한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넷플릭스가 미디어 산업에 일으킨 변화를 넷플릭소노믹스(Netflixonomics)라고 명명하며 세계 미디어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꾼 넷플릭스의 특징으로 오리지널 콘텐츠, 지속적인 콘텐츠 업데이트, 소비자 중심 사고를 꼽았다.[10]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공급과 소비의 방식을 모두 바꿔 놓고 있다.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에 갑갑함을 느낀 제작자들은 넷플릭스와 협업해 전위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용자들의 동영상 소비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관심 경쟁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발전한 스트리밍 서비스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런 서비스를 일컫는 용어 OTT는 ‘Over The Top’의 약자로 영화나 방송 등 미디어 콘텐츠를 셋톱박스 없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디바이스로 보내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TV 방송 편성과 같은 레거시 미디어의 시공간적 제약은 허물어졌다. OTT 서비스를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콘텐츠를 볼 수 있고 몰아보기(binge-watching)와 같은 새로운 방식의 영상 소비가 가능하다. 동영상 소비 리듬을 이용자가 능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스트리밍 시장의 활성화로 나타난 새로운 미디어 소비의 특성은 파편화(fragmentation)[11]로 정의할 수 있다. 소비 시간과 방식이 소비자에 따라 각기 달라지면서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트리밍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월 정액제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가 주목받고 있다. 월 정액제 기반 사업자들의 경쟁력은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에 있다. 경쟁이 격화되어 오리지널 콘텐츠를 자사 플랫폼에서만 제공하는 경향이 심화되면, 원하는 콘텐츠를 보기 위해 기존에 이용하던 스트리밍 서비스의 구독을 해지하고 새로운 스트리밍 서비스에 가입하는 이용자가 늘어날 수 있다. 이미 구독하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할 경우에는 여러 가지 스트리밍 서비스를 동시에 소비하는 이용자들이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 시장 조사 기업 파크 어소시에이츠(Parks Associates)는 2019년 미국인의 46퍼센트가 2개 이상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12] 2014년의 20퍼센트, 2017년의 33퍼센트에서 크게 성장한 결과다. 스트리밍 서비스 시장이 지속해서 성장한다면 디즈니플러스와 애플TV플러스는 넷플릭스의 경쟁자가 아닌 보완재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구독자의 관심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관심은 구독의 기본 조건이다. 미디어 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인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는 과거에는 미디어가 희소한 자원이었다면 이제는 이용자의 관심이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용자의 관심을 얻기 위해 미디어들이 경쟁하는 상황을 관심의 시장(marketplace of attention)이라고 명명한다.[13] 리드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의 경쟁 상대는 수면 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14] 스트리밍 사업자들이 이용자의 관심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업자들은 한정된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고 맞춤형 서비스 기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결국 넷플릭스가 초점을 맞추는 기술과 콘텐츠 투자는 모두 독자의 관심을 겨냥하고 있다.
이용자의 관심은 온라인 플랫폼의 중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용자의 관심은 데이터 확보에 필요하다. 디지털 시장에서는 이용자들의 관심이 데이터라는 자원으로 쌓인다. 데이터가 쌓이면 이용자가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하다. 경영학자이면서 오랜 기간 IT 분야에 종사해 왔던 스콧 갤러웨이(Scott Galloway)는 페이스북이 활용하는 이용자의 데이터를 페이스북의 연료라고 표현한 바 있다.[15]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온라인 플랫폼들이 접속 시간, 총 이용 시간, 접속 경로와 같은 데이터를 세분화해서 종합적으로 저장하는 이유다.
축적된 데이터는 이용자들이 선호하는 콘텐츠와 서비스를 예측할 때 활용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많은 이용자들이 높은 충성도를 갖고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고 광고 단가는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이용자들의 관심이 모여 데이터가 쌓이고 데이터로 이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