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에 가득 차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기후 변화의 경우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80억 명 중 단 한 명의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설령 중국의 국가 주석이라고 하더라도, 언행에 관계없이 기후 변화는 예정된 경로를 밟아 나갈 가능성이 높다.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틀린 의견을 내도 실질적으로 드는 비용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는 현실적이며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몬태나에서 보리농사를 짓는 농부를 상상해 보자. 뜨겁고 건조한 여름이 지속되면서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아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경우 기후 변화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몬태나의 시골은 보수적인 지역이며, ‘기후 변화’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해서 단 한 명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널리스트인 아리 르보(Ari LeVaux)는 농부인 에릭 소머펠드(Erik Somerfeld)가 무기력해지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소머펠드는 들판에 서서 시들어 가는 농작물을 보고면서 피해 원인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기후 변화’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 들어가면, 그의 어조가 바뀌었다. 그는 ‘변덕스런 날씨’와 ‘더 건조해지고 뜨거워진 여름’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입 밖에 꺼내선 안 되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 방식은 요즘 농촌에서 드물지 않다.”
만약 소머펠드가 미국 오리건의 포틀랜드나 영국 이스트서식스의 브라이튼에 살고 있었다면, 동네 술집에서 말조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후 변화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친구들과 어울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기후 변화는 중국의 거짓말이라며 시끄럽게 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곧바로 따돌림 당하기 마련이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후 변화라는 주제에 대해서 양극단으로 갈린다는 사실은 결국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일을 깊이 신경 쓰게 됐다. 이런 사실은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정치적으로 의견이 나눠지는 주제에서 ‘의도된 합리화’의 덫에 걸릴 위험성이 더 높다는 테이버와 로지의 연구 결과를 설명해 준다. 주변 지인들이 이미 믿고 있는 사실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면, 더욱 존중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차분히 생각하게 유도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 그린피스(Greenpeace)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무언가로 인한 사회적인 결과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결과가 미미하다면 잘못된 길로 이끌리기 쉽다. 수많은 논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분열되는 상황은 우연은 아니다.
“나는 정치적인 신조가 있지만 당신은 편향돼 있다” 혹은 “그는 비주류 음모론자다” 같은 ‘의도된 합리화’는 그저 남일이라고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때때로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현명하다.
킹스칼리지런던(King’s College London)의 신경과학자 크리스 드 메이어(Kris De Meyer)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여 줬다. 마치 환경 운동가가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입장에 대해 문제의식을 설명하는 내용처럼 보인다.
부정하는 이들의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그들의 노력은 공격적이었던 반면, 우리의 노력은 방어적이었다. (2)부정하는 이들은 마치 철저한 행동 계획을 세워 놓은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나는 부정적인 세력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회주의자이라고 특징지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행동했다. 과학계를 공격하며 사용하는 정보의 유형에는 전혀 원칙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관련 사안을 다루고 언론 매체와 대중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서툴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글을 읽은 학생들은 모두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연막작전과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에 격하게 동의했다. 학생들은 모두 기후 위기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 메이어가 공개한 글의 출처는 최근에 주고받은 이메일이 아니었다. 기후 변화가 아닌 1960년대 담배 업계에 종사하던 한 마케팅 임원이 쓴 악명 높은 내부 메모 중 일부를 그대로 발췌한 글이었다. 메모는 ‘기후 변화 부정론자들’이 아니라 ‘담배 반대 세력’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기후 변화가 사실이라고 맞는 주장을 하든, 또는 담배와 암 발병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틀린 주장을 하든 상관없다. 위의 예시와 동일한 글로 서로의 주장을 펼치며 각자가 옳다고 똑같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민감해질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좌파 성향이며 환경 문제를 의식하는 내 친구들은 기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을 당연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기후 학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은 뻔하다. 과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거나, 큰 정부(big government)에서 연구 자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후 데이터를 조작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간단히 말해서, 증거를 갖고 따지기보다는 개인을 비방한다.
기후 학자 공격을 비판하는 내 친구들은 동료 경제학자들을 공격할 때 위와 비슷한 유형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더욱 확장시킨다. 경제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 때문에, 또는 대기업들에게 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 이성적인 지인에게 기후 과학자 공격과 경제학자 공격의 비슷한 점을 이해시키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지인은 내 얘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가능은 하겠으나, 이런 지인의 태도를 이중 잣대로 부르는 건 정당하지 않다. 이중 잣대에는 고의적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 합리화’는 타인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스스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무의식적인 편견이다.
통계를 근거로 하거나 과학적인 주장을 대하는 감정적 반응은 중요하지 않거나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감정은 어떠한 논리보다도 우선해서 믿음을 형성할 수 있고, 또 자주 그렇게 작용한다. 정치적 당파성이나 계속해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망, HIV 진단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마음 등, 확고한 근거는 의심하고 낯선 사실을 믿는 일이 벌어진다.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원인들이 우리 스스로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해선 안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첫 번째 간단한 단계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통계를 근거로 한 주장을 접하면, 반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격분, 환희, 부정 등의 기분을 느낀다면, 판단을 잠시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 될 필요는 없지만, 느낌만큼 생각을 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유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속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특정한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이유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이라는 요소 또한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은 스타 영화배우나 억만장자가 되길 원한다. 숙취에 면역력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뤄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욕망에는 한계가 있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셋을 세는 버릇을 들이고 무릎 반사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상황을 더 많이 알아차릴수록, 진실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교수들로 이루어진 어떤 연구 팀에서 수행한 여론 조사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지한 저널리즘과 가짜 뉴스를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500명이 넘는 이민자 집단이 자살 폭탄 조끼를 입은 채로 체포됐다”와 같은 기사를 기꺼이 공유한다. ‘공유하기’를 클릭하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일까?’라거나 ‘내가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자문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사람은 인터넷이 정신을 끊임없이 산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감정과 당파성에 휩쓸린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많은 거짓 정보를 걸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 것뿐이다.
선동적인 밈(meme)이나 열변을 토하는 발언들은 사람들을 고민 없이 잘못된 결론으로 건너뛰게 만든다. 침착해져야 한다. 수많은 논조들은 욕망과 동정심, 분노를 끌어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차분히 생각하게 유도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 그린피스(Greenpeace)도 마찬가지다.
[2] 오늘날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멈춰서 생각해 보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다급함을 느끼기를 원한다. 그러니 서두르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