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산업화 이전의 몇 세기 동안만 하더라도, 각 가정에서 스툴이나 벤치 같은 가구를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의자는 그렇지 않았다. 의자는 부유하면서도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 같은 것이었다. 대량 생산이 시작되면서 사회와 경제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한 19세기가 되자, 의자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산업화 시대의 일자리는 앉은 자세로 일해야 하는 반복적인 작업이 많았기 때문에 의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수요가 커진 만큼 의자는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들이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해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문화”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크랜츠는 쓰고 있다. 의자를 하나의 스타일이자 실용적인 표준으로 고착화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현대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었는데, 의자가 비록 인체 공학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의자의 본래적인 미학 안에서 그것의 형태를 계속해서 재창조했다. 의자는 등받이와 좌판이 인체의 해부학적인 모양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네 발 달린 생명체이며, 마치 동물들처럼 몸통을 세우고 일어선 그 친숙한 모습은 우리에게 어서 여기로 와서 살아 있는 구조물 위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크랜츠는 의자가 “건축적인 요소와 의인화적인 요인”이 결합되어 사람들에게, 그중에서도 특히 디자이너들에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즉, 의자는 구조적으로 흥미로운 동시에, 인간의 신체가 그 자체로 반향이 되어 울려 나오는 대상인 것이다.
의자가 인간의 신체 형태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인간의 신체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수많은 의자들은 보기만 해도 편안할 것처럼 보이는 크고 푹신한 쿠션을 갖고 있는데, 인체 공학에 따르면 이렇게 쿠션 처리가 된 의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틀렸다. 크랜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쿠션이 너무 지나치면 사람의 좌골이 고른 바닥면과 만나기보다는 쿠션 속에 파묻히기 때문에, 엉덩이와 허벅지 부위의 살이 그만큼의 무게를 더 견뎌야 한다.”
편안하다고 외치는 듯한 멋진 쿠션의 의자가 실제로는 왜 인간의 신체에 그렇게 맞지 않는 것일까? 크랜츠는 사람이 신체를 움직여야 하며, 진정한 인체 공학이라면 디자이너들이 인간의 신체를 가만히 멈춰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디자인을 지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등받이를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좌대는 앉은 사람이 체중을 양쪽 다리로 번갈아 옮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행하는 스타일을 따르고 제조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 이런 원칙들이 무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자는 신체의 현실이나 진화적인 특성을 고려한 것도 아니고, 신체를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움직여야 하는 필요성을 반영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산업화 시대의 몸이 의자를 필요로 했고, 거기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다. 크랜츠는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말을 인용해서, “우리는 의자를 디자인하지만, 그다음에는 의자가 우리를 만든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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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집단으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그들의 ‘특수한’ 요구 사항들까지 모두 결합한다면, 우리가 결국 대다수를 위해서 디자인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디자이너들도 앉는 방식을 바꾸려고 많은 시도를 해왔다. 무릎을 꿇고 앉는 의자나 바운싱 볼에 앉는 방식도 있고, 무게 중심과 자세를 바꾸도록 유도하기 위해 좌대가 둥글게 되어서 걸터앉는 방식의 스툴도 나와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 유연하게 디자인 한 트립트랩(Tripp Trapp) 같은 의자도 있는데, 이 의자는 아이들의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 말뚝을 이용해서 좌대와 발 받침대의 위치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사무실에서 스탠딩 데스크를 도입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식당이나, 평범한 교실, 기차와 버스,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편안함이라는 것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의자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의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산업 디자인이라는 전문 분야의 손을 거쳐 시장에 출시된 수많은 제품들도 사람들 다수의 신체를 고려해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한 제품들은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고, 필요보다는 참신함을 추구했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디자인이 되었다. 유명한 디자이너인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은 이처럼 나쁜 디자인을 “우리를 죽이는 DIY(do-it-yourself)”라며 인상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971년에 이렇게 썼다. “성인 남성들이 자리에 앉아서 전기 머리빗이나 모조 다이아몬드가 뒤덮인 서류함, 욕실에 깔기 위한 밍크 카펫 등을 디자인하고, 그런 도구들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만들어 팔기 위해 정교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역사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던 광경이다. 오늘날 산업 디자인은 우리를 죽이는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전 세계에서 매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흉악범인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영원히 썩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쓰레기를 만들어서 풍경을 지저분하게 만들며,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오염시키는 재료와 생산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디자이너들은 위험한 생물종이 되어 버렸다.”
파파넥이 이런 글을 썼을 당시, 그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인간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은 20세기 중반의 산업 디자인이 잘못된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파파넥이 “수의 디자인(shroud design)”이라는 다소 섬뜩한 용어로 부르는 디자인에 대해 디자이너들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며 상당히 강도 높은 주장을 했다. 그가 표현하는 ‘수의 디자인’이란 어떤 물건의 기능이나 견고함 및 지속 가능성을 희생시키고, 겉모습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다루는 제품들이 우리의 신체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또는 어울리지 못하는지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제품들이 도구로서 우리의 일상에 결합되도록 의도된 작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스스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기도 했다. “만약 모든 의사들이 일반 진료와 수술을 포기하고, 피부과와 성형외과에만 집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상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