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리 CEO는 2000억 엔을 들여 필름 공장을 폐쇄하는가 하면, 필름 판매·유통망을 정리했다. 2005년에서 2006년 사이에는 필름 사업 인력 5000명을 구조 조정 대상에 올렸다. 후지의 주력 산업인 사진 필름은 이미 일본과 미국, 그리고 네덜란드 등 3곳에 대형 공장을 갖고 있었고, 전 세계 150여 곳에 대형 현상소를 보유할 만큼 규모가 거대했다. 게다가 직원들의 가족까지 생각하면 20만여 명의 생계가 달려 있기 때문에 대규모 구조 개혁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현재의 규모를 유지하기에는 막대한 고정비가 들어가고, 잠시라도 매출이 떨어지면 적자가 끝도 없이 불어난다는 문제점이 있다. 말이 좋아 구조 개혁이지 인원 감축은 결국 경영자가 가장 회피하고 싶어 하는 최후의 선택이다. 특히 종신 고용제가 일종의 사회적 규범처럼 정착된 일본의 기업 문화에서 대규모 인원 감원 결정은 더욱 쉽지 않다. 더군다나 CEO는 전문 경영인으로 기업의 대주주인 오너가 아니다. 개혁에 대한 저항도 많았지만 그는 직접 사내 방송에 출연해 구조 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했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후지필름은 전체 사업을 대상으로 또다시 5000명을 감원해야 했다. 후지필름은 이때의 구조 조정을 통해 연간 1000억 엔 이상의 고정비를 줄일 수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M&A를 이어간 덕분에 신약 개발, 바이오 의약품 위탁 생산 등 역량 확대에 성공했다. 인력을 줄인 다음 해인 2010년에는 전년보다 영업 이익도 대폭 높아졌다.
대신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는 확실하게 투자했다. 특히 연구 개발(R&D) 분야를 키웠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여러 기술을 복합적으로 활용해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모리 CEO는 2018년 가나가와(神奈川)현에 6000억 엔을 들여 후지필름 선진 연구소를 설립했다. 1000여 명의 연구자가 모여 신규 사업과 신제품 개발의 기반이 되는 코어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다. 지방에 흩어져 있던 화학, 전자 공학, 메커트로닉스(기계와 전자의 결합 기술), 광학, 소프트웨어 등 광범위한 기술력을 한 곳으로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노린다는 전략이다. 회사는 재정 여력과 상관없이 매년 2000억 엔 규모의 연구 개발비를 지원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에 회사를 뒷받침할 분야에 투자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 고모리 CEO의 목표는 후지필름을 디지털 회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17] 시장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디지털에 매달려 봤자 매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후지필름은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 변화를 예측하고 앞지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주력 상품인 필름이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원천 기술을 창조적으로 재활용하고 재배치했다. 유능한 인재와 기술, 그리고 브랜드 파워와 기업 문화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냈다. 화장품이나 바이오 사업 경험이 전혀 없는 데도 개방적 기술 확보,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고모리 CEO는 과감한 결단의 비결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다른 회사가 할 것이다.”
[18] 과감한 결단 이후에는 실행하는 리더십을 직원 모두가 가져야 한다고 독려했다. 각종 현장을 돌면서 직원들에게 회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러 차례 명확하게 전달했다. 이는 직원들을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다.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지 않고 한발 앞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수 있는 기업 환경과 유연함은 후지필름의 문화로 정착됐다.
전 세계에서 저성장 기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해 오던 경영 방식만 고집한다면 성장은 불가능하다. 공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후지필름이 보여 준 아웃사이드 인(outside-in)전략이 필요하다. 회사 내부가 아닌 외부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를 이끌기 위해 협력과 공동 개발도 늘려야 한다. 코닥이 될 것이냐, 후지필름이 될 것이냐. 변화에 주저하는 많은 기업 앞에 놓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