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의 명소 칼리오 교회 앞에는 굿 라이프 커피(Good Life Coffee)라는 카페가 있다. 그곳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 20대 청년이 노키아 2G폰을 쓰고 있었다.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구형 모델이었다. 다른 손에는 핀란드 신문이 들려 있었고, 옆 테이블에는 맥북이, 선반에는 카페의 모토 ‘Avoid Bad Life’가 적힌 에코백과 티셔츠가 놓여 있었다. 오후 늦은 시간, 종이와 모바일, 모니터라는 차이만 있을 뿐, 현지인 서너 명은 다들 읽기에 빠져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7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평소처럼 페이스북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한국 매체의 속보를 아이폰으로 실시간 확인했다. 그날 내가 10평 남짓한 공간에서 목격한 모든 것이 미디어의 현재이자 과거였다.
헬싱키에는 디자인과 스타트업 육성, 미디어랩으로 유명한 알토대학교가 있다. 정부 주도하에 헬싱키공과대, 헬싱키경제대, 헬싱키예술디자인대가 통합되어 설립된 학교다. 내가 방문한 알토대학교 미디어랩은 세운상가의 3D 프린터 공방을 연상시키는 공간이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VR 기기, 로봇, 인터랙티브 영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미디어는 단순히 신문과 방송, 뉴미디어를 뜻하지 않는다. 공학과 예술, 비즈니스 분야의 총체로 여겨진다. 실제로 알토대학교는 노키아와 산학 협력 관계를 맺고, 학부생들이 AR 앱과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버드대학교 저널리즘연구소 니먼랩은 매년 미디어 혁신에 대한 업계 종사자의 의견을 취합해 발표한다. 2018년에는 176명의 의견을 담았다. ‘올해는 워싱턴포스트의 해가 될 것’, ‘소셜 미디어는 종말을 고할 것’, ‘언론사 스스로 취약점을 드러내라’, ‘스포티파이를 주의 깊게 보라’, ‘TV는 디지털로, 디지털은 TV로’, ‘M2M(machine to machine, 사물 통신) 저널리즘의 해’, ‘지역 언론의 (폭스뉴스와 같은) 보수화’, ‘투표자의 해’라는 전망이 나왔고, 인공지능, 블록체인, 로컬, 팟캐스트 같은 단어도 수차례 등장했다. 따지고 보면 전망이라기보다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논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디어 산업은 전망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혁신을 외친다. 혁신과 모방. 지난 수십 년간 반복해 온 사이클이다. 많은 매체가 서로를 베낀다. 컬래버레이션은 업계를 뛰어넘는다. 폴리티코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 악셀슈프링어가 포르쉐와, 오바마 부부가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는 콘텐츠 제작사를 설립해 영화와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을 넷플릭스에 공급할 예정이다.
미국의 SF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이미 여기 와 있다. 다만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이 말은 미디어 업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혁신 또는 미래는 뉴욕타임스, 버즈피드, 월스트리트저널, 쿼츠의 본사가 포진해 있는, 미디어 산업의 심장부 뉴욕 맨해튼의 몇 블록 안에 집중되어 있다. 디지털 저널리즘 연구의 산실인 토우 센터(Tow Center)와 퓰리처상 수상작을 발표하는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도 지척에 있다. 뉴욕이 미디어를 선도하고 세계는 뒤쫓는다. 미디어가 미디어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깁슨의 말처럼 고르게 분포해 있지 않은 미래 기술을 서둘러 베끼기 위함이다.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가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도약한 사례도 있지 않은가.
이 책은 미디어업계에서 혁신을 시도하고 있는 매체의 임직원을 인터뷰한 조선비즈의 인터뷰 시리즈 〈미디어 혁신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본문의 절반은 기존 기사에 새 내용을 추가했고, 나머지 절반은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인터뷰다. 금세 바뀌는 업계 특성을 감안해 꼭지 대부분을 새로 썼다.
취재와 집필 과정에서 혁신 미디어의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애자일(agile, 민첩한) 전략을 지킨다. 애자일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통용되는 개념으로,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프로토타입(prototype, 개발 버전)을 만들어 내고, 테스트와 개선을 병행하는 전략이다. 미디어 분야의 혁신 기업들은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실행하고(do), 빨리 실패하고(fast fail), 무엇을 개선할지 배우고(learn), 다시 시도하는(redo)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었다.
둘째, 환원적으로 사고하고 문제를 재정의한다. 이제는 상식이 된 개념이나 시장, 이용자, 무엇이든 근원부터 파고들어 문제를 찾고 해법을 제시한다. 업계를 뒤흔드는 새로운 시도는 기성 미디어와는 다른 문제 정의에서부터 시작된다. 스팀잇의 창업자 겸 CEO 네드 스콧은 소셜 미디어에 남기는 글의 경제적 가치를 새롭게 정의했다. 페이스북은 팔로워가 10명이든 10만 명이든 창작자에게 대가를 지급하지 않지만, 스팀잇은 보상을 제공한다.
셋째, 장점을 극대화한다. 이것저것 손대지 않고 잘하는 일에 자원을 집중한다. 단점을 보완하기보다 장점을 더 뾰족하게 만든다.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의 특성상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웬만큼 규모를 갖춘 곳에서도 이런 선택과 집중이 발견된다. 모노클은 사양 산업이라 불리는 종이 잡지를 통해 빠르게 성장해 왔다. 탄탄한 브랜드를 구축했다면 다른 채널로 눈을 돌릴 법도 한데, 여전히 종이를 고집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계정조차 없다.
내가 만나고 취재한 미디어들은 모두 스타트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161년 전통의 애틀랜틱미디어컴퍼니가 2012년에 설립한 쿼츠는 현재 직원 수가 200명이 넘지만 아직도 스타트업임을 강조한다. 케빈 딜레이니 편집장의 말은 참고할 만하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스타트업인 쿼츠는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파악하고, 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원고를 집필한 5개월 동안 많은 매체가 고점과 저점을 찍었다. 2018년 6월, 137년 전통의 LA타임스가 외과 의사 출신 생명 공학 사업가인 패트릭 순 시옹(Patrick Soon-Shiong)에게 5억 달러(약 5600억 원)에 매각됐다. 2000년대 초, 한때 뉴욕타임스보다 발행 부수가 많았던 이 매체는 억만장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18년 4월, 페이스북은 이용자 8700만 명의 개인 정보가 유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규모 회원 탈퇴와 주가 급락으로 홍역을 치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미디어들이 명멸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미디어업계에 대한 전망이라기보다 혁신을 외치는 이들의 고유한 문제 정의와 해법 소개에 가깝다.
인터뷰 외에 매체의 성격을 요약한 코너를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매체 분석은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다. 바쁜 와중에도 귀한 시간을 내주신 취재원분들과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를 표한다.